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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꽃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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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전에 주어진 건강기별과 과학적 증거] - 장사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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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는 법 = 잘 사는 법, Well dying(웰 다잉) 1 |
행복한 생활 | 2014년 5월호 3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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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이와 죽음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수명이 있다.
1700년대에 평균 수명이 30세였던 사람이 오늘날에는 100세 시대를 살고 있으며,코끼리는 60~70년, 침팬지는 40년, 사자는 10~15년, 금붕어는 20년을, 달팽이류와 가재 그리고 풍뎅이류는 30년까지 산다. 수명의 길이는 하루살이에서부터 4,900년을 산 캘리포니아에 있는 강털소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바위나 우주에 떠 있는 수많은 별에도 수명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연결되어 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은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이다. 죽음은 곧 허무함과 슬픔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되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부정하거나 절망 그 자체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다 끝나는 게 아니냐.”라거나 “죽어 버리면 그만이 지.”라는 생각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죽음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노인들의 3대 거짓말 중에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이 있듯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맞이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암이나 갑작스런 사고에 대비해 보험에 들거나 노후를 위해 연금에 가입하는 것이 죽음 준비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톨스토이가 “사람들이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고 한탄했듯이 이제까지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왔다.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살아 있는 내내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다 결국 한 줌의 재가 된다.
웰 다잉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떠나는 것
우리가 그동안 웰빙을 외치며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며 건강한 육체를 만드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면, 웰 다잉은 건강한 마음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인간 삶의 근원적 의미를 도외시한 채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추구하는 웰빙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인 웰 다잉을 결코 보장하지 못한다.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웰 다잉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웰 다잉은 ‘잘 죽는 것’을 뜻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순서 없이, 누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미리 경험할 수 없는 공평한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여 인생을 잘 마무리 짓자는 것이다. 이미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은 30~40년 전부터 웰 다잉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다. 일상적인 삶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생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웰빙에서 물질적인 면이 충족되고 나니, 그동안 외면했던 죽음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이다.1970년대 들어 서구 사회는 죽음 교육을 공론화하고 성교육과 함께 학교 교육의 영역으로 채택하였다. 미국 공립 초·중·고교는 죽음에 관한 책이나 시, 음악을 공부하고, 장례식장과 묘지를 방문하며, 죽음에 관한 영화나 사진을 감상하고 토론하는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다. 일본 명문 게이오 고등학교의 경우 96년부터 죽음 준비 교육을 도입해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도록 하여 급증하는 청소년 자살과 학원 폭력, 청소년 탈선, 왕따 등의 문제를 해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삶에는 ‘많은 순간’이 있지만 죽음은 ‘한순간’이다. 우리가 사는 방법은 일생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사는 것 이상으로 평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죽는 일이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계기가 된다.미국에서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동안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암이 올지라도 복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있다. 상실이 주는 고통과 이별의 아픔을 통해서 삶에서 하찮게 여기던 일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렇듯 죽음의 의미를 알면 세월을 아끼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너무도 늦은 시간에, 실제로 자신이 죽어 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므로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죽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죽음의 순간에는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 속살이 낱낱이 드러나 후회스럽지만 돌이킬 시간은 없다.
잘 죽는 법 = 잘 사는 법
죽음의 수용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삶의 수용이다. 죽음 준비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바로, 지금,여기에서’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잘 사는 것이다. 고단하지만 보람 있게 잘 보낸 하루가 그날 밤 평안하고 달콤한 숙면을 취하게 하듯이 잘 살아온 인생은 행복한 마무리를 선물로 줄 것이다. 결국 잘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결국은 누구나 죽을 것이니 아직 생각할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전도서 7장 2절, 현대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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