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
|
|
|
|
|
|
|
|
|
정무흠 - moohum
프로필
행복한 삶
전체 - (412)
미분류 - (412)
행복한 삶 > 전체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3부 한국 동란! 고난의 세월! 가난 속에 핀 꽃! 박옥종 집사님 자서전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3부 한국 동란! 고난의 세월! 가난 속에 핀 꽃! 박옥종(Lilian Chung) 집사님(정무흠 목사의 어머니) 자서전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3부 두 번째 꿈 이야기!!!***
***한국 동란! 고난의 세월!!! 가난 속에 핀 꽃! 박옥종(Lilian Chung)***


제 3 부 두 번째 꿈 이야기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둘째 꿈

작열(灼熱)하는 태양 아래 달아오른 사막은 마치 한증막 속 같았고 뜨거운 모래 속에서 앞으로 잘 나가주지를 않는 발걸음은 터벅거리기만 했다. 갈증으로 혀는 말라붙고 물 한 목음도 구할 수 없는 사막을 사람들은 가고 있었다.

수레와 소, 말들의 등에 잔뜩 물건들을 싣고, 어떤 이는 등에 지고 머리에 보따리를 인 여인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짐들은 하나하나 버려지고 홀몸으로도 가기 어려운 이 뜨거운 사막에 사람의 수도 차차 줄어들었다.

이제 겨우 손가락으로 헤일 수 있는 희소한 수의 사람만이 허위허위 최후의 힘을 다해 사막을 가고 있었다.

최후의 이 남은 자 마저 쓰러질 지경이 되었던 그때, 아! 그들의 눈에 초록빛 희망의 상징이 보였다. 은혜였다. 옛 사람은 이런 경우를 가리켜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하였던가!

나는 외로운 나그네였다. 그 열사(熱砂)의 사막에선 대화(對話)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고 웃는 사람도 보지 못했고 노래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오직 이 용광로 같은 사막을 벗어나려는 사투(死鬪)가 있을 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혼신의 힘을 다한 걸음이요, 불로 지지는 듯이 따가운 발바닥의 고통과 타는 듯이 아픈 목마름이 이제는 절망의 순간이 이르렀음을 알려 주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청청한 푸른 나무를, 완전히 말라버린 줄 알았던 내 몸속에 액체가 남아 있을까? 하는 절망적인 그 순간,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눈 속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청청한 나무 아래 큰 반석이 있었다. 그 반석에선 맑은 생수가 솟아나고 있었고 삼십대는 됨직한 젊은 분이 표주박으로 그 생수를 가득 떠서 내 입에 대어 주셨다.

나는 소생하였다. 그 생수를 마시고 소생하였다.

제 1 장에서 나는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세 가지 꿈을 꾸었다고 얘기했고 첫째 꿈은 1 장 서두(序頭)에서 이야기하였다.

1장

1. 쓰나미의 서곡

기차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기차 사정이 좋지 않아 집에 올 때는 츄럭을 얻어 타고 오는 수가 많았다. 그 날도 여러 학생들이 츄럭을 타고 오는데 헌병들이 나타나 이 학생들을 전혀 생소한 골짜기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가지로 문초하였는데 그 중에 나의 시동생이 있었고 친정 동생 둘이 있었다 나의 두 동생은 아버지 이름을 물어서 대니까 군 내에서 알려진 이름이고 제헌 국회 선거 위원장까지 지낸 분이라 신분이 확실하다고 인정하고 내보내 주었으나 시동생은 그 길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 집에는 당장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그 당시는 부정 부패가 심한 시대였다. “옥곡에 정부자 돈고방을 열었다.”고 경찰관 중에서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이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기가 정면으로 나서서 불의 부정과 싸운다는 것이 역부족(力不足)이라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한대야 잠시 피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멀정한 사람도 죄인으로 몰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공평과 정의가 땅에 떨어져가고 있는 세상이었으나까…

어느 날 밤, 그이는 나에게 진지하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오늘 밤으로 자기는 집을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이에게 집 걱정은 하지 말고 몸 조심 하시라고 격려하며 보냈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달밤이었다. 만감이 가슴에 서려 할 말도 많았지만 집을 떠나는 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이는 12월 말에 집을 떠나 처가를 거쳐 부산에 가서 그 곳에서 세 군데서나 와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었고 그 중의 한 자리를 선택하여 부임하였다. 석공(대한 석탄 공사)의 업무과장직이었다. 1950년 1월이었다.

그이의 집 떠난 후의 첫 편지를 받았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을 무었이라 표련해야 될지, 사모하는 남성으로부터 첫 구애의 편지를 받은 소녀인들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황홀했을까? 읽고 또 읽고 그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감격의 눈물로 그 편지를 읽으며 가슴은 파도쳤다. 우리는 편지를 받자마자 회답을 쓰며 마치 열렬한 연인 사이인양 서로의 심정을 토로하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2,3일에 한 통씩의 편지를 쓴 것 같다. 6.25 동란이 날 때까지 우리는 수십통의 편지를 썼다.

4월에 그이는 집에 다니러 왔다. 아들을 위하여 여름 교복을 사고 딸을 위하여 예쁜 원피스(드레스)를 사왔다.

나에게 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당신이 이번에 꼭 같이 가기를 원한다면 데리고 가겠지만 내 생각에는 할머니 탈상 때 내가 와서 그때 같이 가면 더 좋을 것 같소. 왜냐하면 사택 사정이 별로 안 좋고 하니 그때 쯤 독집을 하나 얻어서 갔으면 좋을 것 같소”하는 것이었다. 신중히 생각하고 하는 말임을 알기에 순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이제 앞으로 공부를 시켜 줄 계획임을 얘기하였다.

그이가 떠난 후 나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었다.

2. 한밤 중에 쳐들어온 난리

가을이지만 밤이라 쌀쌀하였다. 나는 낮에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버선도 신은 채로 옹송그리고 아기 옆에 누워 있었다. 아기는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아기만 이불을 덮어주고 나는 덮지 않았다. 잠들래야 잠들 수 었는 밤이 계속되었다. 삶이 무의미해져갔다. 먹는 것도 밥 짓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단장하는 것도 모든 일이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오직 귀만 예민해져서 대문에 달아놓은 작은 종소리가 행여 울리나 귀 기울이며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민감해졌다. 밤마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서 베개를 적셨다. 소리없는 눈물은 가슴을 더 아프게 압박하는 것 같았다.

시어머님도 계시고 아들과 딸 두 아기가 있는데도 오직 한 사람 그를 위해서만 살아돈 생명인 듯 그가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한데(노천)에서 그이가 밤을 세우고 있는지 모르는데 나는 지붕 아래 방안에서 어찌 이불을 덮고 잘 수 있겠는가?’하고 밤마다 그이를 생각하며 아침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후회해도 돌이키지 못할 후회를 홀로 되씹고 있었다.

“당신이 이번에 꼭 같이 가기를 원한다면 데리고 가겠지만…”

사실 나는 꼭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이는 항상 집안 사정을 두루 참작하여 현명한 처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할머님 탈상 때 그이가 오면 같이 가는 것이 최선책임을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리가 날 때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되어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것이었다. 12월에 그 이가 1월호 여원지를 사왔었는데 거기 부록으로 따라온 작은 책자가 있었다. 문답식 질문이 쭉 있고 거기 대답을 하는데 따라 올해 당신은 어떻겠습니다 하고 한 해의 신수를 답해주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도 재미삼아 답을 적었는데 내게는 이런 답이 나왔다. “만일 당신의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을 희생한다면 큰 불행에 봉착할 것입니다.”

나는 잠 아니오는 밤 곰곰히 그 일을 생각하였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내게 닥친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니겠는가? 집안 사정과 할머님의 빈소에서 행해야 할 그이를 대신한 나의 헌신이 끝났을 때 가겠다고 결정했던 것은 의리를 위하여 나의 사랑을 희생한 처사가 아니고 무었이었겠는가!

시동생은 무죄하다는 것이 판명되고 모든 의심 받았던 사람들은 보도 연맹에 가입만 하면 완전히 깨끗한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관의 권유에 보도 연맹에 가입하였다. 많은 사람이 이제까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지목 받았던 억울함이 하루 아침에 깨끗해진다는 말에 다 즐겨 보도 연맹에 가입하였다.

6.25동란(사변)이 터졌다. 아무 것도 모르고 평화로운 생활을 즐기던 많은 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부모, 자식, 처자, 형제를 잃고 방황하는 신세가 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많은 여자들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고, 어린이들이 아빠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왔다. 살 길은 남으로 가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피난민은 홍수처럼 남하하였다. 우리 동네에도 사람들이 넘쳤다. 우리 사랑채의 두 방에도 한 방에는 할머니 한 분이 살게 되었고 다른 한 방에는 서울에서 피난 오신 분들이 있게 되었다.

집에서 부지런히 가사를 잘 돌보던 시동생에게 또 다시 환난을 예고하는 기별이 들려왔다. 보도 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다 잡아간다는 기별이었다. 이제는 어머니도 결사적이셨을 것이다. 태산같이 믿던 큰 아들을 잃었는데 하나 남은 작은 아들을 어찌 또 잃을 수 있으리… 어머니는 난리가 난 후로 장독대에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명천(明天) 하느님, 내 아들 길이를 살려 주이소.”하시며 빌던 기도에 작은 아들 이름도 보태어 더 간젛히 기도하셨을 것이다.

어머님께서 작은 아들을 숨겨놓고 우리는 불안한 나날을 살고 있었다.

이 여름 내내 나는 어머님께서 머슴을 시켜 한데에 걸어 놓은 밥솥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어머님은 외숙부님께 부탁하여 신랑감을 구해 온순이를 시집 보냈고 이제 밥솥에 불을 지피며 밥 지을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난리가 난 후 건강이 나빠져 나는 이미 폐침윤이라는 진단을 받았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나는 천근이나 되는 무겁고 나른한 몸으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밥솥에 불을 지피고 앉았을 때면 언제나 콩 볶는 듯한 기관총 소리가 연달아 나는 것을 들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매일, 그 소리는 소름 끼치는 아픔을 가져오는 소리였다. 누군가 수없이 많은 목숨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위하면 해방 전에 일본 사람들이 하던 코발트 광산의 폐광에서 젊은이들을 사살하는 소리라 했다. 어디서 실어 오는지는 모르지만 매일 츄럭에 빽빽하게 실어서 이 더운 날에 두터운 천막천으로 뒤집어 씌워 실어나른다고 했다. 이 더운 날에 오다가 질식하여 죽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처마 밑에서 밥솥에 불 지피는 그 시간이 내겐 고문대에 앉았는 시간마냥 괴로운 시간이었다.

밥을 다 지어놓으면 밥을 시동생에게 갖다 주는 사람은 나였기에 얼마나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고 괴로운 시간이었는지 철둑에는 철경(철도 경찰대)이 또 군인이, 동네 갓(뒷산)에도 군인이 매일 매가 병아리를 노리듯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해서 보호해 주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조그만 티라도 찍어내려고 그러는지…

좌우간 눈에 보이는 철조망은 없없지만 삼엄한 경계망 속에 사는 듯한 상황인지라 그 모든 것을 의식하며 또 무시로 드나드는 피난민들을 의식하며 사랑채에 있는 분들의 눈을 피하며 아주 안전할 때만 식사를 갖다 줄수 있었으니 참으로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대문은 열려 있는데 언제 누가 대문으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냥오는 사람, 장이나 김치를 얻으러 오는 사람, 옷을 얻으로 오는 사람, 끼니 때 밥 얻으러 오는 사람, 피난민은 넘쳤다. 담에 호박잎이 남아 나지 않을 정도로 푸성귀도 아쉬운 때였다. 살아남기 위하여… 그런 모든 눈을 피하여 식사를 나르는 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듯 하였다. 시동생을 숨겨놓고 사는 동안에 여러번 놀라고 괴로운 일을 당하여야만 했다. 어머님은 손녀를 업고 마실을 가시고 하필 그럴 때에 시동생을 찾는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가고 나면 어머님께서 돌아와 무엇이라고 대답했느냐고 물으시고… 참으로 괴로운 날들이었다. 추석 날은 새벽에 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을 때 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대검으로 몇 번이고 나뭇단을 찌르며 나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한 밤중이었다. 대문을 부수는 소리가 마치 벼락치는 소리같이 들려왔다. 우리는 너무 무서워 감히 나가지 못했다. 평소에는 담대하신 어머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채부터 먼저 조사하고 다음에 본채로 온 것이었다. 안방에 계셨던 어머님은 그 사람들의 문초 중에 방귀를 뀌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방귀는 왜 뀌느냐고 했단다. 그래서 어머님은 “나오는 방귀를 내가 어찌 막아요. 하도 같잖으니까 방귀가 다 나오겠지요.”하셨다니 참말 어머님의 답이 걸작이었다.

그들은 제일 마지막에 내 방으로 왔다. 한 사람은 대청에서 후렛쉬로 나를 비추고 있고 한 사람은 동창문 밖에 서서 내 옆구리에 총대를 대고 그 총대로 내 옆구리를 찔러댔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내 가슴에 종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세 번째 사람이 내게 말하였다. 그들은 다 술에 만취가 되어 있었다. 다 이북(북한)사투리가 심한 사람들이었다.

“네 시아우의 행방을 대라우. 벌써 우리가 집에 숨겨 놔두고 구멍밥 멕인다는 투서를 받고 왔으니 쓸데 없는 변명 말고 처음부터 정직하게 말하문 다 용서하여 줄터이니께 바른 말 하시우.”

“저는 모릅니다. 제가 안다면 가르쳐 드리지요.”

이런 문답이 몇번 오고 간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총에 실탄이 장정되어 있지 않은 줄 아는 것 같다. 자 여기 보라우.”

그는 총신을 열어 실탄을 뽑아 내 눈 앞에서 보인 후에 장전하였다. 그리고 다시 내 가슴을 겨누었다. 나는 내 무릎에서 아직도 자고 있는 순진무후純眞無垢한 어린 딸을 보았다. ‘내가 저 총탄에 맞아 생명을 잃는다면 누가 이 어린 생명을 가꾸어 줄건가?’ 한없는 슬픔이 내 가슴에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고 내게 총을 겨누고 있는 무장한 술취한 그 사나이에게 말했다.

“이 아기가 불쌍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한 마디 말에 억울하게 죽는 나의 한을 담아 말했다.

‘내가 죽으면 이 어린 딸을 누가 키울 것인가!’

그가 말했다.

“앞에서는 죽지 못하겠는 모양이다.”

“뒤로 돌아 앉으시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 둘, 셋 부를 때까지 응답이 없으면 그대로 쏠 것이고, 만약 답을 하면 살 것이니 그리 아시오.”

돌아 앉으라는 그의 명령에 돌아앉았을 때의 나의 심정은 참으로 비장한 것이었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세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의 마음속은 남편에게 대한 깊은 사랑으로 승화되어갔다.

‘만약 내가 살기 위하여 그의 동생을 내어준다면 무슨 면목으로 그이를 만날 수 있을지... 그러나 내가 내 생명을 희생하고 시동생을 살린다면 훗날 그이가 돌아와서 나의 무덤의 흙에 그이의 눈물을 뿌리리라.’

내가 끝까지 남편을 사랑하며 그와 한 혈육으로 태어난 그의 동생의 생명을 아끼는 것이 그의 아내된 나의 의무이며 사람의 도리라고 깨달았을 때 나의 마음에 평화가 왔다 참으로 잔잔한 평화였다. 아무 것도 이 평화를 깨뜨릴 수사 없는 그런 평화였다. 나의 등 뒤에서 나의 심장을 목표로 겨누고 있을, 총알이 장전되어 있는 총이 나를 위협하고 있어도 나는 미동도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셋!”소리가 발해졌지만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그날 밤 다시 우리 집의 모든 주거자들이 다 철경대 막사로 끌려갔고 개별적으로 문초를 받아야만 했다. 나는 내 방에서 그들에게 잠깐 내가 아기의 겨울 포대기를 덮고 나가야 하니 말미를 달라 했더니 그래도 양해해 주어 겨울포대기로 아기를 엎고 나갈 수 있었다. 나를 끝으로 모든 사람의 문초가 끝났고 나와 어머님에겐 내일 아침 8 시에 다시 철경대에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자백하지 않으니 내일 경찰에 연행하여 전기고문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어떻한 장사도 전기고문에는 배겨내는 장사가 없는데 내일 보자고 하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이하여 어머님과 나는 철경대로 출두했다. 그들은 어제 저녁과는 달라져 있었다. 어제 저녁에는 만취된 상태로 우리를 취조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술도 깨어 있었고 우리에게

“우리가 해롭게 하려고 그러는게 아니고 좋은 사람 만들려고 그러니 집에 돌아오거든 우리에게 곧 연락하시우.” 하고 우리를 보내주었다.

집에 와서 아침밥을 지었으나 참으로 밥알이 모래알 같아 넘어가지를 않았다. 어린 아들은 깊은 단잠을 자느라 그 모든 무서운 사건을 보지 않았으니 참으로 복이 많은 아이였다.

어머님은 그날로 아들을 피난처로 피신을 시키셨다. 그리고 모든 난리가 잔 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으로 시동생이 오늘날까지 살아서 나와 함께 좋은 노년을 맞이하여 서로 형제 우애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겠다. 비록 아이들이 아버지는 잃었지만 작은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3. 몸과 마음 다한 헌신

내 나이 서른 살일 때, 나는 부산 시청에서 일하던 것을 그만 두고 우리 집에서 약 6 km 쯤 떨어진 곳의 초등학교 교사로 가게 되었다. 학교에 부임할 때까지 공백(空白) 기간 동안 집에서 쉬게 되었다. 마침 그 기간 동안에 지영 아가씨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 전에 작은댁에 가서 바느질을 하게 되었다. 열흘 동안을 눈 한 번 안 붙이고 그 바느질, 예물로 보낼 바느질과 신부가 시집 갈 때 가져갈 바느질들을 하였다. 과수원 속의 새로 지은 집이라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우리 동네에도 아직 전깃불이 없었다. 작은댁은 읍내에서 가까웠는데도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호롱불을 켜놓고 밤에도 일했는데 밤이면 혼자 깨어 앉은 채로 창이 밝아지면 호롱불을 껐다. 나는 지영 아가씨(사촌 시누이)를 사랑했다. 어머니를 잃고 출가하는 아가씨, 어머니 젓꼭지 한 번 물어보지도 못하고 유모의 젖 먹고 자라나는 동생을 키우느라 얼굴에 기미까지 낀 착한 아가씨를 생각하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것이었다.

작은 어머님(시숙모님)은 둘 째 아드님을 낳자마자 돌아누우셨는데 그대로 가신 것이었다. 작은 아버님(시숙부님)의 비탄(悲歎)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발인제(發靷祭)를 지낼 때 통곡을 하시는데 내 가슴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위로 딸 넷, 아래로 아들 둘, 6 남매를 두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다. 작은 어머님은 벌족이요, 대갓집에서 자라난 분이라 폭이 넓고 큰 분이었다. 6 25 이후 내게도 큰 힘이 되어 주신 분이었다.

큰 가사에 6 남매의 자녀를 두신 작은 아버님은 새 부인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들어오신 숙모님은 나보다 4 살이나 젊었지만 살림도 잘하고 상냥하고 명랑하고 좋은 분이었다.

내가 열흘 동안 바느질 하는 동안 대구에서 포목상 하시는 재종고모님이 놀러오셨다. 내가 왜 둘째 번 꿈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고모님이 하신 말씀은 아직도 생생이 내 뇌리에 남아있다.

“자네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구만---”

참으로 그 재종고모님의 말씀이 맞았다고 지금 나는 내 노경에 더욱 그 꿈이 적중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엔 신부가 시집 갈 때 밥상보 몇 개는 준비해서 가야 했다. 그러나 아가씨는 그런 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다가 학교를 졸업하여 이제 그런 준비를 해야 할 때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동생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모는 젖만 먹여주는 자기 가정이 있는 아기 엄마였고 밤이면 보채는 아기를 안고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헤매야만 하는 생활을 살았었다. 그나마 좋은 사람이 새 엄마로 들어와서 집의 살림이 안정되고 아가씨는 작은 아버님의 용단으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내 힘이 자라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정신(精神)일도(一到) 하사(何事)불성(不成)이란 말처럼 아가씨를 위한 일구월심(日久月深)은 나로 하여금 그 열흘 동안을 한 번도 깜박 졸음도 오지 않게 했고 작은 아버님의 눈을 피하여 밤에만 호롱불 밑에서만 수놓은 밥상보를 완성하여 모든 다른 것들과 함께 다리미질 할 때 작은 아버님께서 보시고

“그런 것까지 다 하였느냐?” 하셨다가 다시

“그 꽃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하셨다.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우리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을 때 팽그르르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아가씨의 결혼식을 위한 준비에 내 정성을 다 쏟은 것이 기뻤다.

4. 죽음과의 대면

1952년 여름이었다. 나는 친정 뜰아랫방에서 슬픈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한여름에 두터운 솜이불이 내 앞에 개켜져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엎드려 헐떡이고 있었다. 나의 어께는 심한 호흡 곤란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심히 파도치고 있었다. “복잡(複雜)다기(多岐), 요(要)급(急), 심장(心臟)치료(治療)”라는 의사가 오빠에게 준 진단 메모가 말하듯 비수(匕首)로 가슴을 열어봤으면 하고 원할 만큼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 호흡 장애 속에서 이제는 마지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숨 가쁜 그 고통 속에서 번개처럼 스쳐가는 생각!

‘내 자녀가 고아가 된다!

남편을 잃은 후 살기보다 오히려 죽기를 바라며 어쩔 수 없이 살아온 내게 이 섬광처럼 번득인 생각은 꺼져가던 생명의 심지를 다시 돋우어 주는 동력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죽어선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우리 오빠는 늘 이런 말씀을 잘 하셨다. “너희 부부 같은 부부는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그런 남편을 잃었을 때 나는 죽기를 원하였다. 나는 죽고 싶다고 마음속에 소원하고 있었지만 실지로 죽음과 대면한 지금 내 마음은 ‘나는 살아야 한다! 내가 죽으면 내 자녀들이 고아가 된다! 하는 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부처님, 나를 살려 주세요.’

‘.......’

‘아버지! 어머니! 나를 살려 주세요!’

‘......’

‘여보! 나를 살려 주세요!’

‘......’

아무리 내가 타는 듯한 마음으로 부르짖었을지라도 부처님도 부모님도 남편도 그 아무도 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어머니는 매일 이른 아침에 자녀들을 위하여 부처님께 빌었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아주 사랑하셨지만 나의 생명을 구할 능력 없으신데 하물며 생사조차 알 길 없는 남편이 어찌 나를 도와 줄 수 있었으리요! 나는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 내 생명을 10 년만 연장 시켜 주세요!'

’5 년만 연장시켜 주세요.‘

10 년이 안 되면 5 년이라도 더 살아 아이들이 좀 더 큰 다음에 내 생명이 다하기를 원하였다. 그토록 삶을 포기하고 눈을 감고 싶었던 내가...이제 내가 그 당시의 나의 심경(心境)을 회고해 볼 때 나는 갑자기 닥친 환난 속에서 그것을 대처하기보다는 도피(逃避)하려는 본능적인 연약한 자의 넋두리애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완전히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저 남편을 잃은 슬픔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극도로 근시안이 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던 내가 죽음을 대면한 그 마당에 와서야 숨이 끊어질 듯 위급한 그 상황에서 비로소 양심이 각성(覺醒)되어 자녀를 위해 살아나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셨다. 비록 나는 10 년도 미안하여 최소 한도 5 년이라도 살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생소한 분으로 알고 있었던 나의 마음속의 부르짖음도 들으셔서 5 년, 10년 뿐이 아니라 만 25세였던 내가 지금 민 83세이니 그 연약하던 내게 장수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잘 몰랐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되는지도 잘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 속의 나의 소리 없는 절규(絶叫)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 나는 위기를 넘겼고 이튿날부터 차도가 있기 시작했다.

5. 우리를 덮친 쯔나미

1950년 6월 28일, 그날은 하늘이 맑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나는 온순이와 함께 우리 무들 논에 내보낼 점심을 짓느라고 한창 바빴다. 그때 갑자기 시동생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급한 음성으로 말하기를

“서울에 난리가 났어요! 인민군이 쳐들어 왔데요.” 하는 것이었다.

“뭐라고요? 서울에 난리가?...” 하는 소리와 함께 부엌 문 밖에 나선 순간, 나는 거기 있는 기둥을 붙듦으로 가까스로 쓰러지는 것을 면하였다.

그날 이후 나는 먹을 수가 없었고 잠잘 수가 없었다.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답답증 때문에 자다가도 샘에 나가 찬물을 내 몸에 끼얹어야만 가슴의 뜨거운 불을 좀 진정 시킬 수 있었다. 한의에게 진찰을 받으러 의대 학생이었던 동생과 함께 대구로 갈 때도 사람으로 가득 찬 버스 안에서 가슴에 차오르는 화(火) 때문에 차라리 버스에서 뛰어내리기를 원하였다. 경북 의대 부속병원에서는 심장병이라는 진단이 내렸으나 한의원은 홧병이라 했다.

‘남편이 차가운 밤이슬에 젖으며 어느 들판에서 한뎃잠을 자는지 모르는데 내가 어찌 방안에서 이불을 덥고 자랴!’ 싶어 밤이면 밤마다 나는 단잠 자고 있는 애기 옆에 낮에 입던 옷과 버선 그대로 옹크리고 밤을 보냈다. 바람 부는 밤,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도 사람 발자국 소리로 들려 문을 열고 내다보며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이의 밥그릇에 밥을 떠놓고...

마침내 병이 나서 친정에 가서 요양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악화되어 친정에 가서 요양하고 있을 때 (친정에선 기차역이 가까웠다.) 기차 들어오는 소리만 들리면 역으로 달려 나가 개찰구 옆에 서서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모든 사람이 다 나온 후에도 아직 서서 혹시 누군가 남은 사람이 없나 하고 지키고 섰다가 정녕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할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역으로 갈 때는 달려가도 돌아올 때는 힘없이 돌아오는, 매일 그 일을 되풀이하는 나를 보고 친정의 이웃 사람들은

“소장님댁 따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숙덕거렸다고 한다. 참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만큼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기차만 지나가면 ‘저기 그이가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6. 님을 찾아 헤매는 마음

한 기별이 친정으로부터 왔다. 외숙모님이 한 기별을 가지고 급히 오셨던 것이다. 외숙부님은 수리조합 이사이셨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외삼촌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제가 어제 영천 포로수용소를 방문했는데 그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닐 때 개울물 있는 데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포로들이 빨래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 한 포로가 저에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금호면 수리조합 이사님을 아십니까?”

“예.” 하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렇다면 제가 그분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고 싶은데 저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예,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하고 제가 쾌히 승낙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내일 이맘때 다시 와 주시면 제가 편지를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서로 약속을 한 후 그 사람은 외삼촌께 찾아와서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튿날 외숙모는 그 사람과 함께 포로수용소로 찾아가서 그 개울물이 흐르고 있는 철망 가까이 가서 기다렸다. 그러나 편지를 가지고 나오겠다고 약속한 그 포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외삼촌과 외숙모는 결론짓기를 그 포로는 틀림없이 생질일 것이라고... 그래서 두 분은 이 소식을 한시바삐 누님 댁에 알려야겠다고 외숙모님은 서둘러 기별을 전하러 오신 것이었다.

나의 동생은 6. 25 전에 경북의대에 입학하여 아직 의대 공부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전쟁이 났던 것이다. 하교에선 학장의 이름으로 학생들을 학교로 소집하였고 아무 훈련도 없이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北上)하던 아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한 땅 덕천 지구에서 2 개 사단이 전멸하는 중에 동생은 실종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죽었던 아들, 죽었던 동생이 살아 있다는 그 소식에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나, 이 세 사람은 부산 거제리 포로 수용소롤 향했다. 아버지는 편찮으셔서 집에 계셨다. 우리는 철도청에서 일하는 친지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포로수용소로 갔다. 그러나 한껏 기대에 부푼 우리는 명단을 살펴본 분에게서 동생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빠만 거제도로 건너가기로 하고 어머니와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나의 동생은 마산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외숙모가 그 소식을 가져 왔을 때는 동생은 마산 포로수용소에 있을 당시였으므로 그 편지를 보내려고 했던 포로가 누구였을까 하고 외숙모님과 함께 친정 모든 식구들이 머리를 굴린 결과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정서방이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급히 내게 전갈을 보내어 나를 친정으로 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천 포로수용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외숙모와 함께 외가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일찍 영천 포로수용소로 향했다. 그곳은 마치 복잡한 시장판처럼 붐비었다. 나는 그 복잡한 인파(人波) 사이를 뚫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찾아다녔다. 한낮이 되자 햇볕은 따갑게 내려쪼였다. 나는 포로수용소의 철망울타리 안을 자세히 살피며 그 포로수용소 둘레를 돌고 또 돌았다. 그러나 나는 남편과 비슷한 사람도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면접하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원했지만 나는 그런 행운을 누릴 수가 없었다. 나의 소원은 이루지 못한 꿈이 되고 말려나...?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아마 100 리도 더 걸었을 것이다. 내 다리는 아파오고 몸은 지치고 마음은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실컷 두들겨 맞은 병사처럼 되어...

집에 돌아와 보니 가축을 잘 사육(飼育)하면 아이들 학비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반지를 팔아 샀던 돼지새끼 세 마리와 알을 낳던 암탉들이 다 죽고 말았다. 나는 병이 나서 친정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몸채에서 앓아누워 계시고 나는 딴채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죽음의 경계선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하나님을 잘 몰랐으므로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 그렇게 부르짖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아무도 나를 살릴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아직 어린 내 자녀를 위해 내가 살아야 한다는 열망은 비록 사경에 있는 꺼져가던 의식 속에서도 심중의 절규(絶叫)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었던 것 같다. 그 순간 하나님은 나의 생명의 줄을 붙들어 주셨고 나는 죽음의 경계선(境界線)에서 헤어나서 생명의 빛을 앙망(仰望)하게 되었다.


2 장

1. 어디로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나는 나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원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아무데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새 건물을 짓고 교회가 들어섰는데 거기 한 번 가보지?“

그 사람이 가르쳐 준 교회로 가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1 주 일 동안을 고민하다가 다시 다음 주에 찾아가 보았으나 여전하였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부르짖었다.

“어디 가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어디 가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나는 계속 부르짖다가 나중에는 너무 답답하여 내 가슴을 치며 어린아이같이 뒹굴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교회를 찾지 못하고 시어머님이 계시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네가 건강할 때는 마땅히 너의 시부모님을 섬겨야 하고 네가 몸이 아플 때는 친정에 와서 쉬어도 된다.”고 말씀하신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었고 또 한 가지 아유는 그곳에는 나의 자녀들이 있었다.

몇 달이 지나간 후에 친정에 다니러 갔을 때 명신이가 말하기를

“언니, 여기 진리 교회가 왔어요.” 했다.

“진리 교회? 어디 있다가 이리로 왔는데?” 하고 내가 물었더니

명신이는

“서울에 있다가 제주도로 피난 갔다가 이리로 왔대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 하며 내가 관심을 보이자 명신이는

“언니, 오늘 저녁 예배드리는 날인데 가보실래요?” 하며 권하였다. 나는 그 놀라운 소식을 기뻐하였다. 그날 저녁때 나는 명신이를 따라 그 교회에 나갔다. 우리는 좀 일찍 갔으나 교인들은 우리를 겸손하고 친절하게 영접해 주었고 입구에서부터 무엇인가 다른 친숙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를 느꼈다.

예배드리는 장소에는 의자도 없고 그냥 마룻바닥에 앉아서 예배 드려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검정 학생복을 입은 소년이 설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실로 그것은 놀라운 기별이었다. 내 마음에 큰 감동을 준 그 기별로 인하여 나는 ‘참으로 여기 진리가 있구나!’ 하고 내 마음속으로 내 무릎을 탁 쳤다.

나는 결코 그날 밤의 그 감동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슬픔과 내 아픔을 그 아무도 위로할 이 없고, 이 세상에 아무도 위지할 이 없어 진심으로 하나님 발견하기를 그토록 원하여 온 밤을 아픈 고뇌 속에 내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었는데 마침내 나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에 나갈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나는 대종가의 종부는 아니었을지라도 사(四)대(代) 봉제사(奉祭祀)를 해야 하는 집안의 종부였다. 육십여(六十餘) 호(戶)의 일족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한 사람도 교회에 가는 사람이 없는 그 동네에서 교회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가(可)히 일대(一大)변혁(變革)을 일으키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었다.

예배일이 다가 왔을 때 나는 너무나 가고 싶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평안 속에 쉬고 싶었다. 필사적(必死的)인 용기로 나는 시어머님께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하나님 앞에 나가겠다고 온전히 준비하고 어머님의 허락을 받으려고 했던 나는 오직 한 생각에 몰입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놀란 어머님은 작은 아버님이 사시던 집을 사서 이사 오신 유 선생 댁에 연락하여 경북여고를 나와 유식하신 유 선생 사모님이 오셔서 물을 끓이고 꿀을 타서 입에 떠 넣는 둥 난리가 벌어져 어머님께서 나중에

“시어미 길 들이려고 그러지.“ 하셨다. 나는 교회에 가는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나는 결혼으로 말미암아 정씨 가문의 종부로서 묶여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고조부님께서 지으신 집이었다. 가풍(家風)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이 집에서 교회에 출석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일이었다.

1954 년 봄, 아들은 4 학년, 딸은 1 학년이 되었다. 6. 25가 나던 해 아빠가 사다 주었던 아들의 옷은 3 년을 입혔더니 못 입게 되었고 여름이 다가오니 두 아이가 다 여름옷이 한 벌도 없어 꼭 해 입혀야 되게 되었다. 그런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리고 또 외할머님이 초봄에 다니러 오셨는데 그때는 날씨가 살살하여 겨울옷을 입고 오셨는데 이제는 여름철이라 여름옷을 입고 가셔야 되겠으니 여름옷을 해드려야 되겠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것은 외손부로서 마땅한 도리라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을 살 돈이 없었다. 나는 친정에 가서 올케언니에게 의논하였다. 나로선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언니가 말하기를“우리 사촌언니가 천 장사를 하고 있으니 우선 외상으로 끊어서 해요.”

워낙 급한 상황이라 나도 다른 선택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아들과 딸의 여름옷을 각각 두 벌씩, 외할머님 옷은 겉옷 한 벌과 속치마, 속바지까지 일습을 해 드렸다. 모든 것을 다 하고 보니 참 기뻤다. 부지런히 만들어서 아이들은 학교에 새 옷을 입고 등교하고 외할머님께서도 외손부의 선물을 기쁘게 입으시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빚을 어떻게 갚느냐는 문제가 내게 남아 있었다. 나는 돈을 벌기를 열망하였다. 아직 미혼인 두 재종고모들이 대구에 가서 직조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공장에 찾아가서 취직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이 넘쳐 나던 시절이라 처녀들 아니면 직조 공장에 취직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두 재종고모는 그들의 이모 집의 방 한 칸을 빌려 자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모가 장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일이 너무 바빠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여 구하고 있다고 하여 종고모들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서 같이 그 집에 갔다. 밤새도록 그녀가 바느질하는 것을 도왔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관이라 했다.

아침에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세숫대야에 내 눈물이 비 오듯이 덜어졌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워 간신히 오열(嗚咽)을 참으며 ‘내가 왜 남의 집에 와서 이러고 있지?’ 하고 한없이 서글퍼졌다.

나는 그 날로 버스를 타고 친정으로 갔다. 올케언니 방에 드러누워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힘과 내 지혜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한참 후에 눈을 떠보니 어머니와 올케언니가 각각 바느질거리를 한 보따리씩 가지고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도 은퇴하신 후 편찮으시고 오빠도 사업이 어렵게 돌아가고 있는 친정 형편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니 마음 다하여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바느질 맡길 사람들에게서 일감을 얻어다 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 두 보따리의 바느질감을 가지고 우리 집에 돌아가서 열심히 일했다. 그리하여 빚졌던 외상값을 다 갚았다.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

나는 주야로 그 일을 생각하였다.

그럴 즈음 부산에서 살고 계시는 어머니의 친구가 어머니를 방문하셨다. 나는 십여 년 동안 그분을 못 뵈었는데 다시 뵙게 되어서 무척 기뻤다. 그분의 부군(夫君)께서는 우리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갑작스런 병환으로 돌아가셔서 스물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홀로 되셨으나 두 자녀를 잘 키우신 훌륭한 어머님이셨다. 그분의 따님은 초등학교 고등학교 다 나의 4 년 후배이었다.

나를 만나시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네가 왜 시골에서 이렇게 허송세월(虛送歲月)하고 있니?”

“부산으로 와.” “네가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냐?”“너희선배 언니 남편도 도장학사로 있지 않으냐.” 부산으로 꼭 내려오너라.“ 하시며 간곡히 말씀하셨다. 친정이 양산이라 양산댁이라고 어머니가 부르시던 어머니와 가장 친하시던 어머니 친구는 제과점을 하시며 자녀들을 키우셨다. 담대하고 폭(輻)이 넓은 분이었다.

2. 일자리를 찾아서 집을 떠남

나는 어머니 친구의 권면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시어머님께 나의 결정에 대해 말씀 드렸다. 어머님께서는 내 형편을 이해하시고 부산에 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나는 시동생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나는 새벽 3 시까지 사정하였다. 결국 시어머님께서 그에게 “네 형수가 떠나게 두어라.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돈을 벌기를 원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그날 아침에 시어머님과 사랑스런 내 자녀들에게 하직하고 친정으로 가서 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드리니 아버지께서

“지금 네가 네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객지에 간단 말이 웬 말이냐” 하셨다.

아버지의 목이 메인 그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남부민동에 사는 어머니의 조카인 나의 외사촌의 집에 여장(旅裝)을 풀었다.

외사촌 집에 도착한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 직장도 구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린 자녀들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은 한시가 급했다.

‘얼마나 오래 이렇게 직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하나?’

내 걱정하는 것을 보다 못한 외사촌은 길가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을 붙들 생각은 않고 사람의 얼굴을 피하여 책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 고장에서 공부했고 고등학교를 여기서 졸업하였다. 동기, 선배, 후배, 언제 아는 얼굴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수줍음을 유달리 타는 내가 어떻게 물건을 사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내 얼굴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닥불을 들어붓는 것 같이 창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태로 며칠이 또 지나갔다.

그날도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 나의 친구 예순이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한 후 아직 삼랑진에 살고 있을 때의 친구였다. 예순이와는 오래 사귄 친구는 아니었지만 서로 마음이 맞고 이기심이 없는 예순이의 성품이 오랜 친구 사이보다 더욱 깊은 우정으로 맺어지게 한 친구였다. 그녀의 오빠가 우리 아버지하고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바로 옆집이 예순이 집이었고 두 집 사이엔 울타리도 대문도 없었던 관계로 무시로 들락거릴 수 있는 친한 사이로 살았었다. 그녀의 집에는 오빠와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과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예순이는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다. 예순이 어머니는 나를 좋아해서 "동생들한테 저렇게 마음이 너그러우니 내가 중매해야지." 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예순이 어머니 말씀대로 예순이 오빠가 친구를 중매하였다. 우리 아버지의 철두철미(徹頭徹尾)한 봉건사상(封建思想) 때문에 그 혼사는 성립되지는 않았지만---

예순이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예순이 오빠는 시청에서 계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거기 사무원이 한 사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예순이는 나를 미장원으로 데리고 갔다. 전쟁이후 한 번도 끊어본 적이 없는 숱이 많은 내 머리채는 길고 검고 윤이 나 붉은 댕기를 드리고 쪽진 머리와 옥색 모시치마를 입고 걸어가면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져 바라보는 형편이었다. 6. 25 이후 내가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려고 그 모습으로 이 부산 땅에 나타났을 때 나의 친구들은 무슨 큰 이변(異變)이나 난 것처럼 야단이 났었다. 아무튼 나는 전쟁 후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나의 머리채에 남편의 생명을 걸고 기원하는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전쟁 후에 내 머리채가 길어졌을 때 시어머님께서 쪽을 쪄 주셨을 때 감개무량(感慨無量)하던 그 심정이 어제인 듯 한데 아침마다 긴 머리채를 빗을 때마다 더욱 깊어지던 남편에게 향한 사모의 정과 그의 명을 빌던 마음, 나의 숱 많고 긴 그 머리채가 잘려 나갔을 때 나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거울속의 내 얼굴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이조(李朝)시대의 옛 사람이 갑자기 20 세기의 현대 여성으로 바뀐 것이었다.

3. 직장인이 된 나의 양심

나는 인터뷰에 패스하여 시청 직원으로서의 일이 시작되었다. 첫 출근을 한 날, 시청 식당에서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다.

"성함을 적어놓으시고 매일 점심을 드시면 됩니다.“ 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공짜 점심의 출처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먹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하였다.

나는 외사촌 집에 한 달 총계 대두(大斗) 두 말의 곡식 밖에 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해서 점심도 싸올 수 없었다. 남부민동에 있는 사촌 집에서 영도다리 근처에 있는 시청까지는 40 분이 걸렸다. 아침에는 걸어올만 하지만 퇴근하여 돌아가는 길은 힘들었다. 점심을 굶은 배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걸었는데 바닷바람이 힘차게 불 때는 더욱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항상 ‘내가 왜 자녀들을 두고 여기 와 있는가? 자녀들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나 자신을 위해 한 푼이라도 쓰지 말고 저축하여 속히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 일념(一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더욱 보고 싶었다. 눈물어린 내 눈 앞에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나는 허기지고 완전히 지쳐서 간신히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에 황혼의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어둠이 깔려오면 항구 도시의 무수한 네온사인의 밝은 불빛이 바다로 쏟아져 내려와 반사되는 광경은 마치 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이 쏟아져 내려와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아름다운 그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며 걸어갔다.

영도에 사는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녀도 6. 25때 남편을 잃었다. 아무 죄 없는 순진한 사람이었던 그 남편은 어느 날 어떤 사람의 무고로 불려나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나는 가끔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 그 친구는 시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생활은 유족(裕足)하였다. 그런데 한날 친구의 집에 갔더니 유성기를 틀어놓고 자기 집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외사촌 시동생과 양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보고도 양춤을 배우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배우고 싶지 않았다.

예순이 오빠가 상공계장으로 그 자리가 바뀌자 구청에 있던 분이 용도계장으로 부임해 왔다. 다른 직원들은 한 사람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장부 기재에 대하여 내게 어떤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정직성에 상치(相馳)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 후로 용도계장 이하 전 직원이 나를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튿 날 용도계 주무가 나를 만나기를 원했다. 그는 매우 미안하다는 어조로

“용도계 형편상 박 선생님이--”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출납 창구에 앉아있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아무도 그녀를 소홀이 할 수 없을 만큼 실력자인 박 양에게(그녀와 나는 청내(聽內)에서 가장 친한 사이였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아래여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직하고 근면하고 민첩하고 능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여기를 그만 두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외가로 돌아왔다. 내가 벌은 돈으로 딸의 옷감을 몇 벌이나 끊었다. 색동저고리 감과 홍색 치마 감, 자주빛 쟘바스커트 감과 또 다른 옷감, 아들을 위한 선물, 시어머님께, 시동생에게, 각각 선물을 샀다. 그날 시장에서 외가로 돌아온 후 나는 포목상 주인 아주머니가 돈 계산을 잘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이튿날 집에 갈려고 마음이 바쁜 중에도 그 포목상을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더 준 돈을 돌려주었다. 세상에 이런 분은 처음 본다며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주위의 포목상 아주머니들까지 그분의 선전에 내게 인사를 하니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인데 그것이 이색적(異色的)인 일로 보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서 아이들 옷도 해 입히고 며칠 쉬고 있는데 외사촌에게서 전보가 왔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고 속히 내려오라는 전보였다. 내려와 보니 시청에서 박 양이 찾는다는 것이었다. 시청에 가서 박 양을 만났다.

회계과장님이 “박 선생이 어찌해서 요새 안 보이시는지?” 하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 양이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얘기했더니 과장님이 대노(大怒)하시고

“어떻게 과장에게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의논도 없이 직원을 해고(解雇)하느냐?” 하시면서

“당장 연락을 해서 박 선생을 다시 나오도록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박 양은 나에게“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회계과장님한테 가서 인사를 드리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아니,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조용히 물러가고 싶어요.” 했다. 그러나 박 양은“그러지 마세요. 정말 나를 보아서라도 꼭 과장님을 만나세요. 그것이 과장님의 친절에 보답하는 길이고 또 사람의 도리예요.” 하였다.

나는 그 용도계 사람들이 있는 장소를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과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나를 볼 때 불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장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는 50이 넘어 보이는 인자한 과장님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과장실로 들어갔다.

과장님은 나를 반가이 맞이해 주셨다. 그리고 나를 위로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 일하십시오.” 하셨다.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다.

“그들은 다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과장님이 말씀하셨을 때 나는 그럴수록 그들을 쫓아내는 것 같은 입장에 나를 두기가 싫었다. 과장님은 나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그러면 관재계에서 일하십시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당장에 관재계장을 부르시더니 나를 소개하셨다. 관재계장과의 인사가 끝난 후 관재계장의 안내를 따라 관재계의 한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관재계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언제나 부지런히 일했다. 그날에 맡겨진 일을 다 정리하고 나면 시간이 남아 계장님께“더 할 일이 없는지요?” 하고 물으면“ 천천히 하십시오. 너무 그렇게 급히 하시면 피곤합니다.” 하였다.

관재계장은 참 좋은 분이었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시민관(市民館)에서 하는 시사회(試寫會)에 가보라고 표를 주시곤 했다. 그래서 한 두어 번 박 양과 함께 시민관에 가보았다. 그런데 한 영화는 ‘신드밧드의 모험“이라는 것이었고 또 헌 영화는 ”안나 카레니나“였다. 나는 ”안나 카레니나“를 본 날 밤, 길을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나 같은 외로운 사람은 영화를 보아선 안 된다.‘ 라고---유혹에 들기 알맞은 상태에 나 자신을 두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에 한 상공계 직원이 꽤 헨섬으로 생긴 사람이었는데 “미스 박, 미스 박,“ 하면서 점심 식사를 사준다고 초대한 것을 내가 사양했었는데 다시 상공계 용무로 나를 찾아와서 서류를 조사하는 곳에서 또 다시 ”미스 박,“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내가 말하기를“저는 미스가 아닙니다.” 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왜 제가 거짓말을 해요. 저는 지금 서른한 살이요, 열한 살 난 아들이 있고 일곱 살 된 딸이 있습니다.”

“그럼 부군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미국에 유학 가셨어요. 그 동안 제가 심심해서 직장에 나오지요.”

나는 이렇게 자기 방어를 위해 하지 않던 거짓말을 했다.

그런 후 점심 초대 얘기도 없어졌고 “미스 박” 소리도 “박 선생”이란 대명사로 바뀌었다.

차 마시러 가자는 것도 다 사양하고 언제나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내 생활이었다. 그러나 시사회 날 밤 내 마음에 느낀 것은 깊은 고독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는 시사회 표를 얻어도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지 않기로 하였고 그곳을 떠나기까지 그렇게 생활하였다.

4. 나를 위하여 살고 있지 않은 나의 목숨

경상남도 학무과장으로 계시는 분은 나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의 삼촌이요 또 한 친구의 형부였다. 나의 친우였던 그 친구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언니는 나를 친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의논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그 언니를 찾아가곤 했다. 그 언니의 현명한 조언(助言)이 내겐 참으로 필요했다. 그 언니는 참으로 존경 받을만한 여성의 귀감(龜鑑)이었다. 남편에게는 현명한 내조자요, 자녀들에게는 좋은 어머니요, 지혜롭게 집을 잘 돌보고 덕성(德性)이 구비(具備)한 현숙한 여인이었다. 집안은 언제나 청결하게 반짝이고 온실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고 큰 어항(魚缸)에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놀고 있고 마당에 있는 닭장에는 닭들이 놀고 있었다. 그 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았고 손님 대접을 잘 하는 분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 언니를 칭찬하였다.

그 남편 되는 과장님은 나의 모교의 교장을 지난 후에 학무과장이 되셨는데 나의 친구의 삼촌이었기 때문에 대학생 시절에 우리를 위해 사진도 찍어주고 하신 잘 아는 분이지만 참으로 학자풍의 인격자로 도야(陶冶)된 것은 부인의 내조 또한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 언니를 방문했을 때 언니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재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네 친구 선이는 재혼했는데 편안한 생활을 살고 있다.”

“너무 고생하지 말고 재혼하는 것이 어떻겠니? 좋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언니의 말에 이렇게 내 심중(心中)을 토로(吐露)했다.

“언니, 제가 만일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면 저도 재혼하겠어요. 그러나 저는 남편 잃은 후 죽기를 원했고 저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여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것은 제 자녀들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나의 임무라도 생각하기 때문에---”

언니는 말하였다. “네 말이 옳다. 만약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내가 다시는 네게 재혼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 후 언니는 결코 재혼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 대신 나를 도와주도록 남편에게 이야기하였다. 나의 친한 친구들의 삼촌이요 형부이며 우리가 어릴 때부터 우리를 귀여워해주시던 학무과장님은 경북 도 학무과장에게 부탁하여 나의 교사 자격증을 경북도 학무과에 보내게 되었다.

나는 관재계의 편안한 자리에서 좋은 계장님과 과장님을 모시고 그분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하직인사를 고해야 될 날이 왔다. 계장님은 내가 떠나게 될 것을 미리 말씀 드렸을 때 매우 섭섭해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 집이 큰 집이고 정원도 넓은데 자녀분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아랫채에서 사시면 어떻겠어요?”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부산같이 큰 항구도시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이 두려웠다. 내가 직장에 나와 있는 동안에 아이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시간을 보낼지 생각하면 걱정이 되었다.

박양은 나와의 작별을 가장 서운해 했다. 나의 외사촌 가족도 서운해 했지만 나의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을 축하해 주었다.

5. 교사로 부임

도시에서의 생활이 갑자기 시골 생활로 바뀌었다. 남천 초등학교는 경산에서 약 15 리쯤의 거리이다. 나는 그 초등학교의 3 학년 1 반 교사로 부임했다.

학교 근처에 있는 노인 부부와 아직도 총각인 아들과 세 식구가 사는 조촐한 집의 아래채에 방 한 칸을 얻어 세 들어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전임 처녀 여선생이 자취하던 방이라 했다. 집 주인인 노부부와 아들은 다 마음이 후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학교도 가까웠으므로 참 편리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쳤다. 페스타로치처럼 좋은 교사가 되리라고 결심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일기를 쓰도록 지도하였다. 그 일기들을 검사하여 잘못 된 데는 고쳐 주면서 문장력을 계발하고자 하였다.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어린이들과 산수를 잘 풀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특별지도를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읽기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국어 시간에는 따라 읽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래서 글자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글자를 눈에 익게 하고 책을 읽는 것이 어린이들의 기쁨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공부 시간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어린이가 있었다.

“선생님, 상태가 나를 찼어요.”

“선생님, 상태 보세요. 내 머리를 쳤어요.”

“선생님, 상태가 내 공책을---“

“내 지우개를---”

“내 연필을---”등등

상태에 대한 원성(怨聲)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 시간에 또

“선생님, 상태가---”하는 말이 들려왔다.

하루 이틀이 아닌 여러 날의 잇달아 일어나는 호소를 이제는 묵살(黙殺)할 수가 없게 되었다. 상태는 공부 시간만 되면 주위의 아이들을 못 살게 굴었다. 이미 전의 담임선생님들이 다 두 손 든 아이였다.

어린이들의 구원을 요청하는 여러 날의 부르짖음을 무시할 수 없어 나는 오늘은 무슨 조처(措處)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는 말로만

“상태야, 공부 시간엔 조용히 해야 해.” 라든가 “상태야, 선생님을 쳐다봐요.‘ 정도로 그쳤지만---나는

“상태야 , 앞으로 나오너라.“ 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앞에 세워 두었다. 공부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땡땡땡 울리자 나는 수업을 끝냈다. 어린이들은 일제히 다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교실 안에는 상태와 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상태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내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연민(憐愍)의 정이 가득하였다. 내 마음은 눈물로 가득하였다. 아무에게도 사랑을 못 받는 듯한 이 어린이가 측은하여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지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까 상태는 잡힌 손을 뽑아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조용히 부드럽게 내 마음에 눈물겹도록 가득한 사랑을 그 네 마디 말에 담으면서

“상태야, 선생님은 너를 사랑한다.” 고 말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 듯 상태의 몸부림이 그쳤다. 붉어졌던 얼굴도 차차 본 얼굴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서생님은 상태가 노력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오늘 읽기 숙제를 집에 가서 해 오너라. 스무 번 읽어오라고 했는데 스무 번 읽어오너라.” 고 말하였다.

상태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그가 잘 들었다고 믿었다.

이튿날 국어 시간이었다.

“어제 국어 숙제, 읽기를 잘 해온 사람들 가운데 읽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했을 때 상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얼마나 기쁜지

“장 상태 읽어 보세요.”

손을 번쩍 번쩍 들고 “선생님, 나요! 나요! ” 하는 모든 어린이를 제쳐놓고 나는 상태를 지적하였다. 상태는 기쁜 얼굴로 일어서서 읽기 시작하였다. 좀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숙제를 해온 적이 없는 그가, 도대체 공부에 취미가 전혀 없어 공부시간엔 장난만 일삼던 그가 한 번도 발표해 보려고 조차 않았던 그가, 손을 들고 읽었다는 것은 대(大) 성공이었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상태가 참 잘 읽었지요? 우리 다 같이 박수칩시다.”

하였더니 어린이들도 다 기뻐하며 상태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날 후로 “선생님, 상태 보세요!” 하는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담임한 3 학년 1 반 똑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여자 어린이가 있었다. 이 두 어린이는 같은 마을에 사는 친척이었다. 그러나 이 두 어린이는 도무지 맞지 않았다. 생김새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키도 크고 등치도 컸다. 또 하나는 키가 작고 몸피도 가냘픈 편이었다. 그래서 두 어린이는 “큰 진숙이” 작은 진숙이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어린이는 성격적으로 도무지 맞지 않았다. 공부시간에도 툭하면 싸우는 것이었다. 언제나 작은 진숙이가 큰 진숙이를 일러바쳤다.

“선생님, 큰 진숙이가 끔 씹고 있어요.”

“선생님, 큰 진숙이가 공치기 하고 있어요.” 등등

그러면 큰 진숙이가 골이 잔뜩 나서 그 힘센(?) 주먹으로 작은 진숙이 머리에다 꿀밤을 한 대 주어버린다. 그러면 작은 진숙이가 또

“선생님, 큰 진숙이가 내 머리에다 꿀밤을 줬어요.”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어린이들의 주의가 온통 그리로 돌아가곤 해서 어린이들의 주의력이 산만하게 될 때가 여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는 날 결단(決斷)을 내려 두 어린이를 변소 청소를 시켰다. 그랬더니 두 어린이가 다 울상이 되어서

“변소 청소 못 하겠어요. 어떻게 해요?”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럴 만 것이 2 학년 때까지 이 어린이들은 교실 청소도 한 적이 없었다 한다. 6 학년 언니들이 해 주었고 청소는 이제 3 학년에 올라와서 배우는 터에 변소는 더더군다나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나는 시범으로 내가 도와주기로 작정하고 앞치마를 입고 마스크를 하고 수건을 쓰고 변소로 가보았다. 과연 어린이들이 울상이 될 만도 하였다. 요새처럼 수세식 변소가 아니니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다가 뒤편에는 커다란 똥 무더기까지 쌓여 있고 벽에는 거미줄이 얼기설기 먼지와 합창(合瘡)이 되어 붙어 있었다. 나도 도망치고 싶은 상황(狀況)이었다. 나는 벽의 거미줄과 먼지를 쓸어내리고 바닥을 물로 깨끗이 씻었다. 두 진숙이에게 물을 길어오라고 하니 두 어린이는 선생님이 자기들을 도우는 것이 너무 기뻐서 어느 듯 아까의 울상은 다 가시고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물통에 물을 기쁘게 둘이서 같이 길어 날랐다. 두 어린이는 도르래로 길어 올리는 두레박물을 같이 길어 올리고, 같이 물통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둘이 협력하여 일하는 재미를 익히고 어느 듯 다정한 친구가 되어버렸다.

청소가 다 끝나고 종례(終禮) 시간에 내가 모든 어린이들에게

“우리 교실과 복도와 변소를 다 아름답게 꾸미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교실도 복도(複道)도 변소도 깨끗하게 청소했는데 여기다 꽃을 꽂아놓으면 더 좋겠지요? 누구든지 집에 꽃병 만들 수 있는 큰 대나무가 있는 사람 있으면---” 하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러 어린이가 손을 들고“선생님!” “선생님!” 하였다. 그 중에서도 큰 진숙이가 가장 열심히 자기가 해오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진숙이가 굵은 대나무를 꽃병으로 쓰기 좋게 잘라서 한 일 여덟 개 가지고 왔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고 했다. 작은 진숙이랑 다른 아이들은 들꽃을 꺾어 왔다. 나는 교실에 두 개 복도에 두 개 변소에 한 개 아름다운 들꽃이 꽃인 꽃병을 걸어두었다. 아이들은 기뻐서 참으로 좋아하였다. 전교생의 조회(朝會) 시간에 교감선생님이, “3학년 1학급의 교실과 변소는 학교 전체에서 제일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말씀으로 칭찬을 하셨을 때 어린이들의 기쁨은 컸다.

언제나 숙제를 못해오는 한 어린이가 있었다. 참 착한 아이인데도……. 내가 불러서 물어보니 공책과 연필을 살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린이에게 공책과 연필을 사주고 매일 두어 시간씩 남아 있게 하여 밀린 공부를 하도록 하였다.

5월의 어느 날, 보슬보슬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 날은 대청소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청소가 다 끝나고 어린이들이 다 돌아간 교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종례시간에 내가 한 말을 되새겼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회개하면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얘기하였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들은 프랑스의 어떤 소년의 얘기를 하였다.

그 소년은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 자라났다. 도벽이 있었으나 그 도벽을 고치지 못하였다. 어떤 날 그 소년이 다시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할머니는 난로 불에 화저(火箸)를 벌겋게 달구었다.

“남의 것을 훔치는 손은 화저(火箸)로 지져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어린 소년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침내 할머니가 그 벌겋게 달구어진 화저를 꺼내셨다. 할머니는 그 화저(火箸)를 자기의 손바닥에 놓았다.

“이 할미가 너를 잘못 길러서…….”

살 익는 냄새와 함께 소년은 할머니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할머니, 다시는 안 그렇게 하겠어요.”

그리고 그 이후 소년의 도벽은 영영 없어졌다. 할머니의 사랑은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또 한 얘기를 해주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에 대한 얘기였다. 아버지가 애지중지 하시던 관상(觀賞)용 나무를 잘랐던 얘기……. 아버지가 노발다발하시며 범인을 찾았을 때 워싱턴은 정직하게 자기가 그랬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의 정직함을 기뻐하셔서 용서하셨다는 그 유명한 얘기를 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지만 뉘우치고 정직하게 고백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워싱턴 대통령도 정직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오늘 아침 아이들은 300원씩 학비를 내야 하였다. 아이들이 가져온 돈을 한 사람씩 받고 돈을 헤어보고 기록을 하고 틀림없이 했는데 총계를 맞춰보니 300원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래서 “얘들아 지금 너희들이 낸 돈에서 300원이 모자라니 어디 발견하면 선생님에게 갖다 다오.” 하였다. 그런데 청소하는 중에 한 어린이가 돈 300원을 내게 가져왔다. 청소하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비는 보슬보슬 이슬비로 내리는데 창밖을 내다보고 혼자 앉아 있으니 문을 살며시 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돈을 주웠다고 갖다 주던 순남이였다. 나는 의외의 어린이인지라 내심(內心) 놀랐다. 왜냐하면 순남이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하면서 순남이가 울먹이면서 하던 얘기가 이러하였다.

아빠, 엄마한테 내일 아침에 학교에 300원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돈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침에 엄마가 부엌에서, “여보, 오늘 씨앗을 사야 되는데” 하니까 아빠가 “오, 그래?” 하더니 조끼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어머니한테 주시더란다. 그래서 아빠가 세수하러 나가신 사이에 아까 아빠가 돈을 꺼내시던 조끼 주머니를 살펴보니까 돈이 들어 있기에 그중에서 백 원짜리 3장을 꺼냈다. 그리고 학교에 와서 선생님한테 바쳤다. 그러나 바치고 나자 “아빠가 300원 없어진 것을 아시면…”하고 번개같이 그 생각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적고 있는 사이에 도로 300원을 집어서 제 자리로 돌아갔는데 선생님이 총계를 세어보시고 300원이 모자란다고 하시며 발견한 사람은 갖다 달라 하시니 더 견딜 수가 없어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나는 순남이를 데리고 나의 자취하는 방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지우산을 같이 받고 순남이네 집으로 걸어갔다. 좀 떨어져 있는 거리였으나 이야기하면서 걸어갔다. 아직 어린 순남이가 어제 저녁부터 혼자서 고민해온 일을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순남이네 집은 언덕진 곳에 있었다. 조그만 초가집이었다. 순남이 어머니는 아주 젊었다. 순남이는 맏딸이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둘 있었다. 그 어머니와 앉아서 얘기를 해보니 참 딱한 사정이었다.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나왔는데 별 신통한 직업도 구할 수 없어 남편의 날품팔이로 살아가는데 그래서 아이에게 제 때에 학비도 잘 못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앞으로 형편이 어려우실 때는 미리 제게 연락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순남이는 좋은 아이입니다.”

그 후로 순남이는 참으로 충성된 생활을 했다. 충심으로 모든 일에 자원하여 공부에나 학급 일에나 최선을 다하였다. 나는 좋은 제자를 얻었던 것이다.

순기는 반에서 키도 크고 덩치도 믿음직하고 숙성한 신체와 정비례해서 생각도 깊었다. 공부도 잘하였고 통솔력도 있었다. 그래서 급장이 되었다. 좋은 학급을 만들어 보고자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순기의 부모님은 다 대구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고 순기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가서 나무도 해 와야 하고 집안 일도 보살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고 1학기 말 성적을 내어보니 단연 첫째였다. 그러나 작년에 이 아이들이 2학년 때 담임이셨던 3학년 2반 선생님은 내게 충고를 해주었다.

“호준이나 명수나 찬우, 이 셋 중에 한 아이에게 1등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성적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하기를 원했다. 호준이의 아버지는 사친회 이사장이었고 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도 많이 받은 분이었다. 명수의 아버지는 부면장이었다. 찬우의 아버지도 잘 사는 분이었다. 아이들도 다 좋은 아이들이었고 공부도 잘했다. 그러나 그 세 어린이보다 옛날에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지금 현재는 순기가 더 잘하고 있으니 나는 정직하게 그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양심의 소리를 따랐다.

어느 날의 체육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다 체육 시간이라고 기뻐서 운동장에 나왔을 때 호준이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녀는 명문 여고를 나온 분이었고 교양이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늦게 얻은 아들 호준이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리고 호준이도 누가 보든지 귀여움을 받을 만큼 잘 생긴데다가 성품도 온후했다. 모든 행동을 자기 집에서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귀엽고 자연스러웠지만 아이들은 공부시간에도 선생님한테 말하기 위해 맨 앞줄까지 나오는 그의 행동이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하게도 할 것이었다.

호준이 어머니는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상태와 현구가 우리 호준이를 둘이서 때렸으니 선생님이 벌을 주십시오.”

나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녀는 좀 떨어진 곳에 앉아서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 아이들을 정렬시켰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선생님을 잘 보세요. 선생님이 오른손을 들었습니다.” 하면서 공중을 쳤다.

“소리가 났습니까?”

“아니오,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여러분 이번에는 왼손을 들었습니다.“ 하면서 또 다세 세게 공종을 쳤다.

“여러분,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아니오,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이번에는 두 손을 들었습니다.” 하고 두 손을 마주쳤다.

“소리가 났습니까?”

“예, 소리가 났습니다. 손뼉 소리가 났습니다.”

“싸움은 어떤 것입니까? 한 편 사람이 자꾸만 싸우려 할 때 다른 사람이 같이 싸우려 하지 않으면 싸움이 되겠습니까?”

“아니오, 싸움이 안 됩니다.”

“그러면 싸움은…….”

“양편이 다 싸우고 싶어서 싸웠습니다.”

“그러면 여기 호준이하고 상태, 현구가 싸웠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과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됩니다.”

“여러분의 판단이 맞았어요. 그러면 누가 먼저 사과를 할까?”

“1대 2로 싸웠으니까---“

“상태와 현구 쪽이 먼저요.”

친구들의 말대로 서로 손을 잡으며

“잘못 했다.”

“잘못 했다.”하고 서로 사과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그들을 위해 박수를 보냈고, 호준이 어머니도 그것으로 만족하셨는지 집으로 돌아가셨다.

6. 페스타롯지 같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내가 남천 초등학교에서 맡게 된 반은 3 학년 1 반, 즉 적령 아동 반이었고 2 반은 연령 초과 반이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어린이들이 읽기 실력이 부족했고 먼 거리를 걸어와야 하는 가난한 농가의 자녀들이 많아서 어떤 어린이들은 연필 하나, 지우게 하나도 사기가 곤란한 집 형편이었다. 읽기와 쓰기를 잘 못하고 더하기 빼기도 잘 못하는 어린이들을 남겨서 한 시간 쯤 더 지도하다 보니 어린이들 가정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손등이 터서 피가 날 정도가 된 어린이들, 연필과 지우개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연필과 지우개를 사주고 손이 튼 어린이들의 손을 따뜻한 물에 담가서 푹 불은 후에 씻어서 바셀린을 발라 주고 공부에 관심을 가지도록 어린이들의 마음을 격려하여 주었다.

어린이들이 처음에는 거의가 다 일기를 쓸 줄 모른다 하였으나 자꾸만 쓰도록 격려하며 일기 쓰기를 지도하였더니 취미가 붙는 어린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어린이들이 자기 학급을 사랑하고 서로의 유대 관계가 친밀하게 되고 깨끗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리 교실 바닥의 때를 지운 후에 노르스름한 치자색으로 반들거리게 치자와 들기름으로 단장을 했다. 어린이들은 열심히 일했다.

칠판 밖에 아무 것도 없던 우리 반 벽에, 칠판 오른 편에는 우리나라 지도를, 왼편에는 “학급의 노래”를 붙였다. 곡은 음악책에 있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곡을 그대로 옮겼고 가사는 내가 새로 지은 것이었는데 3 학년 1 반 어린이들은 그 학급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열심히 공부했다. 학급의 노래를 매일 불렀다.

좌우편 벽에는 음악, 산수, 기타 과목의 꼭 암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붙였다. 그리고 뒷벽에는 어린이들의 작품을 붙였다. 기상 관찰 기록과 3 학년 1 반 어린이들이 가꾸는 화단의 나무나 꽃들이 자라는 것도 기록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교실과 복도의 기둥마다 표어들을 붓글씨로 써서 붙였다.

우리 반 어린이들 거의가 다 띄어 쓰지 않고 그냥 범벅으로 쓰고 있었으며 읽기도 어디서 쉬어야 하는지, 마침표에도 쉼표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형편이었다. 읽기와 쓰기가 기본이므로 힘써 지도하였더니 어린이들의 쓰기(띄어쓰기, 바르게 쓰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읽기는 국어 시간마다 큰 소리로 낭독하며 따라 읽기를 열 번 이상 시켰으므로 읽기도 현저하게 달라졌다.

우리 반에서 거의 매일 의견 충돌이 생겨 다투던 두 어린이 큰 진숙이와 작은 진숙이가 평화롭게 되고 가장 말썽꾸러기로 지목되어 있던 상태도 열심히 공부하며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며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려야지 하고 결심한 듯 보였다.

이제는 교실과 복도에 꽃이 꽂혀 있었고 화장실에도 꽃이 꽂혀 있었다. 조회 시간에 교감선생님이 운동장의 단상에 올라가셔서 전교에서 제일 깨끗한 화장실이 3 학년 1 반 화장실이라고 발표하셨다. 그래서 우리 반 어린이들은 무척 기뻐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내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 부었다. 나는 Pestalozzi 같은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매일 일기를 쓰도록 말하였다. 그리고 그 일기를 어떻게 쓰는지를 지도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글짓기가 향상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읽기와 산수를 못하는 학생들은 방과 후에 특별 지도를 하였다. 국어 시간에는 큰 소리로 따라 읽기를 여러 번 하여 읽기가 향상 되도록 하였다.

방학이었는데 일직이어서 집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이제 막 초등학교 5 학년이 된 아들이 먼 길을(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서 엄마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요.” 하였다.

이조시대는 국도였다고 하나 지금은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길이었다. 신작로(新作路)가 생겨서 그리로 차들이 다니고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으면---’ 하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약 1 주일간 같이 지났다.

아들이 와서 나는 기쁘게 부엌에서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이제 저녁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 아들은 안집에 놀러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안집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저씨(아들)가 다 대환영을 하고 또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진량에 가족이 있는 3 학년 2 반 선생님과 집이 경산인데 통근을 하시는 선생님이 숙직이라서 와서 계셔서 다 안집에서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무흠아, 식사 시간이여요. 오세요.” 하고 내가 불렀더니

“예.” 하는 대답 소리가 났다. 그러나

“고만 여기서 먹어라.” 하고 붙드는 소리가 나고 여러 사람이 붙드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선생님도 잡수시게 건너오세요.” 하고 할머니가 불렀다.

결국 무흠이는 안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책을 보고 있는데

“우리 방에 놀러 가세요.”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큰 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이 뜰아랫방으로 두 분 남자 선생님과 아들이 건너 올 것 같았다. 나는 가정 방문을 갔을 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전임(前任) 여선생님은 바로 내가 세 들어 있는 방의 전(前) 주인이기도 했다 하였다. 늘 남자 선생님들과 어우러져 무관하게 지냈다고 한다. 여선생님 방에도 놀러오고 했다고 한다. 활발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이 학교에 못 있게 되었다고 한다.

시골에선 별로 화젯거리가 없으니까 얼마나 얘기가 잘 번져 나갔을까? 그리고 얼마나 부풀면서 번져 나갔을까? 특히 나는 바로 15리 거리에 나의 시댁 마을이 있는 것이다. 남자 선생님이 내 방에 들어왔다는 그 말 한 마디로 해서 어떤 화제로 번져날지--- 순간적으로 나는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을 나가면서 나는 얼른 이부자리를 깔았다. 이부자리를 깐 방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른 사립문 밖으로 살짝 빠져나와 교장 사택으로 갔다. 내가 사립문 밖에서 담을 끼고 돌 때 내 방으로 오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 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이크!” 하는 남자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두 선생님 중의 한 분의 목소리였으리라.

교장 선생님과 사모님은 반가이 맞이해 주셨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두 남선생님과 아들이 왔다.

어떻게나 무흠이가 숭굴숭굴 얘기를 잘하는지 모두 탄복을 하며 듣는 것이었다.

“박 선생님은 대통령도 부럽잖겠습니다.”라고 최 선생님이 말하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런 아드님을 두셨는데 무엇이 부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경산 군내에서 “학생을 가르치려면 최 홍규 선생님같이.” 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유명한 선생님한테서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기쁘기도 하였다. 교장 선생님도 사모님도 무흠이를 사랑하시고 즐거운 대화 시간을 보냈다.

어느 듯 봄 방학이 끝나고 또 공부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박 선생님, 군내의 전 초등학교의 학예발표회가 해마다 있어서 각 학교가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 번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금년에는 우리 학교도 한 번 나가보도록 준비해 보세요. 이왕 나갈 바에는 당당히 입상할 수 있도록 잘해 보세요. 이왕이면 연극을 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박 선생님께서 각본을 하나 써 보시지요?”

‘통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2 막 6 장의 각본을 썼다. 노래와 무용은 촉탁으로 있는 처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나 자신은 연출을 직접 맡아서 지휘하고 지도하여야만 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연극 연습을 해야 하였다. 학예발표회는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해서 경산 극장에서 하는 경산 군내의 해마다의 큰 행사였다.

많은 어린이들을 동원한 연극 연습이 교사를 사랑하는 순진한 어린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잘 이루어졌다. 그런데 의상이 문제였다. 거의가 다 가난한 어린이들인지라 의상을 준비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왕복 40 리 가까운 길을 걸어서 의상을 구해 와야 했고 당일(當日)로 급히 갔다 와야만 했다. 돌아올 때는 유난히 목이 마르고 피곤하여 나는 힘드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나의 거처까지 돌아왔다. 학예발표회 날까지 의지(意志)의 힘으로 견디어 나갔다. 그 일은 임 정애 선생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나 모든 것이 잘 이루어졌다.

학예발표회에 뒤이어 1 학기 말 전교생 학급 대항 실력 시험이 있었다. 그 일을 위하여 나는 심혈을 기울여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여러 가지로 무리가 겹쳐서 나의 건강은 또 나빠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폐가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의사는 휴직을 권고했다. 휴직원을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요양하고 있는 동안 학교에서 소사가 심부름을 왔다.

“박 선생님, 예술상을 받았답니다. 1 등으로 입상했다는 거지요. 나무 기뻐서 축하회를 가진답니다. 교장 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이 박 선생님께서 꼭 오셔야 하다고들 하십니다. 그래서 모시러 왔습니다.”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갈 수 없었다. 강권하는 권청년의 말을 뿌리치기가 심히 어려웠으나 갈 수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열심히 연극 연습하던 사랑스러운 그 어린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보았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들! 지도한 교사가 잘 한 것이 아니라 순진하여 열심히 연습하던 그 어린이들의 순종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아아! 다시 한 번 그 귀여운 어린이들과 연극 연습을 하고 싶구나.’

나는 교사인 나를 신임하게 따르던 어린이들을 두고 떠나온 것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다. 특히 내가 가르치던 3 학년 어린이들이 더 보고 싶었다.

우악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단순하고 순진하던 큰 진숙이, 뽀족한 것 같으면서도 상냥한 작은 진숙이, 버릇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린아이같이 순진하던 호준이, 불같이 맹렬하면서도 충성스럽던 상태, 어느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어린이가 없었다. 그런 어린이들을 실망시키고 떠나온 것이 한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3 장

1. 출범

시동생과 동서는 자기들의 방문을 닫은 채로 내다보지도 않았다. 말 달구지꾼은 우리 보잘 것 없는 이삿짐을 이미 다 실었고 우리 삼(三) 모자녀(母子女)는 하직 인사를 드렸다.

무흠이가 개에게 물려 절뚝거리며 외가를 찾아왔을 때 나는 친정에서 병아리를 키우고 있었다. 이제 내 몫의 병아리로 양계장을 해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던 것인데 ---예상 외로 병아리 키우기가 힘들었지만 그런대로 약병아리가 될 정도로 자라났을 때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음악회가 있던 밤이었다. 올케언니와 조카들과 귀주와 내가 음악회에 갔다 왔는데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닭장 쪽에서 병아리들의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우리가 급히 달려가 닭장 안의 닭들을 운동장에 끌어내 보니 다 비칠비칠 힘없이 죽어가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그 많은 병아리들이 즐비하게 들어 누웠는데 기가 막힐 광경이었다.

이튿날 그 원인을 알았는데 닭에게 물것이 있다 하여 니코찡 소독을 했던 것이다. 이제 어려운 시기는 다 넘기고 잘 먹기만 하면 움쭉움쭉 커서 알을 낳아줄 닭들이 거의 전멸 직전에 놓인 것이다. 극소수(極少數)만 회생(回生)하고 다 죽어버리니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빈손 털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행상은 그만 두고 집에서 양계하며 아이들 공부 보아주며 오순도순 지내려고 했더니---

무흠이가 개에게 물려 절뚝거리며 왔을 때 얼굴도 수척하고 힘도 없어 데리고 대구 동산병원으로 갔다. 미친개에게 물리면 맞는 주사를 시작하면 여러 번 맞아야 하고 또 많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 개가 미친개인지 성한 개인지 먼저 알아보고 미친개가 아니면 주사를 안 맞아도 된다고, 그 개가 미친개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방법은 개밥을 줄 때 물을 많이 타서 주면 알수 있다고 했다. 공수병(恐水病)(미친개에게 물려서 얻는 병)에 걸린 개는 물을 겁낸다고 했다. 먼저 그 개가 물을 겁내는지 아닌지 테스트 해보라고 했다. 작은집 개에게 물렸다 함으로 알아보았더니 물이 많은 밥도 잘 먹는다고 했다.

나는 아들을 데리고 대구로 들어가서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우리라 생각하였다. 대구에다 집을 사서 공부 시키겠다던 나의 소원은 무산(霧散)되었지만 대구에 가서 무엇이든지 일감을 찾아 아들과 딸을 공부시키리라 결심하였다. 그런데 방 한 칸이라도 얻을 돈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께

“어머님, 제게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도록 다문 몇 마지기라도 좋으니 나누어 주십시오.”했다.

그리고 작은 아버님께 가서 나의 심중의 소원을 토로하였다. 작은 아버님은 나의 심중(心中)의 소원을 잘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작은 아버님에게 “내가 살았는데 벌써 땅을 나누어 달라고 저런다. 아이고오! 이럴 수가 있느냐!”큰 소리로 말씀하시며 방바닥을 치셨을 때

“이번에는 질부의 소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자식 공부 시켜 보겠다는데 도와 주셔야 합니다.” 하시고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섭섭하셨겠지만 단순한 면이 있으신 어머님은 내 소원을 들어 주셔서 일등(一等)호답(好畓)인 무들 논을 내가 자유(自由)재량(裁量)대로 이용하여 아이들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말 달구지로 대구로 떠나는 날 아침에 나로서는 청할 면목도 없어 말씀 드리지 못했는데 어머님은 재봉틀을 가져 가라고 하셨다.

“재봉틀이라도 가져가야 아이들하고 살지.”하셨다.

그 재봉틀은 어머님의 것이었다. 내가 시집 온 후 어머님께서 재봉틀에 앉으시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은 없었지만 어머님께는 소중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어머님 은혜에 감사했다. 참으로 어머니의 사랑에 비길 효자는 없다.

나는 받은 유산을 소중히 생각했다. 그러므로 부억도 없는 작은 방에 세 들어 고생이 많았지만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한 2 년 이상 지나서 내가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방도 넓고 위치도 좋은 곳에 전세방 두 개를 얻느라고 비로소 논을 팔았다. 아들 학교도 가깝고 사대 부국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도 오기 좋은 삼덕 로타리였다. 아들이 의과대학을 마친 후 전세를 찾아내어 서울로 올라갔다. 어머님께서 손자 공부를 위해 배려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손자가 성공한 것을 못 보시고 잠드신 것이 두고 두고 한(恨)이다.

2. 천재교육 시도

나의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과 경향은 선친께로부터 유전된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 되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 교육자라는 칭호를 드리고 싶다. 아버지는 아무리 어려운 수학 문제라도 며칠이 걸려도 기어이 연구하여 알아내어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깨치지 못하는 아이에게도 꾸준한 노력 끝에 기어이 깨닫도록 하시는 열성과 끈기를 가지신 교육자이셨다. 못하던 것을 깨닫게 되면 진정으로 기뻐하시고 “옳지!” “잘 한다!” 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 내가 돌이켜 보면 어머니께서 늘 나를 평하신 말씀처럼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은 듯하다.

첫 아들이 1 년여의 긴 기간의 병고와 싸울 때 함께 싸우며 숨 막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수십 번 넘기고 홍역을 마지막으로 그토록 치열하던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끝나고 두 돐을 맞이한 후부터는 건강한 아이로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아들이 3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천재 교육법”이란 책을 보게 되었다. 일어로 번역된 책이었는데 독일의 한 젊은 목사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천재는 나면서부터 타고 난다는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의견은 부모의 노력 여하(如何)에 따라 천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천적 백치 같은 장애아가 아닌 보통 아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다 그 의견에 반대하였지만 그는 자기가 자녀를 가지면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다.

그 후, 그에게 첫 아기가 출생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기의 소신을 시도해 보기도 전에 그 아기는 잠들고 말았다.

다음에 두 번째의 아기가 났는데 아들이었다. 첫 아기보다 덜 총명해 보이는 극히 평범한 아기였다. 강보의 아기 때부터 시각을 통한 교육을 실시하여 차차 아기가 자라 스스로 놀 수 있게 되었을 때, 카드를 만들어 주어 가지고 놀며 글자를 알도록 했는데 참으로 그 목사는 자신의 소신한 대로 아들을 키웠고 13 살인지에 벌써 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그 책에 있었다. “천재(天才)와 가인(佳人)은 박명(薄命)이라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80여세의 고령(高齡)까지 건강하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아들에게 천재 교육을 해보려고 결심하였다. 카드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아빠에게 얘기했더니 그는 그의 붓글씨 솜씨를 발휘하여 쪽 고르게 유려한 필체로 쓴 카드를 만들어 아들에게 주었다.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매일 재미있게 놀더니 어느 듯 다 익혀 받침이 붙지 않은 글자는 환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또 받침을 써달라고 아빠에게 요청(要請)했다. 아빠는 받침을 써서 가위로 오려서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받침이 붙으니 자기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말을 만들 수 있으므로 기뻐하며 잘 가지고 놀았다. 하늘, 땅,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집, 학교, 산, 강, 길, 바람, 꽃, 풀, 등등... 이제까지는 받침이 붙지 않은 말만 만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온갖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말을 만들 수 있고 새롭게 배우는 새 말들도 다 만들 수 있으니 신기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재미있게 놀면서 질문이 더욱 많아지고 한없이 만들어지는 놀이에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아이에게는 집안에서의 재미난 놀 거리였으므로 다섯 살 때(만 네 살이 되기 전이었다)는 한글로 씌어진 것은 무엇이나 다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산수를 가르치고 싶었으나 낮에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밤에 아이가 잠들기 전에 이야기 식으로 산수의 더하기와 빼기를 가르쳤다.

“나무에 새가 세 마리 앉아 정답게 노래하고 있었대. 그때 저쪽 나무에 있던 새가 또 세 마리 날아왔어요. 이제 몇 마리가 되었지?”

“여섯 마리요.”

“오늘 할머니가 장에 가셔서 사과를 사오셨어. 할머니가 두 개 잡수시고 삼촌이 세 개, 무흠이가 두 개, 엄마가 두 개, 다 몇 개를 먹은 거지?”

“아홉 개요.”

매일 이런 식으로 산수 공부를 하고 재미난 얘기를 해주니 아이는 저녁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는지...그래서 산수 공부의 진도(進度)도 빨라서 암산(暗算)이 백(100) 이내의 수는 어른보다 더 빨라졌다.

읽기와 산수 등 머리로 생각하고 외우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잘 하는데 쓰는 것(글씨 쓰기)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아들이 나처럼 손재간(才幹)이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닮았으면 글씨를 잘 쓸 텐데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고등학교 학생이 될 때까지 글씨를 잘못 썼다(지금도 잘 쓰는 건 아니지만) 나의 둘째 오라버니는 아버지께서 여러 번 편지를 읽으시며 달필(達筆)이라고 칭찬을 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 나는 결심을 하고 글씨 본(本) 책을 따라 연습을 하였다. 나는 내 친구 선희가 마음씨도 곱거니와 글씨도 얼마나 아름답게 쓰는지 참으로 나의 글씨가 부끄럽고 친구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글씨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선천적으로 내가 손재간이 없어서 그림도 잘 못 그리고 글씨도 잘 못 쓰지만 나의 아버지께서 붓글씨 연습을 많이 하셔서 오늘 이렇게 우리 자녀들이 보기에 본받을만한 필체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나도 나 자신을 연마하며 개발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여름방학이 지나자 나 자신이 보기에도 필치(筆致)가 향상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도 칭찬해 주셔서 힘을 얻었다.

나는 나의 과거를 회상하며 내 아들도 노력하면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하루에 한 장씩 그림을 그려서 엄마에게 보이라고 얘기하였다. 처음에는 힘들어 하였지만 차차 재미를 붙이고 꽤 괸찮은 그림도 나오게 되었다. 초등학교 5 학년 때에는 자기 반에서 그림을 괸찮게 그리는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의과대학에 다닐 때“만약 어머니께서 제가 어릴 때 그렇게 아니 하셨더라면 저는 의과 대학 공부를 못 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상세한 인체 해부도를 그려야 할 때가 많은데 그림 그리는 연습을 안 했었더라면 어떻게 지금 세미한 곳까지 그릴 수 있었겠습니까? 참말 어머니 덕분입니다.” 라고 말했다.

나도 참 기쁘고 감사했다. 내가 비록 앞일을 예측하지 못했을지라도 아들에게 인격적인 균형 진 발달을 바라는 마음에서 한 일이지만 오늘날 아들이 의과대학생이 되어서 그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말하니 나도 기뻤다. 나는 장래 일을 예측할 수 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들에게 대한 나의 배려가 그에게 믿거름이 된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한다.

6. 25로 말미암아 아빠가 실종(失踪)이 된 후 나는 정신 잃은 사람처럼 몇 해를 보내는 동안 아이들의 교육을 등한히 하였다. 마침내 정신이 돌아오고 아이들을 잘 키울 것이라고 말하더라는 남편의 동료였던 분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그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아내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흠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식 날 아빠가 선물로 사왔던 그 학생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그 후에는 할머니께서 늘 학교에 가셨다. 시어머님께서는 손자를 지극히 사랑하셨고 학교에서 있는 행사나 회의에 참석하시는 것을 큰 낙으로 아셨다. 아드님을 잃은 후 손자에게 소망을 걸고 살고 계시는 듯 하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어머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었고 또 나 자신이 남의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싫었었다. 한 번은 학부형회의에 갔다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이 정무흠이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하셨다.

2 학년이 되자 성암산(聖岩山) 기슭에 자리 잡은 성암 분교(分校)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김 계화선생님이었는데 아직도 미혼이었다. 열심히 공부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우리 동네의 다른 아이들이 다 경산 초등학교로 가는데 무흠이만 경산 중앙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래서 더 가깝고 물도 안 건너니 좋았다. 그런데 부산에서 이사를 온 한 학생이 5 학년에 입학을 해서 같이 분교(分校)에 다니게 되었다. 엄마가 장사를 나가고 없는 날, 무흠이는 지각(遲刻)을 했다. 5 학년 형이 말하기를

“지각해서 학교 가면 선생님한테 혼난다. 미군 아저씨 한테 가서 놀다가 학교 끝날 때 쯤 집에 가자.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 하였다.

그러나 무흠이는

“아니야, 나는 학교 갈래. 혼내시는지 아닌지 나는 가볼래.” 하고 학교로 갔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얼마 후에 또 지각을 하게 됐는데 또 5 학년 형이

“이번에는 정말 혼 날거야. 먼저는 처음이니까 용서했지만 이번에는 두 번째니까 정말 매 맞을 거야.” 하고 경고했지만

‘아니야, 난 가 볼 거야. 정말 매 때리시는지 난 볼 거야.“ 하며 학교에 갔는데 매를 안 때리셨다는 것이다. 사탕도 주고 초코레트도 주고 미군아저씨들하고 재미있게 놀 수 있다 하며 5 학년 형이 역 쪽으로 가며 꾀었지만 그 꾀임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일어로 번역된 영국 사람의 자서전을 읽었다. 내 기억으로는 책 이름이 “미루 자서전”이라고 알고 있다. 미루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열심인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은 다른 사람보다 4 분의 1 세기 더 빠르게 발달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아들이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아들에게 주어서 나태함에 흐르지 않도록 하여 계속 향상하도록 지도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2 학년 여름 방학 때에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과제를 주기고 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를 알아야 되겠다 싶어서 국사책을 주었다. 꽤 부피가 두꺼운 책이었으나 자기 스스로 사전을 찾으며 읽으라고 하였다. 사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고 사전을 찾아도 모르는 것은 엄마한테 물으라고 했다. 무흠이는 여름 방학 동안에 그 책을 3 번 통독(通讀)을 했다. 겨울 방학 과제로는 “중등(中等) 동양사(東洋史)라는 책을 과제로 주었다. 그 책은 겨울 방학 동안에 2 번을 통독(通讀)하였다. 이리하여 무흠이는 역사에 대하여 부쩍 취미가 붙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역사는 전교에서 제일 잘 한다는 평을 들을 만큼 되었다. 나중에 말하기를 ”역사를 전공했더라면 세계적인 학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였다.

4 학년이 되었을 때 영어 공부를 시작하여 재미있게 공부하며 진도도 잘 나갔으나 워낙 가정 형편이 어려워 내가 부산으로 직장을 찾아 떠나는 통에 아들에 대한 천재 교육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3. 수성동에서

우리는 나의 고모님이 사시는 수성동, 고모님과 고모부님이 소개해 주셔서 얻은 방에 들어갔다.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 아들, 그 아들은 대구대학 체육과 학생이었다. 다 참으로 좋은 분들이었다. 지금도 내 눈엔 큰 대문과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과 헨섬이던 그 아드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방은 동쪽 끝 방이었는데 툇마루를 들어 올리면 아궁이가 있고 거기서 요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도 불편한 줄 못 느꼈고 그 집에서의 추억은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밤 사이에 쥐틀을 놓았던 할아버지가 쥐들이 와글와글한 그 쥐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정말 한 쥐틀 속에 그렇게 많은 쥐가 잡힌 것을 본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대문을 일찍 열어놓았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또한 좋아하셨다. 대문을 일찍 열어놓는 집에 복이 굴러 들어온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하였다. 지금은 아파트 시대라 문을 꼭꼭 잠궈놓고 살지민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큰장에서 비느질거리를 갖다가 하였다. 무흠이와 귀주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무흠이는 사대부중(師大附中)에 다녔고 귀주는 대구 초등학교에 다녔다. 귀주가 다니는 학교는 대구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였는데 아동 수가 6,000 명이라고 했다. 귀주는 이제 초등학교 5 학년이었다. 그리고 무흠이는 중학교 2 학년이었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귀주에게 피아노 렛슨을 시키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려 했다. 부중(附中) 가까이에 피아노 렛슨하는 집이 있었다. 렛슨 하는 교사는 효대(曉大) 학생이었는데 참 잘 가르치는 피아노 교사였다. 배우는 아이들이 25명 쯤 되었다. 렛슨 받을 때마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선생님 말씀에 배우는 아이들 중에 가장 총명하고 한 번 가르쳐 주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피아노를 전공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귀주도 말하기를 자기는 의사가 되든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 두 가지 중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다. 의과 대학에도 못 보내고 피아노도 계속하도록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했다.

그 할아버지 집에 세든 얼마 후 어머님께서 밀 추수를 해가지고 다니러 오셨다. 그리고 그 이튿날 밀을 빻으러 방아간에 가셨다. 방아간은 가까운 데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었는지라 귀주도 할머니를 따라갔는데 할머니가 밀가루를 빻아서 집에 돌아오신 후에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러니 어머님의 걱정은 최고조에 달하셨다. 그때 아이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가지고 나타났다. 아이를 보시자 어머님은 그 억센 손바닥으로 아이를 갈기셨다. 몇 차례고 뺨을 치시는데도 아이는 쓰러질 듯 비칠비칠 하면서도 죄인의 모습으로 울지도 못하고 죽은 듯 순종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연민의 정으로 가득했으나 어머님 앞에서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의 옷을 벗기고 머리와 몸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 입히고 할머님께 사과 말씀을 드리도록 했다.

“할머니, 잘못 했습니다.”

“잘못 할 짓을 왜 해!”하시며 아직도 할머니는 노여움을 다 삭이지 못하신 듯 하였다.

참으로 할머니는 손녀를 사랑하셨다. 그런데 방아간에 데리고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탔을까 다시는 그렇게 못하도록 단단히 혼내주어야겠다고 결심하셨을 것이다.

귀주는 방앗간에서 과히 멀지 않은 한길에 나갔다가 작은 할아버지댁의 버스를 만난 것이었다. 그 버스를 타고 대구 시내를 몇 번이고 돌면서 이제까지 시골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구경하며 신나게 즐겼던 것이다. 그러느라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할머니께서 걱정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에 안집에서 방이 필요해서 부득불 우리는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밝은 할아버지 집 방을 좋아했고 주인 집 가족 전체를 좋아했으나---

새로 이사한 집은 집도 어두운 편이고 할아버지 집처럼 근사한 대문도 없었다. 주위 환경도 초라한 곳이었다. 뒷간은 더군다나 우리가 좋아할 수 없는 설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집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 집에 살 때 귀주가 친고모할머니 집에 가서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왔다. 아주 어린 강아지였으므로 며칠 동안 방에서 키운 생각이 난다. 그 집에서는 우리만 살았으므로 아이들이 쓸쓸해서 그랬는지 밤마다 엄마 양 옆에 자면서 자기 쪽을 향해 달라고 하였다.

귀주는 “엄마는 오빠 쪽만 많이 보시잖아요.”하고

무흠이는 “어머니, 제 쪽도 좀 돌아 보세요.”하며 서로 말하는 것이었다.

장바느질 하면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참기름을 짜서 부산 친구 집에 가서 팔고 왔다. 그때는 가짜가 판을 치는 때라서 목화씨를 볶아 기름을 짜서 참기름과 섞어 판다는 소문이 자자한지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직접 짜가지고 온 기름만 믿을 수 있다며 그 참기름은 잘 팔렸고 다 환영하였다. 나도 기름집에 가서 내가 직접 지켜 서서 짜가지고 가기 때문에 친구들이 환영하여 금방 팔고 돌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동안 나는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을 느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아들이 수학여행을 가야 한다는데 보낼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를 불렀다. 나는 아파서 누워 있었다. 선생님이 “어머니가 못 오시면 누가 다른 분이 없느냐?” 하셔서 작은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했더니 그분이라도 어머니 대신에 오시란다기에 내가 편지를 썼다. 그날 저녁 무흠이가 말하기를

“과연 붓의 힘이 검(劒)의 힘보다 크다는 말이 맞았어요.” 했다.

나는 내 아들을 남의 힘에 의해 수학여행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작은 할아버지가 학교에 가시면 틀림없이 당신의 돈으로 종손자 수학여행을 보내려고 하셨을 것이다.

고모님 집 개축(改築)하는 일이 끝나고 고모님은 우리가 고모님 집 안방으로 이사 오기를 원하셨다. 주인이 살아야 하는 안방과 부엌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보다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여름에는 큰 다락에 무흠이가 생활할 수 있는 좋은 방이었다. 고모님 내외분은 가게에 붙은 방과 또 그 옆의 방, 두 개만 가져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쌀가세를 하시니 안방에 거처하셨다가는 거리가 멀어서 불편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한 새로 단장한 고모님댁 안방으로 이사했다.

4. 늑막염 발병

수정동에서 두 번 째로 세 든 집에서부터 엽구리가 결리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서 무엇이나 간신히 해야 할 형편이었다. 고모님 집으로 이사 든 후 점차 더하여 갔다. 부산에 참기름을 팔러 갔다 온 후에 방천에 빨래를 갔는데(그 무렵에는 수성교 다리 밑에 흐르는 냇물이 맑아서 아낙네들이 냇가에서 빨래하기를 좋아하였다.)봄볕이 따스하게 내려쪼이고 있었다. 즐겁게 얘기하며 돌에다 대고 힘껏 주무르며 비비며 빨래방망이로 두들기며 겨울 동안 묵은 빨래와 홋이물들도 흘러가는 맑은 냇물에 씻으니 속시원하게 땟국이 다 빠지는 것 같아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즐겁게 빨래들을 하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오한이 들고 진땀이 흐르는 것을 간신히 참고 집으로 돌아와 몸져 눕고 말았다. 이제는 웃목에 있는 걸래도 집어올 힘이 없었다. 손끝도 꼼짝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는 참으로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든 의욕은 사라지고 몸은 천근 만근 땅에 착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모님은 나를 보고 권면하셨다.

“얘야,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자. 가까운 데 있는 여의사한테 가서 진찰해 보도록 하자. 무슨 병이든 너무 늦어지면 고치기 힘든다.”

나는 고모님 말씀을 듣고 그 여의사에게 가보았다. 여의사는 나를 진찰해 보고 늑막염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늑막에 물이 생겼다 했다. 그날 이후 의사가 왕진하여 주사를 놓아 주었다. 할머니 한 분을 고용하였으나 얼마 후에 그만 두시므로 시어머님께서 오셔서 보살펴 주셨다. 나는 바깥 풍경을 조금도 볼 수 없는 안방에 갇혀서 푸른 하늘과 초록빛 이파리들이 보고 싶어 시골집을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닭이다 계란이다 하고 매일 먹어야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육식의 공세(攻勢)를 견뎌내기도 힘들었다. 나는 신선한 열무김치와 깻잎, 호박잎 쌈이 먹고 싶었다. 푸른 하늘과 초록빛 잎들을 보며 신선한 채식을 하면 곧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골 집에 돌아갔다. 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떠 있고 열어놓은 안방 문을 통하여 보이는 햇빛에 반짝이는 청청한 감나무 잎들과 담장을 덮은 호박잎과 호박꽃, 또 담장으로 타고 올라간 보라빛 콩꽃과 벌써 주렁주렁 열려 자주빛으로 익어가는 꼬투리들을 보며 그 이름디운 꼬투리들 속에서 영글어가고 있을 넝쿨콩,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기쁨과 소망을 주었다. 사촌 시누이 수영 아가씨가 와서 밥을 지어 주었다. 먹고 싶었던 심심한 열무김치와 된장찌게와 깻잎, 호박잎을 쪄서 쌈 싸서 먹는 그 맛, 나는 하루 하루 소생하여 건강이 회복되어갔다.

그러나 내 건강이 회복의 궤도에 들어섰을 그 때, 친정아버지의 별세 소식의 비보(悲報)가 날아왔다. 나는 아들의 손에 의지하여 친정으로 향하며 발이 허공을 디디는 것 같았다. 아버지 생전에 건강이 회복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생과부가 된 것도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다시 또 늑막염에 걸린 것을 들으시고 얼마나 가슴 아파 하셨을까! 거듭 거듭 걱정만 끼쳐드린 여식이었던 나, 참으로 불효막심한 딸이었다.

1959년 7월 23일이었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버님 영영 떠나시고 말씀 없으시니
뜨거운 눈물 목이 터져라 불러도
응답 없으시니

가련한 여식이라 항상 잊지 못하시던…
이제 어찌 유언 한 마디 없으신고.
인생은 무상하다. 서러운 마음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이 세상에서 가장 이몸을 염려하여 주시던 분이건만
내내 불효만 하던 몸, 몸 둘 바를 모를래라.

애통하려 해도 호흡조차 곤란하니
안타까운 심정,어찌할까!

언젠가 사람다이 효도하려 했더니 이제는 모두가 허사요
아버님, 소녀의 불효를 용서하옵소서

단기4292 년 7 월 23 일


육십여 년의 생애를
한결같이 고고하던 한 넋이

유명을 달리한 유족의 눈물도 모르는 양
감은 눈 뜰 줄 모르시고
다문 입술 열 줄 모르시니

오호 솟구치는 눈물이여
구비구비 간장이 녹는 설움이여

가지가지 빛나는 업적
마디마디 사랑의 말씀
님은 가오셔도 영구히 남으리

슬픔과 애통은 회복기에 있던 나의 건강을 악화시켜 버렸다.

아버지 장례식이 끝난 후 다시 진찰을 해보니 많이 회복된 상태였던 것이 다시 모든 치료가 무효가 되고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결핵성 늑막염 환자였던 나는 나를 진단한 청진기를 눈 앞에 보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셨다. 나는 살아났다. 죽지 않고 살아났다.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 나는 눈물겨워진다. 내가 보따리 장사를 다닐 때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오니 귀주가 아파서 누워 있었다. 당장에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연주나력이라고 했다. 어떻게 치료하면 좋은지 물었더니 아직 초기니까 약방에서 약을 사서 집에서 주사를 놓으면 낳을 거라고 했다. 그 의사는 아빠를 잘 아는 의사였으므로 내 형편을 잘 알고 될 수 있는대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도록 치료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오빠가 주사를 잘 놓는 분이었으므로 학교가 끝나면 외가에 가서 주사를 맞고 오도록 하였다. 그래서 병이 오래 가지 않고 깨끗하게 잘 낳았다. 그런 후에는 어느 누구보다 건강한 아이로 잘 자랐다

5. 가난 속에,핀 꽃

귀주가 중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교복을 맞출 돈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나의 유일의 겨울 외출옷이었던 검정 모직옷을 가지고 교복으로 개조하였다. 그러니 아이에게 추운 겨울에도 반코트 하나 해 입힐 여유가 없었다. 귀주는 새까만 골덴 반코트를 하나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

무흠이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는데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동생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귀주는 자기가 소원하는 반코트를 맞추었다. 마침내 오빠가 월말에 월급(?)을 받아온 날 저녁,귀주는 맞은편 방에 사는 신애언니와 함께 양장점에 가서 반코트를 찾아왔다. 기쁨이 충만한 귀주에게

“한 번 입어 봐.”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귀주는 반코트를 입고 앞뒤 모습을 보여주었다. 엄마도 오빠도 기뻐하는 것을 보고

“오빠, 정말 정말, 감사해요.” 하며 감격해 하였다.

우리가 수성동에 살 때 귀주가 나에게 내 생전 입어보지 못한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좋은 내복을 선물하였다. 내복을 살만큼 큰 돈이 생길 방도가 없었을텐데 어떻게 내 내의를 샀는지 퍽 궁금하여 내가 물어보았다.

“학교 갈 때는 학교가 바쁘니까 버스를 타고 가고 올 때는 걸어왔어요. 그래서 그 돈 모아서 어머니날에 엄마한테 드릴 선물 샀지요.”했다.

나는 그때 참으로 가슴 뭉클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귀주는 아직 만 열살 밖에 안 된 초등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우리는 옷 한 가지 사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니의 이종사촌 동생 하나가 대구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미혜가 우리가 살고 있던 남산동 셌방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가 입고 온 그 하늘빛 쉐터가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느껴젔다.

‘저런 하늘빛 쉐터를 귀주에게 하나 사 입혔으면’하는 소원으로 여러날을 보냈다. 마침내 절약, 또 절약한 끝에 여러 날 만에 아름다운 하늘빛 쉐타를 사 입혔을 때의 기쁨은 아직도 내 마음에 짙은 감동으로 내 마음의 눈물겨운 추억의 장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 시절 귀주는 중학생이었다.

6. 고모님집에 있던 때에 일어난 일들

내가 늑막염을 앓고 있을 때 아이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귀주는 초등학교 6 학년, 졸업반이었고 무흠이는 중학교 3 학년 역시 졸업반이었다. 그 당시엔 무흠이는 조금도 그런 기색을 안 보였었고 나종에 안 사실이지만 사람이 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지 왜 공부를 해야 돼는지 심각한 질문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연극의 주인공으로 뽑혀 그 연습을 해야 된다고 해서 병상에 누운 내가 다락에 있는 아들을 지도한 기억이 난다. 그 연극이 감격적인 스토리로 갈채를 받았다는 얘기를 무흠이가 하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시골 할머니집으로 갔다. 그 동안에 무흠이의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셨다. 선생님은 아주 젊은 분이었다. 지성적이었으나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었다. 깨끗힌 외모와 같이 심성도 깨끗한 분으로 보였다. 무흠이의 말에 의하면 서울대학을 나오신 분이라고 했다. 나와 대화하는 중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무흠이가 부모님이 다 계시는 유복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라는 학생인줄 알고 집을 찾느라고 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하셨다.

가게들이 있는 이 골목길에서 셋방살이 하는 과부의 아들일줄은 전혀 상상치 못하셨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보호자는 아빠 이름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월계화를 수놓은 작은 액자 속에 넣은 아빠 사진을 걸어놓고 아이들이 아침마다 학교 갈 때 아빠에게 인사하고 학교에 가도록 했으므로 나와 아이들에게는 아빠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무흠이는 고등학교 1 학년 때 자기 클레스의 급장이었는네 그 다음 해에도 또 급장으로 뽑혔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의 부족한 점을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선생님까지 부족한 점을 보충할 학생을 봅아줄 터이니 수락하라고 권면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인격적인 감화로 사람이 따라가는 것이지 인간적인 꽤나 힘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감사했는지 학우들과 선생님께서 그토록 신임해 주는 것이 너무 기뻤다.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신 것은 고등학교 1 학년 때의 일이었으며 무흠이가 2 학년 때 급장이 되는 일을 사양했을 때 권면의 말씀을 하신 선생님이 바로 그 선생님이었다.

7. 온 가족의 입학

아들은 중 3, 딸은 초등학교 졸업반,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아직도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은 회복기에 있는 환자였다. 어느 날. 아들이 이렇게 제안했다.

“어머니, 사람은 누구나 소망이 있어야 활력이 생기고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도 무엇인가 소망을 가지시고 일어서셔야 됩니다. 지금처럼 어렇게 사시는 것은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겠느냐? 건강 때문에 무리도 할 수 없고…”

“어머니, 어머니는 옛날부터 공부하고 싶어 하셨지요? 영남대학에 들어가시면 여자분들은 학비도 반액입니다. 한 번 해보세요.”

“그렇지만…”

“학비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요? 그건 걱정 없습니다. 우리 둘이, 귀주와 제가 둘 다 장학생으로 들어가면 어머니 입학금도 충분히 충당될 거고 저희 둘의 학비로 어머니 학비가 다 넉넉히 충당될 것입니다.”

학교!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六. 二五가 났던 그 해(年) 남편이 나에게 공부 시켜 주겠다고 소망을 가지게 했던 그 학교, 여식(女息)이라서 내 소녀 시절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던 대학 진학의 꿈, 이제야 이룰 때가 온 것일까? 나는 자다가 깬 사람 같았다. 갑자기 생기가 났다. 할 일이 생겼다.

아들은 자기가 갈 수 있는 두 학교, 경북고등, 자기 아버지의 모교와 자기 은사들이 계속해서 진학하기를 바라던 사대부고, 두 명문 학교를 뒤에 두고 계성고등학교를 택했다. 동생에게도 권하여 성명여중으로 가도록 이끌었다. 둘 다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나는 아들의 권면한 대로 영남대 야간부 국문과에 응시하였고 등록을 마쳤다.

나는 친정 아버지의 상중(喪中)이였는지라 소복을 하고 쪽진 머리로 등교했다. 아마 학교에서 화제꺼리가 되었는지 신문기자가 취재하려고 나타났다. 나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기사화 하지 않았던 것을 인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공부가 시작되었는데 다른 공부는 다 따라갈 수 있겠다 생각되었고 전공과목은 재미있고 좋았으나 영어가 문제였다. 갑자기 대학 영어에 뛰어들었으니 교수님이 어디를 읽고 계시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영어에 대하여 초년생이었다. 고교 1 학년 때 조금 배우다가 선생님이 병이 나서 계속 못 오시는 날이 많던 중 진주만 공격 이후 적국 말이라고 일본사람들이 우리 학교에서 영어 교육(敎育)을 전폐하고 뒤이어 우리말(그들은 조선어라고 했음)교육도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말도 영어도 배우지 못하였다.

六. 二五 이후 친정에서 요양 중일 때 동생에게 부탁하여 영어자습서를 구하여 발음부호를 익히고 몇 과목 교과서를 읽은 것이 영어 공부의 전부였던 나는 참으로 막막하였다. 여름방학 전에 시험 스케쥴이 발표되었는데 나는 영어를 위하여 엿새 동안을 꼬박 눈 한 번 안 붙이고 밤새기를 했다.

시험 당일, 야간부 1 학년 학생들이 강당에 앉아 답안지를 받았는데 나는 그 시험지를 책상 위에 펴놓고 알듯한 문제라고 깨달았으나 한 자도 쓸 수가 없어 눈이 뚫어지라고 종이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시험이 끝난 주간부 학생들이 창문에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시험지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고 안타까웠는지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고 불렀다 내가 반응을 안하니 무어라고 말하며 또 부르고 또 불렀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다듬을 수 없게 자꾸 부르는 것이 성가셨다. 그들은 친절한 마음으로 도와주려고 그러겠지만 나로서는 귀찮았다. 잘하던 못하던 나의 실력대로 정직한 답안지를 만드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학생들에게 내가 자기들의 친절에 대해 사양한다는 제스츄어를 했다. 그랬더니 비로소 학생들의 그림자(모습)가 창문에서 사라졌다. 교수님은 30 분, 25 분, 20 분, 하고 카운트 다운을 하고 있었다. 15 분 하고 교수님의 음성이 울리자 마치 그 음성이 내 귀에는 마지막 자비의 기간을 알리는 재판관의 음성처럼 들렸다.

‘무엇이든지 써야 한다.’

‘백지로 내는 것 보다 무엇이든지 써서 내야 한다.’

나는 쉬지 않고 썼다. 정신없이 썼다. 시간이 끝났다는 선고가 내릴 때까지---

영어 시험이 전멸인 것 같은 절망 속에 허무감 마저 들던 그때의 심정---

이튿날은 전공과목 시험의 날이었다.

밤새도록 공부하였다. 한숨도 안 자고 먹는 시간도 머리 빗는 시간도 아까와 하며---

이번에는 교실에서 시험이 있었다. 시험지를 받아 책상 위에 폈을 때 어제처럼 다 알듯한 문제였다. 어제보다 더 가슴이 두군거리고 열도 나고 머리도 아팠다. 귀도 울고---엿새 동안 밤새기 하고 또 하루 더 밤새기 하였더니 이제 참으로 중환자나 된 것처럼 간신히 앉아 견딜 정도의 건강 상태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 보기에 태연한 척 앉아 있었다. 30 분, 25 분, 20 분, 또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그 음성은 빨리 써라, 빨리 써라 재촉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연필을 쥔채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과 얼굴이 화닥거릴 뿐이었다. 내 가슴은 속히 쓰기를 바랐지만 내 머리는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지 않고 멍하니 안개가 끼인 것 같았다. 마침내 마지막 기회를 알려주는 교수님의 자비의 시간을 알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15 분!

나는 썼다. 정신없이 연필을 움직였다. 자비의 시간 동안에 문제를 다 매꾸고 나자 슬픔이 밀려왔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슬픔이었다.

기말 시험이 끝난 후 며칠 동안 나는 왠지 슬펐다. 그토록 노력했지만 영어 점수는 낙제 점수일 것 같았고 전공 과목도 잠도 안 자고 정신 없이 썼으니 좋은 점수가 나올 리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영어 시험의 정답이 무엇이었는지를 서로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무심결에 들으며 조금은 맞는 데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반 학생들이 영어 때문에 고민하는 나를 보고 동정하며 말하였다.

“영어는 교양 과목이니 2 학년 때 하셔도 됩니다. 정 힘드시면 교수님을 찾아가셔서 이야기 해보세요. 들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그 어드바이스가 무척 기뻤다. 영어만 아니더라도 엔죠이 하며 공부랄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수님을 찾아가서 나의 고충을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나의 형편을 잘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난 후“시험 점수가 어떻게 나왔는지 보아 드리겠습니다.”하시고는 나의 답안지 점수를 알려 주셨다. “C 학점은 나왔으니 진급은 됩니다.”하셨다. 나는 용기를 좀 얻고 교수실을 물러 나왔다.

그 후에 학생들이 나에게“아주머니, 축하합니다. 아주머니께서 전공과목에서 A 학점을 받으셨읍니다.”하였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괜히 그러지 마세요. 그럴 리가 없어요.”하고 아예 상대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더욱 열을 내어 내가 A 학점을 받았다고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주간부에는 한 명도 A 학점 받은 학생이 없고 88 점 받은 학생이 주간부에서 최고점이었는데 경북여고 출신이라고 했다. 야간부에선 3 명이 A 학점을 받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박 옥종이라는 것이었다. 끝까지 그들의 말을 못 믿어하는 나를 안타까워한 그들은

“우리 말을 정말로 못 믿겠으면 직접 찾아가 보세요.”했다.

결국 내가 찾아가서 내 점수를 확인하고서야 사실임을 인정했다. 참으로 꿈 같은 사실이었다.

나의 자녀들이 그토록 밀어주고 그토록 어렵게 첫 관문을 통과했건만 나는 결국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며느리가 아침마다 바쁘게 준비하고 나가니 직장에 나가는 줄 아시고 다니러 오신 동안 열심히 도와 주고 계시던 어머님께서 방천에 빨래하러 나가셨다가 동장 부인으로부터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여 다닌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노발대발하신 것이었다. 나종에 안 사실이지만 동장과 친하게 지나시던 고모부님께서 자랑삼아 처질녀가 대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악의 없이 한 이야기였겠지만 나에겐 큰 타격이었다.


4 장

1. 우리의 새 보금자리

고모부님의 권고를 받아들여 깨끗하게 수리된 작은 집을 하나 샀다. 윗채에 방 두 칸, 아랫채에 방 한 칸인 우리에겐 세상의 고루거각이 부럽지 않은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집에 비해서 큰 대문이 동쪽에 있었고 부엌 옆에 우물이 있었는데 깨끗하게 시멘트로 단장한 우물 주위엔 낮은 담이 붉은 벽돌로 쳐저 있었다. 나는 그 벽돌담 위에 보랏빛 국화분을 두었다. 그 국화는 참으로 예술적으로 키운 것이었다. 내 팔 길이보다 더 길게 키운 그 국화는 분에서 아래로 경사를 이루면서 그 우아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영주에서 목회를 하던 나의 동생부부가 그 새 집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그들의 신혼시절이었는데 동생의댁은 참으로 현숙한 여인이었다. 그때 동생의댁이 내게 흰 저고리 하나를 선물했는데 내게는 참으로 고맙고 귀한 선물이었다. 옷을 해 입을 형편이 안 되던 내게는 참으로 큰 선물이었다. 그 집에 살 때 귀주가 내게 내복을 선물해 내가 크게 감격하였고 오래오래 기워가며 입었다.

아이들이 토끼를 키우기를 원하여 키우게 되었다. 아이들이 풀도 뜯어주고 채소도 주어 토끼는 토실토실 잘 자랐다. 토끼가 풀이나 채소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모습은 그 모습도 보기 좋았고 그 소리도 듣기 좋았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토끼를 들여다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토끼가 없어진 것이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토끼장을 청소하느라 토끼를 내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이웃의 개가 대문이 활짝 열려있던 우리 집을 무단침입하여 우리 귀여운 토끼를 물어죽였던 것이다. 토끼를 찾고 찾다가 겨우 하얀 꼬리 밖에 발견 못한 두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토끼 꼬리를 뒤란에 묻어주고 거기 십자가를 세워 주었다.

우리가 우리 새 집에 이사 든 후 곧 고급 장교 한 분이 고모부님과 함께 Jeep차를 타고 나타나셨다. 그리고 우리 아랫채 방이 마음에 드셔서 그 방에 세를 드셨다. 온 가족이 다 좋은 분들이었다. 그 부인도 순박하고 좋은 분이었고 마음이 통하는 분이었다. 우리 귀주 하고 비슷한 또래의 딸과 다섯 살쯤 된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고향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좋은 분들이 들어오셔서 다행이었다.

시어머님게서 다니러 오셔서 계실 때에 어느 날 귀주가 경희아빠가 어머니 읽어 보시라고 빌려 주시더라며 책 한 권을 주었다. 일본 이와나미 문고(岩波 文庫)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볼만한 책이 못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책 속에 편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그 편지 역시 내가 뜯어 보지 말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편지였다. 나는 이튿날 아침에 귀주에게 그 책을 돌려 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차를 타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다. 남의 신세를 자꾸 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였다. 아이는 타고 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이에게 엄마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아이가 잠잠해지자 시어머님께서 나를 나무라셨다.

“세상에 별난 성격도 다 보겠다. 우리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집에서 자청해서 태워 주겠다고 하셨는데 일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집 딸 태워가며 넓은 자리에 태워가 주겠다는데…원 별 성격도 다 보겠다. 아이 고생만 시킬려고 그러지.” 하시며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확고한 나의 의사를 돌이키지 않았다.

병이 회복된 후에 학교에 다니다가 그것도 중단하고 내 생애에 공백기간으로 있는 시기가 길어지니 마음에 직장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이 더해졌다. 이제 건강 때문에 삯바느질 하기도 햄드는 상태가 되었으니 적당한 직업을 찾아야 하였다. Aunt 한이 나에게 연락을 주셨다. S여고의 기숙사의 사감으로 계시던 분이 연만하셔서 은퇴하시게 되어 후임을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력서와 원서를 내었더니 채용이 되었다.

2. 사감으로 부임

S 여고 기숙사 사감으로 들어가면서 수성동 우리 집은 전세를 놓았다. 금남의 장소라 아들은 데리고 들어갈 수 없어 육영학사로 들어가고 딸만 데리고 들어갔다. 고모님 집에 세 들어 있을 때 고모님 지도를 받아서 담궜던 장이 꿀같이 달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들어갔더니 기숙사생들이 그 된장과 간장을 맛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학생들은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어머니로 불렀다. 부억 일을 담당한 처녀 정애는 아름답고 착한 아가씨였다. 나는 딸 귀주와 함께 안방에 거처했는데 가장 크고 좋은 방이었다. 그 방은 사감실이었다. 본채의 중심에 큰 대청이 있었고 다른 방들도 있었다. 그리고 별채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대문은 유난히 크고 옛날에 대갓집이 살던 한옥을 사서 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대청에서 동편 방엔 청주 맹아학원에서 온 두 학생이 거처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모범적인 학생들이었다. 그 중의 한 학생은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학생이어서 손으로 꽃들을 만져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그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나를 매료(魅了)하였다. 빨래도 깨끗이 잘 하기에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고 물으니 손으로 만져보면 어디에 때가 묻었는지 다 알 수 있다고 했다. 한 번은 재봉틀을 좀 써도 되는지 물어서 허락했더니 내 방에 와서 재봉틀 앞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나는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두 학생에게 은총을 배푸신다고 느껴졌다. 눈 대신에 촉각과 감각과 청각으로 그 헨디켑을 보완하도록 해 주시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사감으로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꽃을 꽂아두는 일이었다.

전임사감은 연세가 높으신 전도부인이었다고 했다. 사감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조석으로 학생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식사도 같이 하고 문제가 있어 상담을 원하는 학생에게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해결점을 모색하고 기숙사의 살림을 관할하고 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사감이 할 일들이 많았다. 나는 보람있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건강이 좋지 않아 어머니가 계신 진해에 가서 요양중일 때 어는 날 저녁에 어떤 계기로 교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이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한 예배당 안의 중간을 막아놓고 하나는 보수파요 하나는 개혁파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후로 아무 교회에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나의 두 자녀가 다 기독교 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녀들과 함께 조석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나 교회는 나가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파가 너무 많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니 무교회주의로 흐르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학교의 사감으로 들어왔으니 학생들과 함께 예배당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만 하였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큰 시장에 가서 재종고모님 (Aunt Ahn) 가게에 갔다. Aunt Ahn은 반가워하시면서 복숭아를 먹으라고 자꾸 권하셨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윗 분이 권하시므로 별로 크지 않은 복숭아 한 개를 먹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의사가 왕진을 와야 할 만큼 격심한 위경련이 일어났던 것이다. 정애가 “어머니! 어머니!”하며 눈물을 흘리고 학생들도 울 정도로 격렬한 통증에 곧 죽을 것만 같은 견딜 수 없는 아픔에 할 수없이 한 밤중이었지만 의사의 왕진을 학생들이 청했던 거이다. 의사가 와서 진통제를 놓은 후에야 서서히 가가앉기 시작하였다. 그런 후 며칠 동안 나는 보행도 어려울 정도로 복부 전면이 아파서 화장실에 가는 것도 정애가 붙들어 주어야만 간신히 걸을 정도였다. 그 일을 겪고 난 후 건강이 많이 손상된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또 다른 새 사건이 내게 닥쳐왔다.

어느 날 아침, 기숙사 식구 전원이 아침상을 받고 앉았을 때 나의 고모님이 헐레벌떡 찾아오셨다. 안 그래도 해수로 숨이 차신 어른이 오늘은 더 숨차 하시는 것을 뵈며 안방으로 모셔 들였다.

자리를 권하자 마자 평소의 침착하고 생각이 깊으신 고모님 성격과는 달리 숨을 다 가라않히지도 못 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정실아, 내가 이제 육십 평생 살아온 이씨 집 밥 못 먹게 생겼다.”하시는 것이었다.

고모님 말씀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으니 밤새도록 고모부님한테 졸리느라 잠 한숨 못 자고 날이 새자 여기까지 찾아오셨다 하였다. 그러니 내가 산 조그만 우리 가족의 작은 보금자리, 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던 형편이 펴이면 다시 돌아갈 이 도시에서의 유일의 우리 집 문서를 요구하는 전갈을 고모님이 가지고 오셨던 것이다.

고모님이나 나나 곤경에 처한 우리의 혈육을 도우기 위하여 한 일이었다. 돈을 가져간 당사자도 일이 예상한 것과는 딴판이 되어 이자도 못 주고 갚지도 못하고 세월이 흐르니 돈을 직접 빌려주신 고모부님이 난처한 처지에 서게 된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내가 산 작은 집은 그 채주가 집장사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집의 본 소유주는 바로 그 채주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내게 그 집 문서를 달라고 요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연로하고 병약한 고모님을 바라보며‘집이 더 중요한가? 고모님이 더 중요한가?’하고 내 심중을 타진하고 있었다.‘집은 지금 없어져도 훗날 다시 살 수 있겠지만 나의 유일한 고모는 한 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분이다.’

이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말없이 일어서서 열쇠를 꺼내 나의 장 가운데 유일의 열쇠로 잠그는 작은 서랍에서 집문서를 꺼내 고모님께 드렸다.

고모님이 떠나신 후 나는 성경을 펴서 읽었다. 욥기 1 장을 읽게 되었다. 갑자기 닥친 원인 불명의 재앙에 욥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참사를 보았다. 모든 재산을 다 잃는 엄청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그 보고를 가져온 그 모든 사건의 유일의 생존자인 종들의 보고를 하나 하나 연달아 듣고 있을 때 드디어 마지막 기별자의 보고가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한지라(욥 1:18,19) “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헌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큰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 사감은 밤중에 학생들이 다 아무 일 없이 잘 있는지, 방마다 소등(消燈)이 잘 되어 있는지 둘러보아야 했다. (학교에서 정해놓은 법이었기 때문에가 아니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한 차레 둘러보아야 할 일이었다.)

어느 날 밤, 내가 별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때 나는 별관 첫째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방문을 열고 살며시 들여다보니 수진이가 편지를 쓰다 잠들어 있었다. 한 방에 있는 경애는 자기 잠자리에 얌전히 자고 있었는데 수진이의 머리맡엔 잉크병과 펜과 편지지가 펼쳐져 있었고 또 한 장의 편지가 펼쳐자 있었다. 나는 찬찬히 미완성의 수진이의 편지와 수진이에게 보내진 편지를 책상 위로 옮겨 놓았다. 얼마 남지 않은 초가 방바닥에서 방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사감인 내가 그 시간애 나의 의무에 등한하여 2~30분 쯤 늦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방바닥에 엎드려 편지 쓰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수진이---나는 수진이가 한 일을 친구들이 알기를 원치 않았다. 수진이 뿐 아니라 어떤 학생의 실수도 다른 학생에게 알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두 소녀를 남겨두고 그 방에서 나와 사감실로 돌아옸다.

그러나 묵과할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새벽에 수진이를 사감실로 불렀다. 그리고 수진이에게 물어보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기 집에 오고 갈 때에 같은 기차를 타고 오가며 만나게 되는 남학생이라고 했다. 처음 받은 연애 편지에 답장을 쓰다가 잠들어버린 소녀의 순진함에 마음속으로 미소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수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첫 편지에 꼭 답장을 안 써도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부모님한테 보여 드리면 좋겠구나.”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딸 귀주가 S여중에 입학한 얼마 후에 어떤 남학생이 편지를 보내왔다. 귀주는 그 편지를 엄마한테 가지고 와서 엄마하고 같이 읽었다.

내가 지금도 감사하는 것은 아들과 딸이 다 엄마한테 비밀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친구가 누구 누구인지 각별히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딸의 친구가 누구인지 각별히 친한 친구들이 누구인지 환하게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내 자녀가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보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멈마를 자기들의 친구로 느끼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서 틈만 생기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음악교과서의 노래도 같이 부르고 책을 봐도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비록 가난해도 우리는 같이만 있으면 행복했다. 나는 아들의 친구가 와도 같이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그런지 찢어지게 가난한 단간방 셋방살이를 할 때에도 그 방에 친구가 오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했고 친구들도 거의가 다 잘 사는 아이들이었지만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나는 지금도 나의 자녀들이 그늘 없이 자란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내가 부산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한 친구를 따라 다른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그 친구의 남편은 큰 회사의 중역으로 있었다.

집 안에 연못이 있어 금붕어가 노는 것을 마루에서 볼 수 있고 아름다운 관목들과 화초들도 볼 수 있었다. 화려한 자개장이 방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금은 자개장을 별로 눈여겨 보지 않겠지만 그 당시는 대단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는 마음이 조금도 끌리지 않았다. 오직 준수하게 자란 그 친구의 아들에게만 마음이 끌렸다.

부모와 친구가 되는 것, 친구 사이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물의 유산은 아무 것도 물려준 것이 없지만 사람답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정신과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 고귀한 마음가짐을 잊어서는 안되며 가난해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임을 자녀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바로 선친께서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이기도 하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이것은 나의 남편이 자녀들에게 물려준 유산이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 시시때때로 이야기해 줄 때 너희 아빠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분이었다.”고 말해 준다.

수진이는 나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다.

방바닥에 엎드려 쓴는 것은 힘들테니 무엇을 쓰려면 책상에 앉아서 써라.”고도 말해 주었다. 그 후 수진이는 규칙을 잘 지키는 학생이 되었다.

한 번은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한 학생이 시계를 잃었다고 보고했다. 기숙사생들이 다 모이고 각 방을 조사해야 한다고 학생들이 주장했다. 학생들의 주장을 못 이겨 한 방에 들어가 책상서랍을 열어 보았는데 마음이 괴로와서 도저히 그 이상 그 짓을 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 하나하나를 다 신뢰하고 사감으로 일해 왔는데 각방을 조사한다는 것은 그 신뢰하던 학생들을 불신하는 행동이므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한 차례 호소만 하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사감으로서 부족한 사람임을 절실히 느꼈다. 고민하는 여러 날이 계속되고 나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젔다. 사임할 수 밖에 없는 건강 상태에 이른 것이다. 우리 가정을 위하여 항상 염려해 주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용기도 주시고 고등학교 사감이라는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도록 힘써 주신 아주머님 (Aunt 한)께 얼마나 미안한 일인지---아주머님의 우리 가족에 대한 배려와 나에게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것 같아 괴로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3. 남산동에서

우리가 새로 이사한 집은 초라한 문간방이었다. 부엌도 없어서 마루조각을 들어올려 음식을 만들어야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초라하고 작은 방에 아들의 친구가 놀러와서 내가 나의 최선을 다한 요리(?)를 먹어 주었다는 것이다. 또 딸도 친구가 놀러 와서 내가 아침에 지어서 아랫목에 묻어둔 찰밥과 무우찌게를 친구에게 대접했다는 것이다. 아들과 딸의 친구들이 다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가난한 친구의 단간방에도 즐겨 놀러오고 내 아들 딸이 가난에 기가 죽지 않고 친구들과 교제한다는 것이 기쁜 일이었다.

무흠이가 어느 날, 자기 친구 집 아랫채에 방이 비었는데 그 친구가 우리가 그 방에 들어오기를 원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보다 환경도 좋고 방도 훨씬 좋다고 아들이 그곳에 가기를 원하므로 이사를 했다. 거기는 동네부터가 부촌이었고 방도 비교가 안될만큼 월등 좋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집에서 잠간 동안 있다가 다시 남산동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집도 좋고 주위 환경도 좋고 친구 부모님이나 친구, 즉 주인댁 인심도 좋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환경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들 교육을 위하여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차도 버스도 통학하기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그 당시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구에 들어와 셋방에서 셋방으로 전전하고 있었다. 내가 아들에게 “맹모는 삼천인데 흠모는 구천이라.” 했던 것은 내 자녀의 교육에 환경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는 옮기고 옮겼던 것이 아들이 중하교 2 학년 때 방을 얻어 대구로 들어간 그때부터 의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홉 번을 옮겼던 것을 말한다. (맹모는 중국의 맹자의 모친을 이르는 말인데,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키울 때 아들의 교육을,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을 찾아 세 번을 이사한 것을 말하는데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숙어가 한글 사전에도 나와 있다.)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이제까지 내 아들이 살아온 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환경이었다. 거처도 좋고 주인댁 인심도 좋고 그 아들도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친구들이 매일 놀러 올 수 밖에… 그리고 그 친구들은 우리와 같은 아랫채에 거처하고 있는 친구 방에서 놀았다. 화투놀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장차 돈을 많이 벌어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양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방이 깨끗하고 좋다고 여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느꼈다. 아들에게 나의 생각을 얘기 했을 때 아들은 그것을 인정해 주었고 인류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는 엄마의 생각에 동의해 주었다. 나는 토론을 벌이고 있는 무흠이의 친구들에게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며 인류와 사회를 위하여 이바지하고자 하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대장부의 포부가 되어야 하고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다 마음이 착한 친구들이어서 친구의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었다.

우리는 넓지 않은 골목길을 들어가면 작은 대문이 있고 안채에 방 두 개, 대문간의 오른 편에 방 두 개, 완편에 외따로 외롭게 방 하나 있는 집의 오른편 대문간의 방에 이사했다. 그 방에 있는 동안 조석 예배를 드렸고 나는 3 시 반이면 일어나 세수하고 기도한 후 책을 읽었다. 일어로 번역된 책들이었는데 “가정과 건강”,”미니스트리 오브 힐링’이라는 두 책이었다. 그리고 미국 와서 비로소 그 책들의 본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한 책은 “The Ministry of Healing”이었고 또 한 책의 이름은 “The Home and Health”였다. 그리고 나는 “가정과 건강”이란 책 속에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살아계신다고 믿게 되었다.

무흠이는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일이 끝난 후 귀가하면 곧 자야 했다. 그러므로 아침엔 새벽 3 시 반에 일어나 jogging 하고, 세수하고 들어와 공부하였다. 새벽이 아니면 공부할 시간이 없으므로 언제나 새벽에 공부하였다. 그리고 두멍(물두멍)에 물을 길어다 부어주고 예배를 드리고 아침식사를 하고 학교에 갔다. 귀주는 6 시쯤 일어났고 공부를 조금 하고 엄마가 밥 지을 동안 방을 치우고 같이 예배드리고 식사하고 학교로 갔다. 남산동에서는 학교가 멀지 않았으므로 둘 다 걸어서 통학하였다. 우리 가족이 남산동에 셋방을 얻어 든 이유가 학교가 과히 멀지 않고 방세가 비싸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4. 사망에서 생명으로

40여 년 전 나는 부은암(父恩庵)에서 휴양한 적이 있다. 병약햔 몸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사물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한 달 동안 그곳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마당바위에 올라가 그 아래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안개가 자욱한 신비스럽도록 깨끗하고 조용한 환경 속에서 새 소리를 들으며 지났다. 때는 5월에서 6월에 걸친 찔레꽃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오고 산딸기가 익어가고 끼꼬리가 노래하는 계절이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나는 마당바위에서 내가 읽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떠올리며 불교와 기독교를 대조하며 깊이 명상하였다. 나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반야심경을 통하여 불도(佛道)는 자신이 수양하여 득도하는 길이고 기독교는 스스로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깊디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하였다.

‘만일 내가 저런 현애(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면 과연 내 힘으로 올라올 수 있을까? 내가 불도를 따른다면? 기독교를 믿는다면?’

나는 내 자신의 처지가 천애 낭떠러지에 떨어져 있는 줄 알고 있었기에 자력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구원의 밧줄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며 자신의 마음에 깊이 사무치고 있는 항(恨)을 풀어야 함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수처럼 내 마음에 밀려들어와 나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찼다. 나에게 아픔을 준 그 송곳 같던 말들이 남긴 상처가 내 가슴에서 제거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랑 앞에 굴복하고 그 사랑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치 찔레꽃이 그 순백의 꽃잎을 그 향기와 함께 선사하며 미련없이 지는 것처럼 자아가 죽는 순결한 생애를 사는 입문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생명길 ,곧 인류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 가신 자아희생의 생애로 들어가는 길임을 배우는 초보의 걸음이었다.

- 3부 끝 -
작성자 : 정무흠        2018-08-12 07:17
등록된 답글이 없습니다.
Load
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제휴 및 문의 |  웹사이트 배너
Copyright © 2024 8healthplans.com. New York, US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