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
|
|
|
|
|
|
|
|
|
정무흠 - moohum
프로필
행복한 삶
전체 - (412)
미분류 - (412)
행복한 삶 > 전체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2부 행복한 결혼, 해방, 아들, 딸의 출생! 박옥종 집사님 자서전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2부 행복한 결혼! 해방! 아들, 딸의 출생!***
***박옥종{Lilian Chung) 집사님(정무흠 목사의 어머니) 자서전***

제 2 부

1장

1. 결혼식과 신행 전의 이야기

1943년 5월 27일, 매일 다듬이와 바느질이 계속되더니 음식 만들기로 법석을 하고 그리고 정한 날이 왔다.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입맛을 잃고 며칠 동안 앓기도 했으나 나의 사정엔 아랑곳없이 그날은 왔다. 삼 고의를 속에 안 입으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하얀 대마 속옷과 흰 하브다에(실크) 바지 그리고 하얀 속치마에 분홍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입었다. 제일 복이 많다는 현자 아머니(아버지와 같은 회사에 계시는 분의 부인으로 어머니와 가장 친한 분이었다.)가 내 웃옷을 지으셨다. 그리고 나는 시집에서 새로 사서 보내온 화관을 쓰고 장옷을 입었다. 입었다기보다는 인형이 되어 입히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 더욱 좋겠다.

누군가에 안겨서 예청에 섰고 어떻게 예식이 끝났는지 다만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이마에 올렸던 팔을 내리고 그의 옆에 섰을 때 다시 전날과 같이 씩 우는 하얀 치아를 보았다.

와아! 웃음소리가 터지고,

“첫딸 낳을라, 너무 웃지 마라.”

“너무 웃다 입 찢어질라.”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방에 이끌려 들어가 화관과 장옷을 벗기우고 다시 이끌리어 옆집으로 갔다. 신랑의 친구들이 큰 다다미방에 차려놓은 음식상 앞에 앉았다가 일제히 일어섰다. 한 트럭 친구들이 왔다가니까 꽤 많은 수인가 보았다.

축사가 읽혀지고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또 신랑의 직장 동료 되는 분들이 꽤 큰 선물을 하였다.

첫날밤은 나의 애원을 들어주어 처녀로 밝히게 해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튿날 아침을 맞았다. 그러나 내내 내 소원만 고집할 수는 없어 나는 그의 아내가 되고 차차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참말 신실한 사람이었으며 약속을 어기는 일이 없었고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고 필요 없는 말을 않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은 안정되어가고 나의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이 두터워졌다. 지금 내가 특필하고 싶은 한 가지 일은 결혼 초에 밤의 대화 가운데서 그가 제의한 한 가지 일에 대해 내가 동의하고 약속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휴일 이외의 평일에는 나는 직장에 나가 있고 당신은 집에 있게 될 것인데 사람이 생활할 때 항상 유쾌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불쾌한 일도 생길 수 있고 속상할 때도 있을 것이오. 그런데 당신과 내가 아침에 헤어졌다가 저녁 때 만나게 되는데 우리의 밤의 대화 속에 낮에 일어났던 모든 유쾌하지 못했던 이야기는 가져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오. 우리는 항상 피차에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는 이야기로 우리의 사랑을 더 향상시키는 대화를 하기를 원하오. 나는 그것을 당신과 약속하기를 원하오.”

그와 나는 부부로서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살기로 맹세한 약속 위에 밤의 우리의 대화 속에 불쾌한 이야기를 가져오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와 나는 그 약속을 지켰으며 전쟁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나는 그에게 아내로서 정성과 의무를 다하였다.

신행 전 넉 달 반 동안은 즐거운 기간이었다. 달이 밝은 어느 날 밤 우리는 사람의 내왕이 거의 없는 신작로를 걸었다. 간혹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날 뿐이었다. 가로수가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그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걱정이나 근심이 개재(介在)하지 않는 미래였다. 나는 그의 팔에 의지하여 아무 근심걱정이 없었다. 그의 튼튼한 갈색 빛 손안에 나의 하얀 작은 손이 꼭 쥐어져 있어 세상에 아무 불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소나무 그늘과 잔디가 있고 맑은 물이 흐르며 깨끗한 모래가 고운 샘골에 동생을 데리고 셋이서 놀러가기도 했다. D시에 나가서 놀다 오기도 했다.

그는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어머니(숙모님)의 얘기를 잘 들려주었다. 모두 좋은 분들 같고 아무리 층층시하라지만 참 좋은 곳인 듯 어서 가고 싶기까지 했다. 그 얘기를 반증이나 하듯 시아버님 시어머님의 자상스러운 편지를 받고 또 시어머님께서 여름양산을 사주신다고 나오라고 하는 전갈을 받고 나는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역으로 나갔다. 시어머님은 세모시 옥색치마에 올이 고운 노리껴한 안동포 적삼을 입으시고 까만 핸드백을 드셨고 연연한 향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D역에 내리자 곧 미나까이(그곳에서 제일 큰 백화점)로 향했다. 양산부는 2층에 있었다.

“아가, 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라.”

시어머니는 상냥하게 말씀하셨다. 처녀 때 파란 빛 양산을 썼던 나는 이번에는 진분홍빛 양산을 골랐다. 그러자 다시,

“부채도 골라 보아라.”

하셨다. 내가 사양하자,

“아니다. 여름엔 더우니까 부채가 꼭 필요하다. 부채는 세 개를 골라라. 사돈과 내가 하나씩 하고 네가 하나 하게.”

하셨다.

내가 가질 것은 산뜻하고 화려하면서도 조촐하였고 어머님들 것은 수수하고 점잖은 것을 골라 보여드리니 마음에 드신다고 하셔서 두 분 것을 똑같은 것으로 하였다. 다음엔 귀금속부에 가서 반지를 하나 고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사양하였다.

“상답엔 진주 반지 밖에 보내지 않았으니 색깔 있는 보석으로 하나 골라라.”

시어머니의 여러 차례의 말씀에도 나는 끝내 그것만은 사양하였다. 나는 참말 보석이나 패물에 대해 욕심이 없었다. 진주반지는 끼고 있었지만 그것도 남편을 위해(섭섭해 할까봐서) 끼고 있는 것뿐이었다. 시어머니는 빨강 루비 반지를 사고 싶어 하셨으나 그런 것엔 마음이 도무지 가지 않았다.

신행날이 잡혀지고 시집에 가져갈 예물 바느질과 나를 위한 바느질과 다듬이로 여러 날을 어머니와 포자어머니가 수고하고 올케 언니가 친정에서 와서 내 시집갈 바느질과 예단 바느질을 하였다. 어머니의 고종 사촌 언니까지 오셔서 수고하셨다. 올케 언니는 여러 날을 나를 위해 수고하였다.

2. 신행(新行)

음력 9월 중순경 나의 신행 날이 당도했다. 밤에까지 오던 비도 멈추고 날은 맑았다. 나의 아버지는 인력거를 타시고 나를 태울 가마는 마당에 대령되어 있었다. 내가 가마 안의 사람이 되자 어머니는,

“얘야, 몸조심하고…….”

본래 말이 적으신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시고 말았다.

“엄마!”

나도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공중에 붕 뜨는 듯한 기분에 마음까지 언짢아져서 눈물이 왈칵 솟구치려 했다. 그러나 나는 꾹 참았다. 좋은 날에 울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고 친정을 하직할 수 있었다.

시댁 마을 입구에 있는 주막에서 잠깐 쉰 후 가마는 시댁 활짝 열려있는 대문을 통과하여 안방 툇마루에 가마채를 댔다. 가마 문이 활짝 열렸다. 연회색 신사복 차림의 신랑이 환한 미소를 띠고 눈앞에 서있었다. 사랑을 가득 담은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씨 문중의 하인인 월이가 나를 이끌어 안방의 보료 위에 앉혔다.

폐백을 드릴 때 나는 우리 전통적인 절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다. 친정어머니는 딸에게 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학교에서 예법 시간에 배운 방식의 절 밖에 알지 못하였다. 월이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남자들의 절 비슷하게 하는 절이고 여자가 올리는 큰 절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아예 시범을 보였다. 그런데 내겐 그 큰절이 왜 그렇게 힘든 것이었는지……. 내가 있는 방에 누가 들어올 때마다 일어서야만 했는데 참 힘들었다.

잔치가 계속될 동안 사람들이 무시로 들어갔다 나갔다 함으로 첫날 낮에는 안방에 있다가 밤에는 건넌방에서 나를 따라간 하인과 그 방에서 잤다. 건넌방은 우리가 앞으로 거처할 방이었던 것이다. 따라간 하인은 나의 친정 고모님의 이씨 문중의 하인이었는데 60여세 된 분이었다. 정씨 문중의 하인인 월이는 70이나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는데 새파랗게 젊은 아이인 내게 “아씨, 아씨” 하며 존경하고 나는 그들에게 해라고 해야 하니 내 마음은 괴로웠다. 나의 친정은 벌써 개화된 생활을 살고 있다고 할까 하인이 없었다. 누구나 다 동등으로 여기고 자라났는데 결혼을 하니 이렇게 옛날로 돌아가 구세대의 격식을 차려야 하는지…….

하여튼 나의 고모님댁 하인은 이튿날 아침에 내가 일어났을 때 나를 위하여 세숫물을 대령해 주고 내가 낯선 시집에 와서 당황하지 않게끔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할머님과 아버님, 어머님께 문안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최소한 사흘 동안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친정에서 장만해 온 것을 차려 그것을 어른들께 올리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하인이 그 모든 것을 주선하고 도와주고 절할 때도 붙들어 주고 하였다. 그런데 문안 인사를 받으신 할머님과 시부모님께서 이만해도 족하니 고만하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그래서 새벽 문안인사를 드리는 일은 하루로 끝났다.

그런데 나는 머리가 짧아서 겨우 묶으면 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신행 때 올케 언니가 망을 씌우고 해서 쪽쪄 주었던 것이 하룻밤 자고 나자 내 솜씨로는 쪽질 재간이 없었다. 나는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신랑이 방패가 되어 주어서 양머리를 하여도 되게 되었다. 그러나 숙모님은 “쪽찌면 훨씬 나은데…” 하셨다.

10월에 D시에서 박람회가 있어서 온 가족이 박람회 구경을 갔다 왔다. 그리고 또 한 번 시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D시에 가서 외투를 맞춰주셨다. 나는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음식을 먹지 못 하고 시원한 배가 먹고 싶었는데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무를 썰면서 그것이라도 한 조각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친정 생각이 간절했다. 친정엔 엄마가 올해도 무를 움 속에 많이 갈무리해 두셨을 거고 배 맛 같은 물김치가 한 독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더 시원한 것만 먹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무 썰면서 무 한 조각도 입에 넣을 수가 없는 조심스러운 첫 시집을 살던 시절이었다.

음력 동짓달 양력으로는 12월, 아버님께서 동네에서 가장 힘세고 큰 수탉을 사오셨다. 어머님은 그것을 곰하여 권하셨다. 정말 나는 그런 것은 조금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른이 그렇게 권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먹어야만 했다. 억지로 조금 먹은 것 때문에 설사를 하게 되니, “쯧! 쯧! 어째 그리 못 먹노? 도로 살 내리겠다.” 하시며 못마땅해 하셨으나 이제 더 권하지는 않으셨다.

무나물이나 찌개 또는 국을 끓일 때 무를 내다 썰 때면 그게 먹고 싶었다. 타는 듯한 목을 축여줄 것만 같은 시원한 무가 아작아작 씹히는 소리와 함께 내 목을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무를 먹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동치미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짠 김치뿐이었다. 그것도 너무 짜서 조그만 김치 조각 하나로 댓 숟갈의 밥을 너끈히 먹을 수 있을 듯한 짠 김치였다.

한 번은 아버님의 고종사촌인 아직도 미혼인 그이와 동갑인 아주머니가 놀러왔는데 그날 마침 팥죽을 쑤었었는데 저녁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하면서 팥죽을 먹으며 그 김치를 아작아작 짜다 소리도 않고 어찌나 맛있게 잘 먹는지 부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어서 친정에 보내 주시면 시원한 걸 실컷 먹어나 보련만……. 음력 동지 스무 아흐렛날이 근친 날이었다. 그날이 삼추같이 기다려지는데 어느 날 아침 아버님께서,

“아가, 네 근친 날을 열흘 당겨서 열 아흐렛날 가도록 했으니 그리 알라.”

정말 너무 기뻤다. 나는 말은 않았지만 ‘아버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뇌이고 있었다.

음력 동짓달 열 아흐렛날, 그날은 내 초등학교 때 친구가 이 같은 정씨 집안으로 시집 온다고 해서 나를 대반으로 앉아달라고 요청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근친 가는 날이었다. 내가 근친 간 친정에 그 친구가 월이와 함께 한 번 찾아왔었다.

근친 날이 가까워 왔다. 숙모님이랑 종숙모님들 모두 모여서 떡방아를 찧고 떡을 만들고 법석이쎴다. 남자 하인은 그득그득 두 상자의 떡을 겨우 지고 일어서고 여자 하인은 배행으로, 숙부님과 같이 친정으로 향하였다.

친정이 가까워 오자 힘이 났다. 석 달 동안(실상은 만 두 달 동안) 바깥 구경을 못한 내겐 모든 것이 신기했다. 친정의 큰 김칫독에 배맛 같은 동치미가 한참 맛있게 익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무 움이, 그 옆에 좀 작은 배추 뿌리 움, 도착하던 날 나는 당장 동치미 한 사발에 근친 가며 가져간 떡 한 쟁반을 다 먹어치웠다. 입덧 때문에 주렸던 것을 한꺼번에 보충했던 셈이었다. 먹고 싶던 시원한 걸 실컷 먹고 나니 힘이 났다.

어쩜 또 아버지는 올해는 예년보다 더 많이 사과를 사놓으셔서 다다미방에 천정가지 닿도록 사과 궤짝을 쌓아 놓으셨다. 나는 날마다 잘 먹고 잘 잤다. 어머니는 날마다 맛있는 것 해주시고 구해 오시는데 신이 나 하셨고……. 어머니는 S역에 볼일이 있어 가신 김에 배와 귤을 또 잔뜩 사오셨다. S는 배 고장이며 그곳 배는 또한 맛 있기로도 이름 나 있다고 우리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먹고 싶은 것 다 못 먹으면 눈이 짝짝이인 아기를 낳는다.”

어디서 연유된 말인지… 아마 어머니는 이 말을 믿고 계시는가 보았다. 어머니는 옛날에 친정이 넉넉하여 아기마다 친정에 가서 낳으셨고 태중이면 늘 좋은 약에다 애기 낳기 전에나 후에도 더할 수 없이 위함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봄이 되자 포항으로 동래로 가셔서 미역을 많이 사오셨다. 제일 큰 독에 미역이 가득 차고 나서야 미역 사기를 그만 두셨다. 무엇이나 통제되어 있는 시국이어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K에선 미역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말이 적으시고 말없이 사랑을 실천으로 표현하는 분이셨다. 나의 친할아버지께서 생선(무슨 생선이었는지 이름은 기억할 수 없음)이 잡수시고 싶다 하셨을 때 어머니는 포항까지 가셨다. 이 고장에서는 그것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생선을 사가지고 돌아오시다 다른 장사꾼 사람들과 함께 경찰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문초한 경찰은,

“당신 효심이 복 받겠소.”

하고 놓아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해 겨울 할아버지는 그 생선을 잡수시고 기운을 차리실 수 있었다.

어머니는 착착 해산할 날을 위하여 착착 준비하여 나가셨다. 그런데 시댁에서 오란다고 그이가 와서 그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너무 자주 찾아오기도 이쪽저쪽 미안하니까 부모님께 얘기해서 내가 오도록 자기가 종용한 것이었단다.



3. 다시 시댁으로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음력 삼월 삼진 날 친정아버지와 같이 시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햇쑥을 뜯어서 은은한 청자 빛으로 물들인 절편과 인절미, 희고 깨끗한 절편과 인절미, 쑥 인절미의 고물은 거피 녹두, 흰 인절미의 고물은 거피팥… 엄마의 떡 솜씨를 최대한 발휘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소담한 두 상자의 선물을 짐꾼이 지고 시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이제 윤 사월이면 또 와야 할 걸, 괜히 오란다고 좀 언짢아 하셨지만 하는 수 없었다. 시집의 영이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애기는 친정에서 낳기로 되어 있어서 괜히 몸도 무거운데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는 듯이 보였지만…….

그날은 화창한 일기라서 철둑의 푸른 잔디 사이에 노랑 민들레가 웃고 있고 나비가 날고 있었다. 산엔 진달래가 붉었고 마을엔 살구꽃이 길가 집 울타리엔 개나리가 피어 있었다. 모든 것이 즐겁게 보였다.

떡상자를 진 하인이 앞서 들어가고 아버지와 내가 골목길로 들어서니까 시아버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그런데 그 전보다 영 다르셨다. 기르셨던 머리를 초등학교 어린이들처럼 깎으셨고 지팡이를 짚으셨는데 아주 흰 편이셨던 얼굴빛도 좀 검어지셨고 단장을 짚으셨다. 어린애같이 반겨 하시며 아버지를 맞이하셨다.

“아무래도 큰물에 놀던 고기가 다르지.”

숙모님은 사가에서 보낸 떡을 나누는 동안 친정어머님의 솜씨를 이런 말로 평가하시며 먹기조차 아깝다고 들고 보시며 어떻게 요렇게 면경알 같이 고운가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약간 우쭐해진 듯 기뻤다.

집안은 삽시간에 잔치집이 되었다. 비교적 한가한 봄철이라 일족이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이 동네에선 모일 사람은 다 모였다. 사랑에서고 안채에서고 떡을 나누며 즐겁게 담소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게 술렁대기 시작하였다. 그날 친정아버지께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셨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천지가 내리 덮이는 듯한 슬픔에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어 울고 말았다. 내가 사랑에 나갔을 대 시아버님은 시어머님의 무릎에 머리를 얹고 말씀조차 못하고 누워 계셨다. 내 무릎엔 쉴 새 없이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얘야! 이리 오너라.”

쌍창문으로 사이를 낸 다음 방에서 숙부님이 부르셨다. 마루로 나와 그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에도 눈물은 조금도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기만 하였다.

“얘야, 거기 앉아라.”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시고 숙부님은 말씀을 계속하셨다.

“얘야, 네가 한 살, 두 살 먹은 애기도 아니고… 강보에 싸인 아기도 어미를 잃고 사는데… 네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못 살겠느냐? 그만 울어라. 네 몸 상한다. 그리고 형님은 그전부터 신양이 계셔서 오래 못 살 것을 아시고 며느리를 보신거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그저 자식 된 도리로 부모가 무병하게 장수하시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지만 사람의 원대로 안 되는 것은 또 어쩌겠느냐? 마음을 안정시키고 건강을 위해서 음식도 열심히 먹고 네 할 일을 하는 것이 네가 지킬 본분이며 자식 된 도리다. 네 마저 병나 누우면 집안이 어떻게 되겠느냐?”

숙부님의 말씀은 곤경에 빠져 있는 내게 구원의 기별과도 같았다.

무당이 왔다. 그리고 올 때 입고 온 속적삼을 벗어내라 하였다. 내가 올 때 친정 귀신이 붙어왔다는 것이다. 불쌍한 올케 언니, 신행 전에 시누이를 위해 갖은 정성 다 들여 빠짐없이 준비해서 시집보내며 신행 날 아침에 짧은 내 머리에 빨간 댕기 물려서 망을 씌워 용케 쪽찌어 주었던 언니, 내가 시집에 간 후 친정에 돌아가 있다가 내가 친정에 돌아가 있는 동안 비보가 왔었다. 언니는 P철도병원에서 위궤양이라는 병명 아래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언니의 유골을 가지고 돌아오신 그 한밤에 나는 홀로 깜깜한 이불 속에서 눈물을 삼켰다. 언니의 유골은 오빠의 유택에 같이 묻혔다.

선하기만 했던 그 언니의 망령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비단결같이 마음이 고우신 시조모님께서도 그 무당의 말을 믿으시는 데야 얼마나 괴롭고 슬픈 마음이 되었는지…….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이는 무척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내가 모르던 아버님의 병환 얘기를 해주었다.

삼년 전 아버님은 들에 나가셨다 들길에서 넘어지셔서 머슴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오셨다 한다. 중풍(中風)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회복은 되셨지만 “좀 든 나무가 오래 가나…”하고 며느리 보는 일을 서두르셨다는 것이다. 며느리나 보고 손자나 하나 안아 보고 돌아가시는 것이 아버님의 소원이셨고 어머님 역시 그렇게 해드리기를 소원하셨다 한다. 그리고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향학의 꿈을 접고 아버지의 슬픈 소원을 외면할 수가 없어 장가들기로 했노라고……. 그래서 무척 고민도 했고 장가가기 전 밥도 못 먹고 입술까지 부르텄지만 울타리 너머에서 한 번 본 후 그날을 기다리게 되었노라고……. 아버지를 위하여 가려던 장가, 그러나 지금은 만족하고 매일을 살아가지만 이런 일로 당신을 괴롭히니 마음이 아프다고 그이는 말했다. 우리는 그래서 서로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목이 메이면서 잠을 청했다.

한 달 쯤 전이었다. 나와 그이는 시외가 댁의 잔치에 간 일이 있었다. 시어머님의 친정 질녀가 결혼하는 잔치였지만 어머님께서는 못 가실 사정이 있으셔서 우리가 대리로 가야만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님 건강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외가에 오래도록 가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척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큰 외가 작은 외가를 거쳐 시외가로 가기로 했다.

큰 외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작은 외가에 온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우리는 작은 외숙모님의 짭짤한 솜씨로 잘 차려진 상을 물리자 더 얘기할 새도 없이 차 시간이 되었다기에 역에 나왔다. 큰 외삼촌, 작은 외삼촌, 작은 외숙모, 외사촌들까지 전송을 나와 주어서 작은 정거장이 떠들썩하도록 손을 흔들고 우리를 보내 주었다.

시외가가 있는 조그만 역은 외가가 있는 역에서 다음다음 역이었다. 차는 이내 그곳에 도착하였다. 역에 내리가 5리쯤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큰 외가도 역에서 10리 쯤 되는 길이라서 별로 걸어보지 않은 내 발은 벌써 부르트고 있었다. 그런데다 내 신발은 내 발에 꼭 끼이는 신이었다.

고무신 구하기가 정승하기보다 어렵다던 때라 중국서 이모가 보내준 내 시집갈 때 신으라고 준 깨끗한 흰 고무신이 이곳에선 보기 드문 것이라서(여기선 흰 고무신이라고 구해도 누르딩딩하고, 새하얀 고무신이란 참말 없었다.) 시집가던 날만 한 번 신고 다른 신만 신다가 모처럼 큰 외출이라고 신은 것이 화근이었다. 부르튼 발에 꼭 끼이는 고무신을 신었더니 어찌나 아픈지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이의 팔을 붙잡고 발에 될 수 있는 대로 힘을 적게 주려는 데도 아프기는 매일반이었다.

“그만 신 벗고 버선발로 걷구려.”

부끄럽지만 하는 수 없었다. 신을 벗어 들고 달빛이 쏟아지는 신작로를 걸어갔다.

“이제 덜 아프오?”

“…….”

나는 부끄러워 고개만 끄덕이며 그이의 어깨에 뺨을 댔다.

“발병 나는 것보다야 그게 낫지.”

이 말을 하며 그이는 싱그레 웃었다.

시외가에선 열여섯 살 난 시집갈 아가씨가 치마를 폭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콩잎을 잘게 썰어 콜가루를 넣어 콩나물과 함께 묻혔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으나 맛이 있었고 비빔밥도 참 맛이 있었다. 손님은 많고 방은 비좁아 늘 제일 구석 자리인 장롱이 얹힌 실겅 밑에 앉아 배기고 나니 어깨랑 허리가 아파오기 새작했다. 이틀째 밤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거처하시는 방에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서 잔치에 와서 큰 고생 한다고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외숙모, 친정 잔치에 오신 이모님들까지 염려해 주셨다.

그 밤을 편히 자고 조반이 끝나자 곧 떠나겠다는 우리에게 오늘 떡 하는 날인데 그거나 먹고 가라고 만류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장에 나가는 몸이 그렇게 여러 날 머물 수 없노라고 사양하고 떠나오니 외할머니까지 한참을 따라오셨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를 지켜보시며 손수건으로 눈에 눈물을 찍어내고 계셨다.

강가에 왔을 때 우리는 발을 씻었다. 물이 먹고 싶어서 외가에서 주신 연뿌리를 꺼내 씹어 보았다. 조선연이라서 꽤 달큼한 게 먹을만 하였다.

우리가 이번 여행길을 떠나며 K역에서 아버님을 뵈었을 때 내가 근친 오기 전과는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았다.

“팔이 좀 아파서 D시에 침 맞으러 간다.”

말씀하셨고, 우리는 D역에서 아버님과 헤어져 외가로 가는 차를 탔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 강가에서의 그이와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 나의 질문에 그이는 별로 큰 일이 아닌 양 대답하였고 나도 그렇게 알았던 것이다.

매일 의원이 드나들었다. 늘 누워만 계시고 말씀 한 마디 못하시던 아버님께서는 차차 조금씩 회복되어 가셨다. 친정에서 빌려 온 민간요법이라는 책에서 뜸뜨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워낙 뜨겁다고 못 참아 하시기 때문에 곧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윤 4월(음력) 내가 다시 출산을 위해 친정에 가게 된 때쯤엔 벌서 지팡이를 짚으시기는 했지만 집안을 걸어 다니시게끔 되셨다. 온 가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 첫 아기의 출생

친정에 돌아와서 출산을 기다리는 날들이 흘러갔다. 어머니는 아기를 업을 명주 처네 누비포대기까지 맞춰다 놓으셨다. 물자가 귀한 시절이었는지라 집에서 내게 빠지지 않는 물감을 들이게 하여 다듬이질하여 솜도 어머니가 좋은 솜을 가지고 가셔서 맞춘 포대기여서 미리 겨울에도 아기가 춥지 않게 마음먹고 정성껏 처음 맞이하는 손자를 위한 선물을 마련하신 것이었다.

아기의 요, 배게, 옷, 기저귀, 탈지면 등등 모든 것을 보에 싸서 얹어 두었다. 어머니가 되는 기쁨과 두려움의 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산파가 몇 번인가 왔다 갔다. 예정일보다 좀 늦어지겠다고 했다.

양력 7월도 중순에 접어들도록 아기는 기척도 없고 날씨는 쨍쨍 가물었다. 어떤 가뭄에도 먹는다는 시댁의 일등 호답(好畓)도 모내기를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어느 날 그이가 햇사과를 한 보따리 가지고 왔다. 작은 댁 것이라 했다. 애동 나무에서 따온 사과라 굵기는 했으나 좀 신 맛이 있었다. 그래도 싱싱한 맛으로 모두가 잘 먹었다. 어머니는 출산을 위하여 준비해 두셨던 벼도 찧어놓으시고 이제나저제나 하고 매일 기다리고만 계셨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그 날 아침,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외사촌이 방학 동안 자기 집에 돌아가게 되어 그의 짐을 챙겨주려고 하니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하던 일을 멈추었다가는 또 하고, 또 하고 마침내 외사촌의 짐을 다 챙겨주고 나니 차츰 순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산파가 오고 나는 내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전 11시 경이었다.

진통의 괴로움 속에서도,

“아픔을 못 견디어 뒹굴고 하다가 아기를 다치게 한 엄마도 있었단다.”

어른들의 하시던 이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 살아있었다.

“뒷심이 있어야 아기를 무사히 낳을 수 있다.”

하고 나이 많은 산파가 엄마한테서 받은 마실 것을 주었을 때도 두 말 않고 받아 마셨다.

‘이제 나는 가는구나.’

이런 순간이 수십 번, 마침내 우렁찬 고고의 소리! 오후 3시 50분이었다.

“아유! 고추구려. 이렇게 머리가 크니 엄마가 수고할 밖에…….”

산파의 신이 나 하는 소리에,

“…….”

말씀은 들리지 않아도 어머니의 인자한 웃음이 눈에 선했다.

“애기 같은 엄마라서 걱정했더니 더 얌전하게 잘만 낳는구먼! 애기가 나자마자 만백성이 바라던 비가 오네! 이 아기는 축복 받은 아기입니다.”

기독교인인 산파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아기의 고고의 소리와 때를 같이하여 복된 단비가 힘차게 쏟아졌다. 시원한 빗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포근한 잠속으로 떨어져 들어갔다.

이튿날, 모내기를 하는 바쁜 중에도 시어머님께서 달려오셨다. 시어머님의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출산 후 그이를 처음 보았을 때 반가움보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며 내 마음 속에,

‘나는 이제 아기를 안 낳을래.’

이런 말이 언뜻 지나갔다. 그리고 소름이 쫙 끼쳤다. 그러나 아가는 귀여웠다. 날마다 목욕을 시켜주면 기지개를 켜며 잘 잤다. 그리고 무럭무럭 잘 자랐다.

며칠 만엔가 아버지께서 들여다보시고,

“그놈 참 의젓하구나.”

하시며 만족해 하셨다. 살결이 붉은, 높은 머리가 잡아 늘인 것처럼 이상한 아기의 어디가 잘 생기고 의젓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도 예쁘게 보이는 데가 없었다. 남의 아이 같으면 아마 못 생겼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아기의 외모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6살짜리 내 동생은 이레 동안을 줄곧 밖에 나가지를 않았다. 파리가 온다고 낮에 모기장을 쳤는데 그 속에서 꿈쩍도 않고 아기만 들여다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 있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더운데 밖에 나가 놀아라.”

하셔도 이레 동안을 그냥 견디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밖에 나갔다 싶더니 한참 있다가 창분 밖에서 꼬마들의 소리가 들렸다. 한 얼굴이 쑥 올라왔다.

“이렇게 굴뚝에 올라서면 잘 보인다. 오늘은 모기장을 안 쳐서 잘 보인다. 아기가 누나 옆에서 자고 있어.”

막내 동생이었다. 그 얼굴이 사라지더니 다른 얼굴이, 다음 또 다른 얼굴이… 댓 명의 어린이들이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교대로 들여다보고 내려갔다. 동생의 자랑스런 음성이 커다랗게 들려왔다.

“우리 아기 참 예쁘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아기는 눈에 보이게 희어져갔다. 붉은 빛은 차차 가시고 매끄럽고 고운 피부는 참 예뻤다.

초이렛날, 아기의 증조할머님께서 아기를 보러 오셨다.

“온 도랑물 헐어놓은 것 같구나. 내가 손부 볼 때는 꼭 다른 것 선 보지 말고 젖 보고 정할라 했더니 원대로 됐구나.”

아기 젖 먹는 시간이 되어서 아기가 젖 빠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는 좋아하셨다.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도 모두 젖이 적어서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요. 까짓 거 어른 고생하는 건 둘째 치고 애기가 젖이 먹고 싶어 고개를 내두를 땐 가슴이 타는 것 같았지요. 정말 어떤 때는 남 먹는 것 다 먹고 왜 남과 같이 젖은 못 내 먹이나? 하고 욕이 다 나올 마음이었지요.”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셨다. 이젠 막내 동생 뿐 아니라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들까지 학교 갔다 돌아오면 아기를 들여다보는데 여념이 없었고 서로 손이나 발을 만져보려고 다투었다.

“참말 꼭 서양아이 같지?”

한참 들여다보던 한 동생이 말하자 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살결은 하얗고 머리는 노랗고 말야.”

정말 아기의 머리카락은 황금빛 명주실 같았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머리칼이 노란 갓난아기는 건강한 체질을 타고 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

물론 서양 아기를 두고 한 말씀은 아니었을 게다.

아기의 친 할아버님께서 항렬자(行列字)를 보내셨다. 공경할 흠(欽)자였다. 아버님은 아기의 외할아버지에게 당신의 귀한 첫 손자의 작명을 부탁하심으로 사돈을 예우(禮遇)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옥편을 내어놓고 깊이 생각하시며 아기의 이름을 지으실 때 나에게도 의견을 물으셨다.

때는 1944년 7월이었다. 우리 강토의 백성들은 자유를 잃고 일용할 양식도 구해오기가 힘든 생애를 살고 있었다. 비록 나의 어머니가 먼 곳에 가서 미역을 구해오시고 친척이 있는 농촌에 가서 벼를 구해 두었다가 갓 찧은 쌀로 딸을 위한 해산바라지를 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머니가 해산하실 때 위함을 받으신 대로 딸에게도 그렇게 해주시고자 했던 지극한 사랑과 정성 때문이었지 일상생활에서는 가족이 콩깨묵과 옥수수를 섞은 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은빛같

이 닦아 제사가 끝난 그 이튿날 부엌에 씻어놓는 그 놋그릇이, 그 모든 제기가 놋그릇을 공출(供出)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했던 이 집을 갑자기 습격한 단속 직원에 의해 몽땅 잃어진바 되었다. 젊은이들은 징병령(徵兵令)에 의해 전쟁터에, 조금 더 연상인 젊은이들(가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은 보국대로 징용되어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가 문(文)을 지나치게 숭상하고 무(武)를 괄시(恝視)했기 때문에 망국(亡國)의 설움을 안게 되었다. 이것을 설원(雪寃)하는 길은 오직 우리도 문약(文弱)에 흐르지 말고 무(武)도 숭상(崇尙)하여 실력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겉모습이 선비이셨지 무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 깊고 깊은 곳에 우리나라의 독립의 날을 염원하시는 뿌리 깊은 애국의 얼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그 깊은 염원을 담아 외손자의 이름을 무흠(武欽)이라고 지으셨다.

어언간 일곱 이렛날(상후 49일 째 날)도 내일로 다가왔다. 칠칠일은 아기의 집에 가서 지나야 된다는 시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사십팔일 째 되던 날 아침에 친정어머니는 아기를 업고 일하는 아이는 보퉁이를 이고 시집으로 향하였다. 날씨는 어제 왔던 비로 먼지 하나 일지 않는 상쾌한 일기였다.

시댁에선 벌써 아기를 맞이하기 위한 만단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집안의 어른들이 다 와계셨다. 사랑으로 안으로 경사 기분으로 온 집안이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아버님도 이제 건강이 많이 회복되셔서 아기를 보고 기뻐하시는 광경은 눈물을 핑 돌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부터가 내겐 고역이었다. 구수한 갖 찧은 쌀밥과 미역국에 자극성이 별로 없는 좋은 찬만 먹던 입에 갑자기 보리밥에 매운 김치와 파조리게는 정말 힘들었다. 친정에서는 어머니께서 미역국도 날마다 넣는 재료를 갈아가며 국 맛이 다르도록 끓이며 오직 일심 정성를 다하셨는데 이젠 그 흔한 미역국이나 입에 맞는 찬은 고사하고 밥도 왕모래같이 껄끄러우니……. 그러나 편찮은 아버님도 노란 배급 쌀에 겨우 암(暗)상인에게서 구한 조기나 구워서 드리기가 고작이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 계제가 못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젖은 아기가 먹고도 남았다.

출산 이후 문밖 출입도 별로 않다가 갑자기 무거운 것도 들어야 하고 일도 심하게 하여야 하니 친정 생각도 났다. 제일 참기 어려웠던 것은 염치없는 잠이 오는 것이었다. 방아를 찧다 아기 젖 먹이러 방에 들어갔을 땐 정말 아무리 눈을 벌려 뜨려고 해도 눈꺼풀이 붙어버려,

‘아아, 누가 나 한 시간만 자라고 허락해 준다면 세상에 다시 바랄게 없겠다.’

하며 눈물겨워졌다.

밤이면 언제나 그이는,

“여보, 미안하오. 얼마나 고되오.”

하며 위로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아니, 당신이야 말로…….”

하며 가슴이 메이었다.

하고 싶은 공부도 더 못하고 남이 부모 슬하에서 호강하는 나이에 벌써 이 큰 가사를 다 맡아 혼자 걱정해야 하니 애처로웠다.

‘내가 돈이 있다면 아무 구애도 받지 않고 공부나 하며 젊음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해드릴 텐데…….’

나는 요즘 그이를 향할 때마다 가슴이 꽉 메어 올랐다. 아버지의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이루어 드리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는 그였다.

작년 봄 이후 아버님은 어린 애같이 되셨다.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원래 부잣집 귀한 아들로 자라나셔서 또 부모님 유산으로 이제까지 아무 부러운 것 없이 살아 오셔서 세상 물정에 어두우시고 어린 아이같이 단순하시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중년이 되시도록 자신의 힘으로 무엇 하나 생산하신 일이 없으신 호강스러운 말하자면 팔자 좋으신(?) 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편찮으시니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마음대로 안 이루어지시면 어린 아기같이 마음 상하시는 것이었다. 생산이 없어 수십 년을 호화롭게만 사셨으니 이젠 살림도 거지반 바닥이 났고 믿을 곳은 이젠 큰 아들 밖에 없었다.

작년 음력 3월부터 이제까지 줄곧 침이다, 약이다, 온갖 원하시는 것은 다 했으니 말 없는 아들의 마음엔들 오죽 큰 근심이 있지 않으리. 그러나 그는 잘 참고 의젓이 가정을 다스려 나갔고 모든 가족이 의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 믿음직한 존재였다.

5. 아기의 백일잔치

아기의 백일이 다가왔다. 내일이면 백일인데 어머님은 미역을 한 오리 사야 한다고 장터로 가셨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어서 어머님은 키만 하나 사가지고 돌아오셨다. 할머님께서,

“웬 키냐? 미역 사러 간다더니…”

의아해하시자,

“아무리 온 장바닥을 헤매야 미역이 있어야지요. 할 수 없이 키나 사왔지요.”

“키가 다 낡아서 새 것 하고 바꿔야 하겠지만… 그거야 잘 샀다만 애기 백일에 미역국도 못 끓이고 어쩌노?”

할머님은 퍽 섭섭해 하셨다.

돈으로 못 구하는 것도 쌀이면 구했다. 그래서 오늘 어머님은 이젠 가을이라 갓 찧은 햅쌀 한 말을 이고 일찌감치 장으로 가셨던 것이다.

무국을 끓이고 백설기를 찌고 밥만은 찰밥으로 백날 아침을 친척들도 모여서 보냈다. 아기 외할머니가 꼭 오셔야 된다고 아들 편에 어제부터 기별했건만 안 오셨다고 몹시 섭섭해 하시던 어머님, 그런나 10시가 다 되어 아기 외할머니(친정어머니)는 미역을 들고 오셨다. 어머님은,

“아유! 사돈이 안 오셔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웬 미역은 또… 아침엔 미역국도 못 끓이고 무국으로 백일 잔치를 했는데…….”

하시며 반가워하셨다.

낮에는 정말 미역국 끓이고 백일잔치가 벌어졌다. 방마다 웃음소리, 아기가 이 집에선 꽃이었다. 모두가 다 어린 아기가 없는 집안이라 서로 안아보려고 애썼다. 벙글벙글 울지를 잘 않는 아기를 누구나 좋아했다.

할머님께선,

"누구를 닮아 이렇게 천심인고 애비를 닮아 천심이 아니겠는가? 애미를 닮아 천심이 아니겠는가? 애비, 애미, 다 앎아 천심이지."

둥게둥게를 하시며 노래 가락으로 부르셨다.


2장

1. 길쌈 배우기

봄엔 누에 쳐서 명주 길쌈, 여름엔 삼베 길쌈, 가을부터 겨울까지 무명베 길쌈, 사철을 통해 언제나 한가한 때가 없는 부녀자들이었다. 밭에서 쳐온 삼을 익혀서 벗겨야 하고 삼 대 (삼의 줄기, 마경 (麻莖)) 는 단으로 묶어서 잘 말렸다가 집 지을 대 벽살 엮는데 쓰도록 두며 벗긴 삼 껍질은 집안의 부녀자 들이 둘러앉아서 잘게 찢는다. 볕에 자꾸만 바래서 빛을 내고 물에 축여 두었다가 양 끝을 톺아가며 삼아 나간다(이어 나간다).

처음엔 무릎을 척 걷어붙이고 하는 삼 삼기가 부끄럽고 못할 것 같더니 옷 위에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따라 하니 조금씩 익어갔다(일솜씨가 늘어갔다). 바지를 걷고 알살에서 삼으니 살에 발갛게 피가 맺혔다. 그러나 옷 위에서 삼는 것 보다는 훨씬 능률적이었다.

“여자가 되가지고 길쌈도 못하는 것도 여잔가?”

시동생의 핀잔이 아니라도 농가에 시집 온 이상 이곳에 순응해야 한다고 느꼈고 그대로 실천해 보기로 마음에 작정을 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어머님께서 들에 나가신 틈을 타서 아랫채의 마룻방에 차려놓은 베틀 위에 앉아 보았다. 어머님께서 베를 짜실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터라 말굴레를 차고 신을 신고 북을 쥐고 차례차례로 행장(?)을 갖추고 한 발을 뒤쪽으로 확 밀어냈다. 신나무가 뒤로 물러서면서 바디에 꿰인 날들이 입을 쩍 벌리었다. 오른손에 잡았던 북을 벌려진 입속으로 확 밀어 넣으며 왼손으로 받았다. 발을 앞으로 확 당겼다. 신나무가 구부정 절을 하며 따라왔다.

밀었다 당겼다 하는 발의 운동과 함께 북은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드나들었다. 빠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꽤 해 볼만 하였다. 한 뼘 또 한 뼘, 꽤 재미가 났다. 그런데 재미에 끌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말았다. 허리가 차츰 뻐근하게 아프기 시작하였다. 아기를 가졌을(임신) 때부터 줄곧 아프던 허리가 아기를 틀면서(진통)도 배보다 허리가 더 아프더니 지금도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 허리 아파!’

마음속으로 되뇌며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허리를 잡았을 때다.

“아니, 당신 편찮으려고 그러오? 그런 건 배워 뭐하려고 그러오?”

언제 돌아왔는지 그이가 가방을 든 체 마루방 문 앞에 서 있지 않은가!

“아이 참 오신 줄도 모르고…….”

나는 부끄러워서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괜히 당신 허리 아프다고나 하지 말아요.”

정말 그이는 성난 얼굴이었다.

나는 얼른 말굴레를 벗어버리고 고개를 숙인 체 마룻방에서 나와 버렸다. 그 후 다시 베틀에 앉아 보지는 못했다.

“삼베는 무명베보다 얼마나 짜기가 힘이 드는데 첫 솜씨에 삼베는 못 짠다.”

아들한테서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참말 물거품 같은 몸 이라고 어머님께 걱정을 들을 만큼 단련되지 못한 몸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자주 몸살이 나서 않아 누워 놓니 처음엔 상냥하시던 어머님도 학생 며느리 퇴냈다고 고개를 흔드시게끔 되셨다. 마음은 무엇이나 순종하고 좋은 며느리가 되고자 원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떤 땐 정말 비관이 되었다.

‘아아, 왜 우리 부모님이 나를 공부를 시키는 대신 일을 좀 가르쳐 주시지 않았던 고!’

나는 친정어머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앓아누워서 바깥 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 노하셨나봐.’

그리고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 눈물을 그이한테는 보일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면 기쁜 얼굴로 그이를 맞아야 했다.

앓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늘 기가 죽어,

“우리 젊은이는 등신이다.”

어머님은 나를 바보로만 알고 계시는 듯 했다.

우리 아기가 아니었던들 나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였는지 모른다. 아기가 귀여우니까 그래도 웃는 얼굴로 대해 주시는 듯 했다. 그런 바보같은 나를 할머님은 늘 감싸 주려 하셨다.

한 번은 내가 밥을 푸다 보니까 밥이 너무 많았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난 창문을 여시고 방으로 밥을 받아 들이시던 할머니는,

“얘야, 밥을 많이 했구나. 네 애미 보면 야단 난다. 뒤 찬장 안에 한 그릇 갖다 두어라.”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분부대로 한 그릇을 뒷 찬장 안에 갖다 두었는데 그날 따라 어머님께서 뒤 찬장을 여셨다.

“웬 밥을 여기 갖다 두었나?”

“…….”

말문이 얼른 열리지 않던 나,

"밥이 좀 많은 것 같아서 내가 갖다 두라고 했다."

얼른 할머님께서 말씀하셔서 나는 겨우 살아났다.

시집 와서 처음 얼 마 동안 나는 밥을 지을 줄 몰라서 혼이 났다. 질다고 꾸중 들으면 된 밥이 되고, 밥이 되다고 하시면 또 질어지고… 도무지 학교에서 물을 되어서 냄비에 조금씩만 해보던 솜씨라 큰 서 말치 솥에다 밥을 앉힐려니 구름을 잡으려는 것 같았다.

며칠 그런 밥이 계속되어 놓으니 어머님의 꾸중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아니, 하루아침 해보면 그걸 요량 못해서… 어제 아침에 질었으면 어제 아침보다 물 조금만 덜 부으면 되잖아. 밥이란 건 알맞게 너불너불 잘 퍼져야 맛도 있고 늘기도 한다. 진밥이고 된 밥이고 맛없을 뿐만 아니라 오그라지기도 한다. 여자가 밥도 할 줄 모른다 해서야 어디다 쓰노? 아무리 호강스럽게 자랐다지만…….”

“어머니, 오늘 아침만 참으시고 잡수세요. 앞으로 배우면 잘 하겠지요.”

“아니, 벌써 며칠 짼고? 그래 너는 그래도 애미 말할 땐 잠잫고나 있지. 벌써 제 아내 편들려고… 날마다 밥 잘 못 하는데 잘 못한다 소리도 못하고 입 닫고 있으란 말인가!”

아들의 한 마디에 더욱 격앙되어 가는 듯한 어머님 음성, 그날 저녁 나는 조용히 그이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밥도 지을 줄 모르는 게 시집을 와서……. 이젠 조심해서 잘 짓도록 더 노력하겠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제 밥 솜씨가 늘 동안 제 편이 되어 주셔야 해요. 오늘 아침처럼 그렇게 어머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말씀을 하면 난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요.”

그이는 어리둥절해서 어떻게 해야 도와 주는 것이 되는가 물어왔다.

“이젠 밥이 잘 못 되었을 땐 당신이 먼저 꾸중을 해주세요.”

나의 대답에 그이는 빙그레 웃었다.

정말 갖은 정성을 다 들였는데도 밥은 또 질컥하였다. 두려운 마음으로 솥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밥을 헤쳤을 때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날 아침엔,

“아니, 참 어머니한테 그만큼 주의를 듣고도 또 밥이 이렇담.”

그이의 불쾌한 목소리에,

“다음부턴 잘 하겠지. 본래 조심하면 더 안 되느니라.”

오히려 부드럽게 타이르신 건 어머님이셨다.

그날 밤 그이의 품 안에서 행복하였다.

2. 가을과 겨울철에 일어난 이야기들

가을도 깊어지고 마당의 감나무에 노을빛으로 탐스럽던 감들도 다 거두어지고, 발갛게 익어 크고 큰 광주리마다 그득그득 말리던 고추도 포대에 차곡차곡 갈무리 되고, 따온 대로 말리고 들여놓고 했던 목화를 저녁이면 방에 앉아 가리며 겨울 옷감 준비가 시작되었다. 김장도 끝나고 긴긴 겨울밤의 길쌈에 밤은 깊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면 온 식구가 안방 할머니 옆에서 담소한다. 그럴 땐 숙부님께서도 오실 때가 많았다. 가끔 숙모님도 오실 때가 있고 당숙이나 당숙모님이나 그 밖에 집안 어른들이 함께 하시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으례 어머님은 목화를 고르는 일을 하셨다. 어머님과 내가 그것을 고르면 으례 놀러 오신 분들도 여자분이면 거들어 주어 능률이 올랐다.

밤이 이슥하면 문안인사를 드리고 우리 방에 오는데 그때까지도 아기는 건넌방인 우리 방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초저녁에 잠이 들면 열두시 전엔 잠이 깨는 일이 없는 아기였기 때문에 친정에서 한 번은 그이가 음악회 표를 가지고 왔기에 같이 갔다 온 일도 있었다. 11시가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도 그냥 색색 자고 있던 귀여운 아가, 이젠 배밀이도 할 줄 알고 하기 때문에 눈 떠 있는 동안에는 혼자 두기가 위험하다. 우리가 우리 방에 돌아오고 나서도 안방에서는 물레질 소리가 들린다. 밤이 이슥하도록 물레질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나는 내 방에 돌아와선 바느질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바느질을 하다가도 잠자기 직전엔 반드시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시집 온 첫 해엔 그렇게 잠자리를 보아놓고도 곧 잠자리에 들지 않고 책을 펴드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이였으나,

“책을 읽던 습관이 있어서 하루라도 글과 대하지 않고는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들일 수가 없어요.”

하는 나의 애원에 나를 이해해주고 그이도 저녁마다 공부를 하게 되었다.

결혼 당초의 약속대로 밤의 우리의 대화는 즐겁고 우리 서로의 도움이 되는 것으로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쾌한 화제가 나올 수 없었고 우리는 서로 배워주고 배우는 부부였다. 서로 존경하고 이해하며 충고를 잘 받아들이고 향상하려 애쓰며 서적에서 대화에서 마음에 양식을 구했다.

사랑채 쪽의 마룻방에는 할아버님이 읽으셨을 한서들이 있었고 꾸러미로 꿰어져 있는 엽전들이 궤짝에 있었고 일어로 된 책들도 있었다. 나는 그 책들 가운데서 일어로 된 한 신기한 책을 발견했고 또 국한문이 섞인 세기의 고민이란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 대정 13년에 찍었다고(복사) 해놓은 바위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기도하고 있는 한 사람의 그림을 발견했다. 나는 그 두 책과 그 그림을 내 방으로 가지고 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들을 내 방으로 가져왔던 나의 심경을 다 이해하기 어렵다. 두 책을 가져온 것은 워낙 책을 좋아하니 어떤 책인지 읽어보고 싶어 가져왔으리라 곧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그림은 나와는 이제까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나는 예수님이라는 분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속에 있는 분이 왜 그런 모습으로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그림을 내 방 남쪽 창문 위에 액자에 넣어 걸어놓았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나와 함께 그 방의 주인이었던 그이가 나의 그런 처사에 일언의 이의(異意)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부모님이나 할머님이나 그 다른 아무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가져온 두 책 중에서 특히 일어로 된 “창세 시대와 부조의 생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아주 무겁고 큰 책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저녁마다 조금씩 읽었다. 그 책 속에는 그림들도 꽤 여러 장 있어서 참으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신선한 스릴도 있었다. 그 책은 이제까지 내가 접했던 여러 책들과는 전혀 다른 책이었다. 여호와라는 말이 거듭거듭 나왔다.

아들이 차차 자라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읽었던 여러 양서에서 가려낸 이야기들로 어린 아들의 꿈을 키워주는 엄마가 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책들을 시간 나는 대로 부지런히 읽었다. 20 여년 후에 동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는데 그도 초등학생 시절에 누나 집에 놀러와서 그 책을 읽었다고 했다.

나는 그 큰 책을 미국 오기 전까지 가지고 있다가 동생 집에 두고 왔는데 동생이 대학교에 기증했다고 했다. 내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된 후에 그 그림이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의 장면임을 알았다. 나는 그 그림을 이사 가는 곳마다 가지고 다녔고 미국에까지 갖고 왔었다.

참으로 신비로운 사실이다. 내가 그 그림과 책을 발견했을 당시는 기독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유교 사상이 철두철미한 집안의 딸로서 똑같은 집안의 며느리로 시집을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려진 목화는 빼액! 빼액! 소리를 내는 쐐기에서 앗았다(앗다: 목화의 씨를 빼다). 아무리 비누를 먹여 줘도(비누를 칠해줘도) 조금 덜하다가는 또 빼액, 빼액! 소리를 지르는 쐐기였다.

앗아진 목화는 서리가 많이 내리는 자욱한 아침에 뜰의 깨끗한 곳에 깔아 두었다가 알맞게 녹으면(습기를 머금으면) 활로 탄다. 탕, 탕, 탕, 탕, 활줄에 타여진 목화가 하얀 구름 같은 솜이 되어 쌓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다. 구름 같은 솜을 매끄러운 인조견 보자기에 싸 두었다가 고치(물레로 실을 자르려고 솜을 고칫대에 말아 뺀 솜 대롱) 수숫대 말아내는데 물레질 할 때 고치를 담는 연륜의 역사로 그윽한 정을 자아내는 작은 나무 상자를 뒤집어놓고 그 위에서 고치를 마는데 참말 재미있었다. 가는 가래떡, 그러나 양 끝은 얄팍한 가래떡, 길이는 약 2.5 센티미터 쯤 될까? 고치를 말아내면 할머니는 미리 알맞은 길이로 깨끗하게 다듬고 끊어놓은 짚으로 살짝살짝 묶어서 상자에 담으신다. 이렇게 상자마다 차곡차곡 담겨진 고치는 벽장 속에 간수되고 물레에서 실로 자아낸다. 그것을 가지고 어머님은 그 알통이 불끈불끈 일어나는 힘센 팔로 절거덕 절거덕 짜져서 집안사람들의 옷감을 마련하신다.

물자가 너무 귀하던 때라 양말 한 켤레 사기도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사려고 해도 도무지 없었으니 그래서 내의나 양말은 집에서 짜서 입고 신어야만 했다. 헌 양말 목 쪽을 풀어서 목화실과 섞어서 양말을 떴더니 목화 실만 가지고 뜬 것보다 훨씬 더러움을 덜 타고 좋았다. 나는 틈나는 대로 뜨개질을 하여야 하였다. 그래서 집안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시어머니 며늘 낳는다더니 명절도 모르고 일하느냐?”

하시며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씀을 하셨다.

시간이 아까웠다. 늘 일하던 손이 잠시라도 놀고 있으면 허전하였다. 바느질이나 뜨개질은 아무리 하여도 재미났다. 다만 바깥에서 하는 일은 자신도 없고 힘들었고 병도 잘 났다.

3. 빨래와 다듬이와 방아

겨울 동안에 제일 어려운 일은 빨래였다. 비누 구하기가 몹시 힘든 때라 언제나 빨래를 하려면 잿물부터 우려내야 했다. 짚을 때서 물을 한 솥 덥혀 놓고 그 뜨끈한 재를 받힐 시루에 담고 그 속에 가을 내내 때어서 헌 구유 안에 모아 두었던 깍지 재[ (콩, 팥 따위의) 알갱이를 꼬투리(콩깍지)를 땐 재]를 한 바가지 섞어 자배기(넓고 큰 옹기 그릇) 위에 걸쳐둔 쳇다리 위에 얹어놓고 솥의 따뜻한 물을 붓는다. 물은 천천히 조금씩 자배기에 흘러내린다. 발그레하고 미끄러운 그 잿물의 맏물은 빨래 삶을 때 쓰기 위하여 때서 두고 훗물은 받아서 빨래를 문지른다. 무명 빨래가 많던 때라 그래도 그런대로 됐지만 명주나 모직 옷은 비누가 있어야만 했고 재물로는 아무래도 안 가는 대도 있었다. 그런데 도랑 빨래터에서 구정물을 다 뺀 후에 정말 살짝 한 번만 칠해서 손으로 비볐다. 말이라 쉽지 사방 아무것도 가려진 게 없는 도랑 빨래터에서 북풍이 몰아치는데 옥양목 저고리 도련이나 소매 끝을 비빌 때 손끝은 침으로 쑤시는 듯 아리고 깐깐하게 잘 가지 않는 때는 눈물을 자아냈다. 손이 시려서 짤 수조차 없는 무명 홋이불, 두루마기, 바지 저고리, 치마저고리 바지 속옷 고쟁이, 버선, 모두가 다 어쩌자고 흰 옷뿐이었다. 부피는 어떻게나 거의 모두가 큰지 매일 자질한 빨래는 해치우는데도 큰 빨래가 닥칠 때마다 짐으로 져야 할 정도로 많았다. 그것들을 삶아 씻으면 언제나 하루해가 가버린다. 이튿날 말려서 또 다음날 재물을 내서 말리면 배꽃같이 깨끗해진다. 하루 풀 먹여 다듬이질 하고 매일 바느질이 계속되고 바지저고리 치마 저고리 등등으로 모양을 이루고 나면 다 다려서 장롱 안에 넣어지고 그러고 나면 또 다음 큰 빨래 할 날 이 다가오고…….

아기 옷도 지금처럼 가지 각 색 실로 뜬 옷이란 구경 할 수도 없었던 때라 솜 놓은 저고리를 입혀야 했다.

내가 자라날 때 어머니께 다듬이질을 배우겠다니까,

"그런 것은 안 배워도 된다." 하시더니, 다듬이 질 못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모른다.

시집 온지 한 열흘 후이던가? 어느 날 시어머님께서 다듬이를 하라고 분부하시고 외출을 하셨다. 시아버님 바지저고리였다. 그날이 무슨 날이었는지 할머님은 집에 안 계셨다. 혼자 종 일 이를 악물로 두들겼으나 아무리 들쳐봐야 광이 나지 않았다. 내 팔은 아파 감각조차 무디어 가는데 아직도 새 토주(新吐紬 토주는 바탕이 두껍고 누르스름한 명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저녁밥을 지으러 일어설 때까지 두들겼다. 마침내 마비된듯한 팔로 겨우 저녁을 지어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팔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어떻다고 형용할 수 없는 통증에 엄마한테 모질다는 소리 듣던 나도 견디지를 못하였다. 일어나 앉아 만져보았으나 아픔은 더할 뿐이었다. 혹시 그이가 깰까 두려워 밖으로 나갔다. 샘가를 왔다 갔다 해보았으나 펄펄 뛸듯한 아픔은 조금도 가시지가 않는다.

마침내,

"여보! 여보!"

소리를 죽여 부르는 그이의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어디가 아프오? 응?"

"팔이 아파 못 견디겠어요."

그이는 울상이 되어 팔을 쥐고 있는 내 손을 떼더니 자기 손으로 문질러보려고 손을 대었다.

"앗!"

내 비명에 펄쩍 손을 떼며,

"갑자기 왜 그래요? 응? 얘기 해봐요? 응?"

다급해 하였다.

"다듬이질을 했더니……."

끝내지도 못해놓고 이렇게 아프다니 나는 부끄러워서 모기 소리로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면 그만 둘 일이지. 뭣땜에 바보같이 참고 하느냔 말요!"

나는 그이의 큰 소리에 부끄럽고 겁이 나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대청으로 난 문이 쿵쾅! 열리는 소리가 나고 분노(?)를 삭이지 못해 문을 차며 큰 대(大) 자로 벌렁 누워버린 그이의 모습이 달빛에 어려 보였다.

"바보! 아프면 그만 둘 일이지!"

결국 할머님께서 건너오시고 할머니의 약손에 주물리어 낫기는 했지만 두고두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후론 다듬이 소리를 내면,

"여보 내가 좀 두드려 줄께."

하곤 하였다.

방아 찧기로 인하여도 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어 머님께서 벼를 찧는 일을 시작하셨다. 나와 진석이는 방아를 찧고 어머니는 호박을 지키며 썰어넣고 켜질하는 일을 하셨다. 그 날 벼 한 가마니를 다 찧었는데 그 날 밤에 먼저 다듬이 때문에 겪었던 일을 다시 연출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달라진 것이 팔이 아니라 다리가 아팠다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서툴고 고된 시집살이였지만 세 해째의 봄이 왔다. 그 해 봄에 친정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4. 할머님과 어머님

할머님은 단아한 분이었다. 목소리는 언제나 조용하시고 말씀이나 행동이 정말 숙녀였다. 젊을 땐 틀림없이 미인이셨으리라 싶은 높은 이마, 알맞게 빚어진 코, 작고 모양 좋은 입술, 계란형의 얼굴 윤곽, 지금은 흰 머리가 더 많으시지만 젊을 땐 검고 윤나는 머리가 숱도 많고 길이도 길어 보는 사람마다 탐을 내고 매년 달비를 쳐야만 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버선을 기울 때마다 나는,

“참말 할머니 버선이 외씨 버선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외씨란 우리 말 고유의 아름다운 표현과 어쩌면 그리도 일치되는 할머니의 버선인지 섬세한 작은 버선의 곡선, 거기다 예쁘게 정성껏 볼을 걸어놓으면 할머니는,

“얘야, 네 힘든데 뭣 하려고 밑 볼을 그리도 곱게 거느냐? 보이는 데 같으면 또 모르지만…” 하시며 신으시기를 아까워 하셨다.

“언제 학교 공부하고 버선 볼 거는 건 배울 틈이 있었더냐?”

밥을 지을 줄 몰라 그렇게 부끄럽던 나도 버선으로 설욕을 한 셈이다.

어머님은 할머님과 대조적이었다. 할머님은 정의 표현에도 바람 없는 날의 호수처럼 잔잔하셨지만 어머님은 다르셨다. 여름날의 강물 같은 어머님이셨다. 햇빛, 구름, 바람, 비, 이 네 요소가 때를 따라 활동하시는…….

어머님은 좀 곱슬한 숱이 적은 그리 검지 않은 갈색의 깃든 그 대신 센 머리카락이라고는 한 오리도 찾을 수 없는 머리를 큰 비녀는 자꾸 빠져 달아난다고 일부러 좀 작은 비녀로 예쁘게 쪽을 찌고 계신다.

할머니의 똑 바른 두상에 반하여 어머님은 항상 당신의 두상이 너무 어릴 때 눕혀 두어서 기우뚱하다고 하셨다. 코는 중마디 코라고 어머님은 늘 그러시는 뒤로 보고 있는 코였으며 콧대는 쪽 섰다고는 할 수 없다. 입은 큰 편이고 좀 두툼하였다. 성이 나시면 눈썹이 곤두섰는데 그 곤두선 눈썹이 꿈틀 꿈틀 그것만 독자적인 생면과 마음을 가진 물체 같이 보였다. 눈은 아래 눈두덩에 반달형으로 선이 그어져 있었으며 거기가 좀 볼록하였다. 성이 나시면 무서워 떨게 하는 얼굴이었으나 상냥할 땐 정이 넘치는 얼굴이며 음성이었다. 일에 단련된 힘센 팔, 엄지발가락 옆의 뼈가 유난히 두드러진 그래서 버선만 신으시면 거기만 먼저 떨어져 맵시가 없어져버린 버선을 신으셔야만 하는 옛날 어른으로선 좀 큰 21문의 고무신을 신어야 하는 발, 할머니의 예쁜 귀에 비하여 어머니는 별로 안 예쁜 귀를 가지고 계셨다. 어머님의 얼굴 윤곽은 할머님과 같이 전형적인 계란형은 아니었으나 갸름한 편이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쁜 데가 별로 없는 어머님이었으나 집에서 허드레옷을 입고 계실 때 말고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실 땐 몸 전체에서 멋이 풍겼다. D시 중앙통에 가서 서신다 해도 빠지지 않을 만큼 어머님은 맵시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님은 날씬하고 똑바른 체격을 가지고 계셨고 머리를 예쁘게 매만질 줄 아셨고 옷을 멋있게 입으실 줄 아셨다. 어머님은 사교적이셨다. 상냥한 웃음과 재미있는 화술엔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반할만 했다.

5. 아버님과 어머님

아버님과 어머님 사이는 원앙과 같았다. 아버님께서 편찮지 않으실 때 외출하시고 나면 종일 어머님께서 염려하시고 기다리시더니 요즘은 어머님께서 외출해서 좀 늦으실 땐 집에서 기다리시다 못한 아버님은 지팡이를 짚으시고 숲까지 나가셔서 어머님이 오실 곳을 바라보고 계셨다.

친정 부모님과 대조적인 시부모님을 뵙고 처음엔 좀 생소한 느낌이었으나 차츰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버님은 따님이 없으셔서 인지 우리 방에도 곧잘 건너오시고 내가 아버님 옷이나 도련님 옷의 바느질을 할 때면 이렇게 해달라고 혹은 그렇게 하면 좋지 않겠냐고 하시며 지도도 해주셨다. 한 번은 아버님의 양단 조끼(일류 바느질집에서 한 맞춤 조끼인 듯)를 가지고 오셔서 할 수 있겠는지 물어보시고 아버님이 주신 천으로 양단 조끼로 본을 떠서 꼭 같이 바느질을 했는데 바느질이 잘 나왔었다. 그래서 아버님이 무척 좋아하셨고 나는 그 후에 조끼 짓는 기술자가 되다 시피 했다.

아버님은 내 학교 시절의 사진도 구경하시고 나를 딸처럼 생각하셨다. 작년 가을에 어머님께서 친정에 가시고 안 계셨을 때는 “얘야, 너 무슨 반찬을 하려느냐?” 하고 물어주시기도 하셨고 그날 아침 볶은 무나물과 찌개를, “얘야, 무나물에 닭고기를 넣었냐? 찌개는 또 뭘 넣어놓으니 이렇게 맛이 있니? 간이 꼭 맞구나. 사돈댁과 우리 집 음식 간이 비슷한 것 같다.” 하시며 칭찬해 주셨다.

내가 무엇을 잘했을까만 아버님은 그저 며느리가 무엇을 하든 대견스럽게 보시고 사랑스럽게 보시는 것이었다. 몸이 부자유하신데도,

“얘야, 애기 좀 나 업혀다오. 내가 한 번 업어 보고 싶다.” 하시곤, 띠를 매서 업혀 드리면 지팡이를 짚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시다가 내려놓으시곤 하셨다.

우리 방문에 조그만 구멍만 하나 있어도,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 하시고 이내 발라 주시고, 부리는 머슴아이가 방에 군불 지피는 시간을 늦추면,

“애들 방엔 군불을 늦게 지피면 새벽에 뜨뜻해지지. 종일 밖에서 떤 아이 집에 돌아와서도 떨라고… 그 방은 부토가 두터워서 방이 늦게 덥혀지는데… 술아!” 하고 부르시다가 아이가 없으면 손수 지팡이로 불을 때시려고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면,

“아니, 아이가 오면 땔 텐데… 그 동안을 못 참으셔서 쯧! 쯧!”

어머님께서 하시던 일을 멈추고 달려 오셔야만 하였다.

6. 아기의 첫 돌, 그리고 아빠의 출정

아기의 첫돌이 다가왔다. 그이는 그동안 금융조합에서 면사무소로 직장을 옮겼다. 거물급이 면장을 하던 때라 이 고장에서 대대로 거부로 살아온 이제까지 직장 생활을 해본 적도 없을 A씨가 면장이 되었고 서울 고공(지금의 서울 공대) 출신도 징용을 피하여 이곳에 면서기로 와 있었다. A씨의 딸인 숙전 출신의 아가씨도 면사무소에 취직하여 일하고 있었다. 그전에는 면서기라면 일등 신랑감으로는 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단연 오름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재산도 있고 교양도 있는 지방 유지가 아름답고 착한 딸을 안전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해서(징용되어 가지 아니하니까) 면서기에게 시집을 보낸 사람이 있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그이의 직함은 노무계장이었다. A씨의 권유로 그곳으로 옮겨간 후 우리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친정아버지의 교훈이 생각났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워도 낙이 그 가운데 있다고 성현의 글에 있듯 청빈하게 사는 것이 불의의 재물을 탐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 모른다.”

요즈음 귀한 쇠고기다 청어다 가지고 들이미는데,

“아버님, 어머님, 애기가 양심껏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이런 것은 안 받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걸 받아놓으면 암만해도 공평하게 처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 동포에게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런 것을 받지 않도록 시부모님께도 말씀드리고 온순이에게도 당부했다.

그이에게는,

“모든 것을 양심에 거리낌 없이 처리하실 수 있도록 생활해 주시겠지요, 네?”

하며 말하였다.

내 말이 아니라도 그이는 너그럽고 착한 사람이었으며 의지가 굳센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여학교 때 들은 얘기를 잊을 수가 없어서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이다.

일본의 한 고급장교가 아내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신문에 대서특필로 기재되었던 독직사건을 범하고 말았었다고 우리에게 교훈의 말씀을 선생님께서 주셨던 것이다.

8․15 해방을 맞이했을 때 그이의 전임 노무계장은 위급하여 가족이 솔권해서 야반도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고 후임 노무 계장도 자기 집 대청에서 점심상을 받고 앉았을 때 칼을 든 남자가 뛰어 들어와 뒷담을 뛰어넘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했다.

듣건데 전임 노무계장은 직권을 남용하여 사복을 채우므로 A씨가 새로 면장으로 취임하자 전폐를 없애기 위해 전연 딴 부면에서 일하고 있는 그이에게 끈질긴 교섭을 벌인 끝에 마침내 승낙을 얻었었다는 것이다.

아기의 돌은 집안 어린들이 모여 아침밥을 나누고 저녁엔 그이의 친지들을 청하여 칼국수와 야채 부침개로 끝을 냈다.

며칠 후면 그이는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몸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부한 것도 아니라 쇠고기도 못하고 멸치국물에 국수를 말아 대접했으나 모두 유쾌하게 놀아주었다. 그이를 송별하는 친구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이가 원하지 않는 군인이 되어 떠나게 되자 우리 집은 캄캄한 어둠에 싸이게 되었다.

“큰 아이가 떠나는 날 누구라도 울기만 해봐라. 그냥 안 둘 테다.”

아버님은 발안한 마음을 이런 말씀으로 표현하셨고 누가 눈물을 흘렸다간 당장 불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에 내 마음도 이상하게 떨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그이의 일만을 슬퍼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렇게 건강하고 귀엽던 아기가 벌서 서너 달째나 설사를 계속하고 있어 어찌할 바를 모를 상태에 있었다. 증조할머니 등에 업혀 나갔다 돌아온 후부터 이상한 생 비린내 나는 팥 섞인 똥을 몇 차례나 누더니 아무리 애를 써야 나을 가망이 없는 것이다. 야위어 들어가는 아기의 모습…….

그이가 떠나던 날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몸빼를 안 입으면 출입하지 못하게 하던 시절이라 몸빼를 입고 어머님은 아기를 업으시고 눈을 뜰 수도 없이 퍼붓는 빗속을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도 일었다. 어머니 등의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열이 있었다. 내 가슴은 미여지는 듯하였다. 남편을, 아들을, 시동생을, 형을, 동생을―아버지, 어머니, 아내, 형수, 형, 혹은 아우, 보내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어머니도 울고 아내도 울고 따라서 가는 사람도 눈시울을 붉히고…….

모든 사람의 물결이 그리도 애절한 정을 나타내곤 하는데… 나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이도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이는 다음 정거장을 통과할 때 차창에 부딪치는 빗줄기를 보며 눈물이 스며 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빗속을 뚫고 집에 돌아와 열이 나는 아기를 안고 망연할 뿐이었다.

이튿날은 다행히 해가 들었다.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와 D시로 갔다. 아기 병을 제일 잘 본다는 이찌노미야라는 소아과 전문의에게 아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앓는 아기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오랜 시간 기다려서 겨우 진찰을 받으니 폐렴이라 했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겠는데 입원실이 만원이라 했다. 하는 수 없이 친정어머니의 고종사촌 언니 댁을 찾아갔다. 여러 날의 피로에 그 방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깜박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잤는지 한 삼십분은 잤을까? 몹시 가려워 눈을 번쩍 떴다. 빈대, 빈대, 굶주린 이리 때 같은 빈대가 줄을 지어서 내 다리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질겁을 하고 일어난 나는 아기를 살펴보았다. 여기 있다가는 병 낫기는 커녕 아기를 도로 죽일 것만 같았다.

“어머니, 아무래도 K에나가서 치료를 해야 할까 봐요. 이제 무슨 병인지 알았으니 여기서 괜히 더 소비할 것 없이 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내 말에 두 어머니는 두 말 없이 찬성하셨다. K에 나와서 나는 아기와 친정에 있게 되었다. 시댁 집은 시골이라 병원에서 상거가 멀고 친정은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곳 나이 많은 일인 의사도 역시 폐렴이라 했다. 그리고 아기를 업지 말고 병원에 다닐 때도 가슴을 안 눌리도록 안고 다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날마다 계속해서 뜨끈한 물수건으로 찜질을 해주라고 하였다. 좋은 약이 없던 때라 폐렴에 걸린 애들이 거지반 죽어가던 시절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시집 마을에선 건장한 어른이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날마다 전쟁이 계속되었다. 언제나 새벽엔 글을 읽으시는 아버지께서도 새벽이면 대롱에 입을 대시고 작은 구멍탄에 불을 붙이시느라 애쓰셨다. 매일 회사에 출근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바쁘신 중에도 외손자를 위한 봉사가 일과처럼 되신 나날이었다. 나는 여름의 긴긴 날 큰 사기화로 옆에서 뜨거운 물수건을 짜며 해를 보냈다. 아기의 가슴은 새가슴처럼 할딱거렸다. 뼈만 남은 그 가슴에, 목에, 물수건을 올릴 때마다 내 가슴은 미여지는 듯하였다. 오직 이 한 길만이 아기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듯 유월 염천에도 더운 줄을 몰랐다. 내 몸에, 내 얼굴에 땀이 흘러도 느끼지 못했다.

하루, 이틀, 사흘, 아기는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나아가는가 보았다. 오늘은 청진기를 대어본 의사도 기쁜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웃었다. 이젠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십부(찜질)하는 것이 제일 좋으니까 꾸준히 하세요.”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모를 오직 어린 생명의 생사의 싸움에 같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고 있던 나에게도 한 소식만은 우레같이 들려왔다.

조국해방!

8월 15일, 기쁘고 우렁찬 만세 소리, 태극기가 가두에 휘날렸다.

아아! 그이가 돌아온다. 그러나 나의 이 기쁨도 잠깐,

“그 때 간 사람들은 다 열흘간의 훈련 끝에 만주로 끌려갔대.”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러한 비감 속에서라도 내가 하던 작업을 그칠 수가 없었다. 해는 쨍쨍 따갑고 더운 공기가 후끈한 더위 가운데 나는 그날도 나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기의 명이 달린 이 일을 쉴 수는 없었다.


6 장

1. 귀환

그 때 누가 현관에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제일 시원한 방인 거실에 있었다. 거실 다음에 작은 방이 하나 있었고 그 작은 방은 현관에 붙은 방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있던 위치는 고개만 돌리면 현관이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그리고 여름이라 문은 다 활짝 열려 있었다.

낯선 등 뒤의 기척에 고개를 돌린 찰나! 어떤 낯선 사람처럼 변해버린 그이의 모습, 새 까맣게 타고 야윈 얼굴, 땀에 젖은 카키색 군복,

"아아!"
"여보!"

비명처럼 외치며 내가 벌떡 일어선 것과 거의 같은 시각에 그는 절규인 양 나를 불렀다. 어디에 감추어져 있었던가?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둑이 흘린 듯 쏟아졌다.

잃었던 사람을 다시 찾은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가는 차츰 나아갔다. 이젠 호흡은 완전히 정상이 되었다. 추석이 되었다. 누구보다 즐거운 추석을 맞이한 듯한 우리 집이었다. 그러나 추석이 지난 며칠 후 아기는 밤새도록 토하고 싸고 하더니 이튿날 아침엔 벌써 사색이 되어 있었다. 팔월 열여드레 날이었다(음력).

시어머님께서 아기를 업고 집을 나가시고 나자 나는 그냥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 옆의 것을 살필 겨를도 없어진 나는 발이 땅에 붙지 않고 허공을 디디는 듯 달렸다.

"엄마!"

친정 현관문 을 열며 부르짖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뛰어나오고 나를 둘러싸고 무슨 말인가 했으나 나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아기가 죽겠다.' 이 생각은 나의 이성을 마비시켜 버린 듯 했다.

그 날 시어머님께서 추석놀이 씨름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장터를 지나올 때 등에 업힌 아기를 보고 순자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러나 아기의 생명은 실낱같이 붙어 있어 이튿날 밤을 밝혔다. 다시 사경을 넘긴 듯 했다. 스무 날 낮에는 제법 웃기까지 하고 귀엽게 잘 놀았다.

시어머님께서 아기를 보러 오셨다. 엄마가 사돈 대접한다고 감자를 삶아 내놓았다. 그러데 그 감자가 화근이었다. 또 탈이 날까 겁이 난 나는,

"어머니, 아기는 안 주셔야 될 거에요, 아직……."

"괜찮다. 요렇게 조금씩 주는데 어떨라고……. 아기가 이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애처로워서 어떻게 보니?"

언제나 처럼 말씀하셨다. 어머님의 뜻을 꺾는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지금 은 나의 친정에서의 일이라 더 어떻게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그 날 밤부터 아기는 또 아프기 시작하였다. 아기의 배는 바람을 집어넣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앙상한 뼈만 남은 가슴, 팔, 다리, 거기다 배는 부어 오르고…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다.

"설사를 좀 시켜야겠습니다."

아직도 젊은 의사는 주사를 놓고 약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아기의 배는 여전히 남산만 하고 오줌은 한 방울도 누지 않았다. 숨이 턱에 닿게 나는 한의에게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도중에도,

'혹시 아기가, 혹시 아기가?"

하고 집에 두고 온 아기에게 무슨 변이 일어난 것만 같아 입술이 바싹바싹 탔다.

아기의 상태를 듣고 난 한의 노인은,

"걱정 말아요. 신의들은 건듯하면 설사약만 쓰니 위장만 상하지. 아, 바로 옆에 이 윤의사도 제가 의사지만 제 자식 태열 못 고쳐서 내가 조약 시켜서 낫게 해주지 않았는가. 하하하, 걱정 말아요. 그까짓 병, 자 이 약 두 첩이면 거뜬히 나을 거야. 약 한 첩을 물이 한 접시 되도록 다려서 먹여 보라구."

"돌아가신 시조부님과 자별한 사이셨다는 이 노인은 그 너그러운 웃음과 확신에 찬 말로 우선 나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놓고 자그마한 두 첩의 약봉지를 내밀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행인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나는 날듯이 집으로 달렸다. 아기는 살아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쉴 때마다 남산 같은 배가 일렁거렸다.

급히 약을 달였다.

아아! 그 두 첩의 약은 얼마나 신통하였던가! 아기가 오줌을 누었다. 솰솰, 이렇게 귀한 오줌은 처음이었다. 그 오줌을 그릇에 받으며 나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졌다.

"아가, 아가, 너는 살았구나!"

스무 하룻날 밤이 밀려들고 있었다.


2. 아버님의 별세

쾅 쾅! 쾅 쾅 쾅!

한밤중이었다. 이 한밤중에 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아가, 빨리 옷을 갈아입고 너의 시댁에 돌아갈 준비를 하여라.”

어머니가 장지문을 여시고 말씀하셨다.

“이 밤중에……?”

무언가 심상찮은 예감에 가슴이 떨리었다.

“밭사돈께서 세상을 떠나셨단다.”

청천벽력 같은 기별이었다. 그저께 시어머님께서 오셔서 씨름 구경 가셨다고 하시지 않았나?

아기를 업고 아버지를 따라 밤길을 걸어가는데 큰 짐승의 눈알 같은 불을 켠 검은 괴물 같은 화물열차가 바로 옆의 철둑을 쏴악 지나갔다. 거센 바람이 일며 아기와 나는 다 같이 수레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시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경, 일제히 호곡소리가 일어나고 나는 아기를 건넌방에 내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병풍에 가려져 아버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종신도 못한 며느리!’

나는 그 울음바다 속에 자신을 던지며 스스로를 책하고 있었다.

아기는 이튿날도 또 많이 아팠다. 아기의 종고모(시삼촌의 따님이며 아직 초등학교 어린이였다.)가 아기의 외할아버지(나의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회사에 가서 외할아버지와 같이 병원에 갔다 오게 했다. 의사는 치료도 안 해주고 아무 약도 주지 않고 속히 집에 가라고 하더라는 얘기, 아가씨는(종시누이 - 아기의 종고모) 돌아오면서 내내 고개를 돌려 아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러나 아기는 아직 호흡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열엿샛날 친상을 당하신 사가(査家) 사돈집(나의 친정)에 위문을 갔다 오셨으며 스무날, 즉 그저께 씨름 구경을 가셨다 온 후에 어제 스무 하루 날에도 또 가시겠다고 하셨으나 오전에 비가 와서 못 가시고 오후엔 비가 그쳐 방에 계시는데 작은 아드님(나의 시동생)이 감나무에서 먹음직스러운 생감을 하나 따가지고 한 입 베어 먹고,

“아버지, 잡숴 보시겠어요?”

하고 내밀었다는 것이다.

“오냐.”

대답하시고 한 입 베어 잡수시다 그만 달라지셨다는 것이다.

“엄마!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허리에 찼던 말굴레를 풀어 던지기도 급하게 뛰어내려와 보니 이미 말문도 막히시고 결국 한 마디 유언도 없이 가셨다는 것이다. 의원을 불러 오느라 시간이 흐르고 날은 어두워오고 안 되겠다는 의원의 선언에 안방으로 모셔 옮기고…….

이튿날은 날이 맑았다. 집안 아낙네들이 뒤안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다가,

“아이고 별일이야!”

“금방 괜찮던 게 왜 이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 다니던 암탉이 나물 다듬는 옆에 와서 무엇을 꼭 쪼아 먹더니 그만 데굴데굴 굴러 넘어졌다는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 넘어진 암탉을 두고 한 얘기였다 한다. 죽은 닭은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잡은 닭의 목을 조사해보니 굵다란 콩이 하나 걸려 있더라는 것이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이야기였다.

아버님은 춘추 사십도 못 되셔서 세상을 떠나셨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었다. 할머님의 비통하심은 참말 뵈옵기가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리고 원앙이 그 짝을 잃은 듯하실 어머님의 그 심정을 헤아려 드릴 수는 없어도 참으로 죄송하여 우리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기는 두 돌이 지난 후에는 큰 탈 없이 건강이 회복되어가서 다시 온 집안에 웃음과 소망과 기쁨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할머님도 어머님도 증손자를 통하여 손자를 통하여 치료의 은사를 경험하고 계신 듯하였다. 그토록 우리 아기는 여유 있고 의젓하고 참으로 좋은 성품을 타고난 어린이였다. 할머님과 어머님의 유일의 낙은 우리 아기를 보는 것인 듯 항상 활짝 웃는 얼굴도 순진무구하게 말하는 아기와 함께 웃으시며 위로를 받으시고 슬픔을 잊어가며 치료를 받으시는 듯 했다.


3. 해방 후의 이야기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그이는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였다. 무장사를 하겠다는 거다. 영천에 대창무가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이의 친구와 둘이서 그곳에 가서 큰 밭 전체의 무를 사서 화물열차로 한 곳간이나 되는 무를 부쳐 놓고 그이는 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 후 신출내기 무장사는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회색 새 춘추복은 찢어지고 건강하던 얼굴은 검게 야위고…….

떠나기 전 내가,

“여보, 다른 집에서는 광목을 열통씩 사왔다는데 참 값이 싸대요. 한 통만 사다 주셨으면…” 했을 때,

“응, 그래, 그래, 한 통 아니라 두 통, 세 통이라도 사다주지.”

하고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던 분이 광목은커녕 몸살이 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던 것이다. 투자했던 돈은 다 털어버리고 거기가 논 너마지기까지 팔아 넣어야 빚을 막겠다니, 장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못 되는가 보았다.

그이가 신한공사로 들어간 것은 우리 아기가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우리는 영천으로 부임하였다. 우리의 아기는 이제 그렇게나 생사의 경계선을 오락가락했던 과거를 잊은 듯이 씩씩하다. 그는 1년 동안을 투병하는 어려움 속에서 용케도 생명을 부지했다. 후에도 백일해와 홍역, 첩첩이 겹치는 병을 다 이겨내고 이렇게 씩씩한 아이가 된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하고 대견하고…….

아기가 아픈 중에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도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담소하고 있을 때였다. 가을이라 찐쌀을 내놓고 놀러온 사람들과 가족이 한 줄씩 먹고 있었다. 우리 아기는 이제 겨우 회복기로 들어선 상태였다. 아기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보자 어머니는 애처러워 못 견디시는 것이었다. 아기에게 찐쌀을 주시려고 하는 어머니를 보고 그이가 주위를 드렸다.

“어머니, 안 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듣지 않으셨다. 몇 번이나 아기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을 보시고서도 우선 목전의 손자의 애절한 갈망이 더 애처로우신 것이었다. 몇 번 그이가 어머니를 말렸으나 듣지 않으시자 그이는 찐쌀이 든 그릇을 바깥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혼백을 모셔놓은 빈소에 들어가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호곡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연한 마음이 되었다. 아들 때문에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으니 얼마나 그의 마음이 비통하였을까! 하물며 아버님 상중이신데 원앙 같은 부부애로 사랑하시던 아버님을 잃고 외로우신 어머님의 마음에 상처를 드린 그의 비통한 마음을 생각하며 내 마음도 비통하여졌다.

또 한 번은―

할머님이나 어머님은 몹시 답답하면 무당을 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때면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백일해 후에 찾아온 홍역으로 아기의 생명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날 청해 온 무당은 공징이(귀신의 소리를 하여 이상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점을 치는 여자 정쟁이) 점쟁이였으며, K 고을에 명성이 자자한 아주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여자였다. 아기 공징이가 접혔다 하며 한 되들이 정종 (일본식 청주(淸酒)를 흔히 이르는 말) 병을 머리에 이고 달려도 그 병이 떨어지지 않고 물을 자배기로 가득 이고 칼춤을 추어도 그 물이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 떨고 맞춘다는 소문과 함께 사방에 불려 다니고 있었다.

공징이 점쟁이가 한 자배기의 물을 이고 돌아가며 칼춤을 춘 후에 제일 좋은 내 옷을 내어놓으라고 했다. 나는 심중에 공징이 점쟁이를 어른들이 부른 것이 싫은 것을 겨우 참고 있었던 터라 좋은 옷은 커녕 아무 것도 내어놓기가 싫었다. 어른들께 정명으로 항의하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런 옷을 내놓았다. 그랬더니 그녀는 그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던 일을 팽개치고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그녀를 뒤쫓아 가는 할머니,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계셔서 못 좇아 가신 듯, 힘도 없으신 할머니께서 좇아가시니 나는 할머니를 모셔 오려고 뒤쫓았다.

마을 앞 도랑물을 건너시려는 할머니를 붙잡았다.

"할머니 그만 두세요. 그런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린 거라니까 명이 길면 살겠지요. 공연한 무당 말 마세요. 할아버님의 영혼이 무슨 할 일이 없으셔서 증손자를 잡아가시겠어요?"

공징이 점쟁이가 말하기를 증조할아버지의 영혼이 증손자를 데려가려고 하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이었다. 시조부님은 살아 계실 때 공명정대한 분이셨다고 하며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정도를 행하시며 건강생활에도 관심이 많으시고 불의한 일은 하지 않는 분이었다 하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할머니께서 아들 딸 남매를 낳으셔서 기르셨는데, 일곱 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꽤 커서) 홍역을 치렀다고 했다. 온 동네에 홍역으로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할머니도 두 자녀를 다 잃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아기가 없이 지나고 있을 때 어느 날 할아버님께서 대청 에서 점심상을 받고 계실 때 그 마을의 주막지기가 찾아왔다 한다. 할아버님께 인사를 드린 후 그는 할아버님께서 후사가 없으신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유처취처하실 것을 말씀 드렸다 한다. 그런데 할아버님께서 어찌나 큰소리로 호통을 치셨든지 주막지기는 혼비백산하여 삼십육계를 놓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매사에 정도를 걸으심에 대해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셨을 것이다. 그 후 할머니는 아들 둘, 딸 하나, 세 자녀를 두셔서 잘 키우셨다. 이 이야 기는 그이가 들려준 것이다.


4. 영천에서 살던 시절의 추억

해방 후 신한 공사에 들어가서 영천 농장에 부임 하였다. 우리는 K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역에서 동해선으로 갈아타고 영천역에 도착하였다. 회사는 마을보다 훨씬 높은 지대에 지어져 있었고 사원들의 사택도 신축된 것이었다. 적토에 화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 넓은 벌판 같은 살풍경한 곳이었다. 나중에 보니 사택에 사는 가정은 몇 되지 않았다. 농장장이 사택에 살고 있었고 나중에 박주사 가족이 왔고 다른 분들은 이미 살던 집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가 있는 언덕 아래가 바로 도로였는데 정확하게 회사 정문에서 보면 도로 건너편에 선주사 집이 있었다. 경주 양동 손씨라는 손주사 가정도 사택 안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이는 차석(농장장 다음)의 직책으로 부임했으나 그 자리를 사양했다.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연상인 박주사에게 차석 자리를 양보하였다.

어머님과 무흠이가 부임하는 날 같이 갔다. 그 이튿날 시장에 가서 필요한 살림살이 도구를 몇 가지 샀다. 참 고운 자줏빛 색깔로 옻칠한 그리 크지 않은 가족이 같이 먹을 수 있는 예쁜 둥근 밥상도 하나 샀다. 이것을 특별히 내가 기록하는 것은 그 후 아빠를 잃은 후에도 내내 우리는 그 밥상만 사용하다가 내가 미국 오기 전에 누구에겐가 주고 왔을 것이다. 그 밥상은 끝내 새 것같이 제 모습을 단정하게 지니고 있었고 아들이 첫 월급을 받아 왔을 때 우리는 감격 하여 그 밥상을 펴놓고 그 위에 월급 봉투를 올려놓고 아들 부부와 손자와 나, 온 식구가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런 후에 아들이 봉투에서 돈을 꺼내어 하나님께 드릴 돈과 책값 등을 먼저 구별하고 나에게 어머니 용돈이라며 오천 원을 주고 자기 용돈은 삼천 원, 나머지는 아내에게 살림살이에 쓰도록 맡겼다.

나는 그 용돈을 모아서 변변한 신사복 한 벌 맞춰 입은 적이 없는 아들을 위하여 서울 휘경동에 있는 양복점에서 아들의 춘하복을 한 벌 맞춰 주었다. 그리고 손자 옷도 옷감을 끊어 만들어 입혔었다. 아직도 내 눈에는 그 밥상이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님은 아버님을 여의신 후 손자를 보는 것이 유일의 낙이시니 어떻게 우리가 어머님에게서 그 낙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아들은 나에게 그렇게 한 것을 납득이 안가는 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우리(그이와 나)의 심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머님께 참으로 혹독한 아픔을 드리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어머님과 아들을 보내는 날 플랫폼에서 간신히 참고 작별한 후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내내 울면서 걸었다. 아무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 어떠한 귀한 보물이 있다 한들 아들에게 비할 것인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도 아직도 눈물이 흘렀다.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무엇인가 해야 이 공백을 매울 것 같았다. 그이가 대구에 볼일 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서예 기구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해방이 되었으니 한글 공부도 하고 붓글씨도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예 책과 붓과 먹을 사왔다. 벼루는 있던 것을 그이가 가지고 왔다. 매일 우리말로 쓴 책도 읽고 붓글씨도 쓰면서 날들을 보내었으나 어느 날 배가 좀 아파서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 갔더니 배를 꽉꽉 눌렀다. 집에 돌아온 후에 하혈 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친정으로 돌아갔다. 친정에 온 후 나아진 것 같아 자꾸 움직이고 하여서 결국 해산 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조산하게 되었다.

첫아기를 받아 주었던 산파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아기는 증조할머니를 닮아있었다. 타원형 의 머리 모양과 오뚝한 코, 나오자 마자 시원스럽게 오줌을 누는 모습도 귀엽고 대견했다. 큰 아이와는 달리 이번 애기는 모발 도 새까맣게 나있었다. 여름이라 그랬는지 산파는 갓난아기를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얇은 옷을 입혀서 뉘어놓았다. 나는 해산 후 잠시도 참을 수 없는 아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기가 딸꾹질을 하며 파랗게 질려갔다. 그러나 아무도 아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몰랐던 것이다. 바로 친정 문전에 의사가 있었건만 여러 차례 오빠가 가셔서 청해도 와주지 않아다. 결국 딸꾹질도 멎고 숨도 멎어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리의 둘째 아들, 나 의 둘째 아들, 의흠(義欽)이는 갔다. 오후 12시 경이었다.

그날은 맑고 밝은 날이었다. 그러나 아기가 잠들고 나자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고 비는 억수같이 퍼부었다. 나는 고통 중에도 하늘도 무심치 않아 나와 함께 슬퍼해 준다고 느꼈다.

이튿날, 쉼 없는 통증 속에 기진맥진하여 있을 때, 친정아버지가 지점장으로 계시는 회사 사원 김씨의 어머니께서 문병을 오셨다. 나의 고통하는 양상을 보시고 눈에 눈물을 머금으시고 진작 알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분의 자부는 아들 다섯을 낳고 그 아이들은 지금 다 잘 자라고 있었는데 첫 아기로부터 다섯째까지 다 조금씩 하혈하여 그 때마다 절대 안정을 취하고 일주일가량 가만히 눕혀놓고 닭을 고아 물을 떠 넣어 주었다고 하였다. 일주일만 지나면 정상 상태로 돌아와 다섯 아기를 다 무사히 낳고 다 잘 크고 있다고 나에게도 그렇게 했으면 달이 차서 순산할 때까지 다른 탈이 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다음 아기 때는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었다.

멈추지 않는 통증 때문에 오빠가 산후의 병을 잘 낫게 한다는 하양의 양약국(한의) 을 찾아가서 나의 병난 경위와 상태를 설명했더니 양의원이 여섯 첩의 약을 지어 주면서 이것이면 통증이 멎을 것이라고 말 했다더니 참으로 그 의원의 말이 맞았다. 그가 산후병의 명의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오빠는 약 30리 길을 왕복하여 60 리의 노정을 교통도 나쁜 시절이라 아마 자전거로 갔다 오셨는지 동생을 살리기 위하여 즐겨 갔다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통증은 멎었지만 나의 건강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러 날 동안 대구 산부인과 병원에 입원하여야 했고 한 달쯤 후에 영천 사택으로 돌아갔다. 앓는 동안에는 늘 잠든 아기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으로 생긴 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나의 무지로 말미암아 죄없는 어린 생명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날마다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잠겼다. 아무 사람도 나의 이 깊은 슬픔을 해결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여러 해 후 내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 문제는 해결 되었다. 어머니가 구원을 얻으면 어린 아기들도 어머니 따라 구원을 얻는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둘째 아들 의흠(義欽)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꼭 구원을 얻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영천에서 살 때 할머님께서 한 번 다니러 오셨다. 할머님께서 와 계시는 동안 내가 시장에 가서 시골집에서 어머님이 조리셔서 먹어본 생각이 나서 비슷한 물고기라 할머니께서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사왔다. 할머니는 그것들을 장만해서 앉혀 주시면서 남천강 물고기는 맛이 있지만 금호강 물고기는 그런 맛이 없다고 하셨다. 물에 따라 물고기 맛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할머니는 영천이 친정이라 할머니의 조카가 기별을 받고 장날 와서 할머니를 모셔갔고 며칠 동안 친정에 가셨다가 오셨다. 시골에서 농사 짓고 사시는 할머니 조카는 참으로 순박한 분이었다.

겨울철에 들어섰을 때 어머님과 시동생과 무흠(아들)이가 왔다. 어머님이 오신 후 곶감을 많이 깎아 달아놓았다. 어머님과 그이가 내 건강을 염려하여 까만 염소를 한 마리 잡았다. 한의에게 가서 진맥을 하고 한의원이 한약재료 네 가지와 깜정양을 같이 고아서 먹으면 다시 포태(胞胎)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어머님은 그 일을 위하여 오신 듯 나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어릴 때부터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특히 염소고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한약을 넣고 달인 분량은 억지로라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께서 가실 때 손자를 두고 가셨다. 둘째 아기를 잃고 슬퍼하는 나를 생각하신 것 같다.

새해가 돌아오고 음력 정월 보름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축 행사가 거행됨으로 영천 극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 행사가 끝나고 우리가 돌아올 때 아이들이 줄줄 따라왔다. 무흠이가 설빔 한복을 입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초등학생들 같았다.) 무슨 구경이 라도 생긴 듯 줄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그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손주사가, 정주사, 아드님 너무 잘 차려 입히지 마시구려. 우리집 사람에게 졸려서 힘든 요즘의 상황이오 하였소. 그래서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난처했다오. 그래서 나는 다만 내가 모르는 일이오. 우리 집사람은 아이 치장하려고 무엇을 요청한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했지요. 당신은 집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오?" 했다.

어느 날 손주사 부인을 만났을 때 나를 보고,

"애기를 핥아요, 빨아요? 어떻게 그렇게 항상 깨끗해요?" 했다.

참 모를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활발하게 잘 노는 아이였으나 살결이 희고 귀염성스러워 그랬는지 보는 사람마다 귀여워하였다. 7, 8 개월 되었을 때도 이발소에 가면 이발관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다 우리 아기에게 집중되고 다 한 마디 이상 칭찬을 하고 심지어 아기가 크게 아프기 전 병원에 한 번 갔을 때 아직 자신의 아들을 가지지 못했던 의사가 탄복을 하며 부러움을 큰 한숨 같은 찬탄의 표정으로 표명하였다.

증조할머니를 위시한 온 가족의 사랑 속에서 가깝고 먼 온 친척들 온 동네의 친척들의 사랑 속에서 그늘 없이 밝게 자라고 있는 아들로 인하여 이제는 나의 상처도 아물어갔다.

아빠는 할머님과 어머님을 자신이 모시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갈 길을 알아본 듯 역시 같은 계통인 과수원 관리소로 가게 되었다. K로 가게 되어서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할머님과 어머님을 모시고 살 수 있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우리의 어린 아들도 이제 증조할머니, 할머니, 아빠, 엄마, 삼촌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떠나 던 날 그 동안 정들었던 이웃들이 얼마나 섭섭해 했는지 특별히 그이와 친했던 손주사는 더 서운해 하셨다.

그 무렵 나는 태중이었다. 몸도 많이 회복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이는 나의 태중의 건강을 염려하여 종합 비타민과 칼슘을 사다 주었다. 나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는데 어떻게 그런 배려까지 할 줄 알았는지… 그리고 내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부엌으로 나르는 것을 볼 때는 언제나 자기가 날라다 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아기를 낳을 때 죽을 뻔했던 아내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그의 모든 언행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이도 나도 한 귀한 생명을 잃은 후 인간의 생명에 대한 귀중함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의 길을 한 걸음 성큼 내디뎠다고나 할까? 그이는 귀하게 자랐고 온 집안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져 아무도 그를 거슬리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머님께서 보시기에 어처구니없다 할 정도로 일 못하는 학생 며느리 때문에 기가 막혀 하실 때가 간간이 있었다. 점심을 들에 내어가야 하는 바쁜 시간에 부추 한 줄기를 다듬고 있을 때, 콩나물 하나하나를 다듬고 있을 때 어머님은 너무 답답해 하셨을 것이다.

"사돈은 딸을 물거품같이 키우셨구나." 하시며 한탄조로 말씀하셨다. 너무 답답하실 때는,

"학생 며느리 퇴냈다."고 말씀하셨다.

큰 소리로 꾸중을 하시다가도 큰 아들이 대문에 들어서는 그림자만 보여도 어머님의 태도는 일변하시는 것이었다. 상냥하고 정답게 아드님을 맞이하시고 아들이 사랑하는 며느리에게도 사랑의 시선을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이는 우리 집 어른들의 소망일 뿐 아니라 온 친척의 소망이었다. 그이는 어릴 때부터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자랐다. 그이가 일고여덟 살 때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여중군자이셨다는 증조할머니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을까! 그리고 할머님께서는 운동회 때에는 손자가 결승점을 향하여 달릴 때 "길아! 힘내라!" 관람석에서 일어나셔서 큰 소리로 팔을 흔들며 외치시며 응원하셨다고 한다. 학과 공부도 일등이었다니 얼마나 자랑이셨을까? 대구 고보에 입학했을 때 대구에서 아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백천동 쪽으로 해서 차를 내려 마을로 걸어 들어오는데 온 마을이 옛날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듯 또는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구경하려고 온 마을 사람들이 철둑에 즐비하게 섰었다고 하니 마을에선 토픽 뉴스였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영천에 있을 때에 작은 사건이 두 번 일어났다. 어느 날 옆 사택에 사시는 선주사가(그 때는 아직 부인이 이사를 오지 않고 혼자 계셨다.) 고기 낚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찌개가 맛있게 끓고 있었다.

"저녁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됐는데요." 내가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 시간에 나가면 늦어질 것 같이 생각되어 안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이는 선주사의 청을 물리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저녁상을 다 보아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름날이었다. 나는 혼자서는 먹고 싶지도 않아 건넌방 미군 용 침대에 들어가 누워있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지못해 일어나 안방으로 갔다. 그이는 상보를 들추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늦어지면 혼자라도 식사를 하지 그랬느냐고 태중인데 당신 홑몸도 아닌데 그랬느냐고 견책조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을 한 그릇 달라고 해서 한 그릇 떠다 바쳤는데 갑자기 그 물 대접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마음 이 상했다. 그런데 나를 보고 그 내던진 대접을 주어 오라는 것이었다. 나도 자존심이 다 죽은 사람이 아니었는지라 가만히 있었다. 결혼 후 한 번도 그이의 말에 답 없이 반응한 적이 없는 아내의 태도에 그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러나 내 마음은 잔잔하였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어오는 것이 현명하겠다고 판단하고 아무 말 없이 주어왔더니 그이는 금방 마음이 풀어져 크고 넓은 가슴으로 나를 안았다. 그이는 일할 때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큰 인물로 인정받는 인물로 살았으나 아내에게는 지극히 순진한 소년 같은 데가 있었다. 나는 그이가 완벽한 사람이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이의 모든 것, 그이 자체를 사랑하였다.

또 한 번은 자녀 교육에 대한 얘기를 하였을 때(그 때 아들은 할머니와 함께 K에 살고 있었다.)의 일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맞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녀 교육은 내 소신 것 교육하고 싶었다. 그 날도 그이는 밥공기를 부엌을 향해 던졌다. 다행히 두 번 다 스탠 그릇이어서 깨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일어서서 부엌에 가서 밥공기를 줍고 밥알을 주었다. 밥공기는 부엌 벽에서 싱크(시멘트였다.)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 놓고 그이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래서 나는 밖에 나가 그이가 나타날 길목을 지키고 서있었다. 한참 있다가 그이는 내가 좋아하는 팥만두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럴 때의 그이의 모습은 그지없이 순진한 것이었다.

그런 그이가 이제는 한층 우러러 보아야 하는 분으로 성장해 나는 이제 아기같이 외소해지고 그이는 내게 모든 위험을 막아 주는 성곽과 같은 분이 되었다.


5. 할머니의 병환과 별세

그 날도 어머님과 온순이는 들에 나가고 나와 할머니는 집에 있었다. 내가 점심 준비를 시작하자 할머님께서는 집안 채마밭에서 몇 가지 채소를 따오셔서 내게 주셨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할머님께서 달라지셨다. 풍이 왔던 것이다. 할머님은 그 날부터 말씀도 못하시고 일어나시지도 못하셨다. 중풍이라고 했다. 내게 여성의 귀감 이셨던 할머님, 손부를 지극히 사랑하시던 할머님께서 이제는 아무 표현도 못하시고 대소변도 받아내야 하였다. 어머님이 들에 나가시고 나면 할머님 변 보시는 것을 도와드리는 것은 내 차지였다. 할머님은 체중이 나가는 분이 아니셨지만 당신 자신은 전혀 움직이시지 못하니 태중인 내가 할머님을 변기에 앉혀 드리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간신히 앉혀 드려야 했다. 그리고 언제나 대청에서 일하면서 할머님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변을 보고 싶으실 때는 즉시 도와 드려야 했기 때문에…….

음력 칠월에 할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사람의 생명이 참으로 덧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력 동짓달에 육촌 시누이가 결혼을 했다. 그 결혼식 때 나는 종숙모님 댁에 가서 음식 준비하는 모든 일에 주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 가까운 집안에서는 우리 집이 큰집이었으므로, 아직 다른 아무 집도 며느리를 보지 않았는지라 내가 일해야 할 입장에 있었다. 이제는 시집 온지 만 5년이 지났는지라 우리 어머님의 훈련 아래 단련되어 어느덧 나는 익숙하게 일처리를 하 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날이 산월이었는데도 건강 하게 잔치하는 동안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얼마나 종숙모님들이 좋아하시는지 유동 종숙모님, 조곡 종숙모님 두 분이 다 이구동성으로 박 씨 집안에 며느리 감 하나 구해달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셨으나 찾아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동생이 형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장가가겠다고 해서 나중에 친정아버지께서 중매하셔서 아버지의 팔촌의 딸이요 나의 십촌 동생인 박 씨 가문의 딸이 나의 동서가 되었다.

유동 종숙모님의 딸인 육촌 시누이는 머리도 좋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신랑은 진 씨였는데,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결혼식 날 이튿날 춤바람이 벌어졌다. 유동 종숙모님은 삼십 세에 홀로 되셨다. 이제 둘 째 사위를 보셔서 모든 집안 사람이 다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신랑이 모든 잔치에 온 사람들을 즐겁게 할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군청에 다니는 공무원이었는데 나중에 군수까지 된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상쾌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네 살짜리 우리 아들은 아빠 품에 안겨서 춤추고 있었다. 엄마가 뜬 새 털실 쉐터(아빠가 외국 에 출장 갔을 때 사온 수박 색 순모사였 는데 밝은 남색 무늬를 소매 끝 가까이와 허리 단 쪽에 넣은, 책을 보고 뜬 멋있는 쉐터였다.)를 입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잔치가 끝나 고 이튿날 결혼식 날부터 3일 째 인 날 우리 집에서 신랑 대접을 하였다. 그 날 종숙모님께서,

"질부야, 이제 오늘 밤 마음 놓고 순산하면 되겠다." 하셨다.


6. 온순한 온순이

아기가 외가에서 처음으로 올 때 데라고 온 아이는 게으르고 말을 잘 옮겨 추석에 보내고 그 동안 아이가 없이 지나왔으니 시부모님도 그이도 아이가 하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셨고 농사철이 오면 밭도 매야 하고 길쌈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이제 농사도 이제 다 집에서 붙이기로 했기 때문에… 그이가 퇴근길에 처가에 들려서 부탁을 하곤 해서 할아버지 장례식 때 외삼촌께서 A읍 근처에서 할머니와 살던 아이라면서 데려오셨다. 아이는 한 쪽 눈이 약간 해끔하고 몸집은 작으나 퍽 온순해 보였다. 할아버지 장례식 후에 그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이름은 온순이라고 하였다. 이름과 같이 마음씨가 고운 아이였다.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고 말을 옮기는 일이란 결코 없었고 바지런하였다. 이 아이가 온 후부터 나의 일은 좀 수월해졌다. 내가 못하는 키질도 할 줄 알고 내가 못하는 밭일도 할 줄 알았다. 길쌈도 열심히 배웠고 언제나 말없이 순종하는 착한 아이였다.

어머님께서 온순이를 데리고 밭에 나가시고 나면 할머님이 애기를 봐주실 동안 나는 집안을 치우고 바느질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였다. 점심을 차리고 점심이 끝나면 어머님은 좀 쉬신 후에 온순이를 데리고 다시 밭에 나가시고 나면 나는 다시 오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다 집안을 치우고 저녁을 지으며 축담에 물을 뿌리고 쓸고 난 후 툇마루를 닦아 놓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밖에 나가셨던 가족들이 다 돌아오신다. 언제나 밭 매는 날은 땅거미 지는 시간에 어머님과 온순이는 돌아왔다. 저녁은 평상에서 마치고 마당엔 모깃불을 피우고 온순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아기를 재우고 다리미질 준비를 하고… 그런 저녁이면 우리 마당에 달맞이꽃이 소담스러웠다.

마당이 넓어서 대문 들어서는데 아치형으로 대문을 덮은 엄나무며 골목과 앞집과의 사이의 담 쪽으로 뽕나무가 한 그루 있고 우리 집 둘레 담장 안에 감나무가 여섯 주, 샘 곁으로 장독대가 있고 샘 또 다른 편에 꽃밭이 있고 또 그 옆에 대문과의 사이에 고추, 가지, 토마토 상추 등 채소도 있었다. 마을에서 제일 좋은 채소밭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추는 아무래도 집의 것이 더 부드럽고 고추는 밭에 주렁주렁 열려 있었지만 바쁠 땐 금방 따먹을 수 있도록 모종을 해두었다. 해가 진 후 그 채소밭의 여기저기에 빨래를 얹어놓으면 조용한 여름밤이면 알맞게 잘 녹는다.

온순이의 설거지가 끝나면 다리미질을 한다. 다리미질은 멍석을 펴고 한다. 그동안 다른 가족들은 모두 평상에서 얘기에 꽃이 피고 다리미질이 끝나고 얼음 같은 샘물을 덮어쓰고 잠자리에 들면 잠이 절로 온다. 꿈도 없이 자버린다.


7. 딸의 출생 그리고…

양력 12월 26일 밤부터 산기가 있어 27일 아침 8시 배가 아프면서(아들은 허리가 아프면서 낳았다.) 딸을 낳았다. 아직도 방안은 환하지 않았고 호롱불 밑에 잘못 보시고 어머님께서 사랑에 있는 아들에게 가셔서 또 아들을 낳았다고 보고하셨다. 그래서 어머님은 금기 새끼까지 고추와 숱을 꽂아 마을 사람들의 인사까지 개울에서 받으셨단다. 아침 식사 때 산파가 이제 할머니께서 나물 캐올 손녀를 보셔서 기쁘시겠다고 해서 딸인 줄 알게 되었다. 밤에 산기가 있어 아파하는 나를 보며 그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나의 아픈 것보다 아기가 날 그 일이 더 기뻤던지 산파를 데리러 가기를 지체하면서 자꾸만 웃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이가 산파를 불러오고 8시에 아기의 고고소리가 들렸는데 아기는 참으로 건강하였다. 그이가 태중인 나를 위하여 내내 종합 비타민과 칼슘을 사준 연고인지 건강하고 날 때부터 3주쯤 지낸 아기 같았다.

나는 연분홍 융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해 입혀 놓았다. 두 칠일인지 세 칠일인지 지났을 때 최근에 결혼한 육촌 시누이와 또 사촌 시누이가 아기를 보러 왔다. 분홍치마 저고리를 입은 아기를 보고 감탄을 하며,

"이 아기는 복도 많다." 했다.

나는 아기를 키우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갓난아기는 감염이 잘 된다고 들었기 때문에 젖을 먹이기 전에 꼭 붕산수로 닦고 애기에게 젓을 물리는 둥.

요번 아기는 친정 올케가 태중이어서 친정에 가지 않고 시댁에서 낳게 되었는데 해산구완하시는 어머님께서 아기를 낳은 그 이튿날 새벽에 미역국을 끓여서 한 그릇 가지고 오셨다. 나는 새벽 참을 먹는 습관도 없었고 첫 아기 때도 삼시 세 끼 밖에 먹을 수 없었고 미역국은 한 그릇도 먹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님께 사양하는 말씀을 드렸더니 아주 섭섭해 하셨다. 어른이 일부러 차려왔는데 먹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셨다. 할 수 없이 식욕이 전혀 없어 내키지 않는데도 억지로 좀 먹었는데 첫 아기 임신 초기( 입덧할 때) 닭 고아 주신 것을 억지로 먹은 때 설사를 한 것처럼 설사를 하게 되었다. 출산한 이튿날부터 설사 때문에 미역국을 전혀 먹지 못했다. 미역국은 아빠와 아들 두 부자가 먹었다. 어머님께서 혀를 차시며,

"산모는 미역국을 못 먹고 다른 사람이 잘 먹네." 하셨다.

별로 먹는 것도 없고 설사를 하는데도 젖이 잘 나 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아기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그러나 아기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기 눈에 눈물이 항상 가랑가랑하며 염증이 있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작은 아들이 그래서 무당에게 물어보았다니 점을 쳐보고 손 있는 방향에 못을 박아서 그렇다고 해서 푸닥거리를 했더니 나았다고 무당에게 물으러 가야 한다고 하셨다. 푸닥거리하고 나면 곧 나을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 싫었다. 눈 때문에 한 달 반을 병원에 다녔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의사에게 갔더니 뜨듯한 소금물로 매일 찜질이라도 해보시오."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날부터 나는 또 한 달 반 동안을 매일 아침 화롯불을 정성스럽게 담고 찜질을 해 보았으나 아무 나아가는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염증은 더 심해가는 듯 느껴졌다. 벌서 계절은 보리와 밀 타작 그리고 모내기 할 철이 다가왔다. 찜질을 하며 아기 눈이 어떻게 잘못 되는 것같이 안타까웠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그이에게,

"여보, 아무래도 대구의 안과 전문의에게 가서 진찰을 받아 봐야 될 것 같아요." 하고 안타까이 말했다. 그이는,

"지금은 너무 바쁜 때니 보리타작과 모내기가 끝나면 가보는 것이 어떻겠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 심정은 일초도 급한 마음이었다. 나는 세상에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무 말도 않고 나는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여보, 아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와 보구려."

그이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대답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기의 눈이 이렇게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애타는 내 심정을 이해해 주고 즉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그이가 야속했다.

'와지끈 와지끈 우르르!'

많은 물건이 쏟아지고 부딪치는 소리가 방으로부터 들려왔다. 나는 아기를 안고 뒤란에서 걷고 있었는데 어머님의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면 들어와야지 왜 안 들어와서 이러는 거냐!"

방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경대 서랍도 옷장 서랍도 다 방바닥에 던져져 있었고 물건들은 다 온 방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어머님은 아드님에게 야단을 치시며 또 며느리에게 야단을 치셨다. 나는 방에 들어가자 방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울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 이튿날 우리는 아기의 눈이 깨끗하게 나아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 아팠더냐는 듯 깨끗하고 맑은 눈이 되어있었다. 늘 눈물이 가랑가랑하던 것도 자취를 감추고 염증도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우리 어머님의 말씀이 참으로 어머님의 깨달음을 표현한 명언이었다.

"진작 그렇게 할 것이지. 귀신도 이 집에는 붙어 있어봐야 먹을 것도 없구만 하고 도망쳤구만." 하셨다.

귀신도 세게 나오는 이 집 주인을 겁내서 도망친 모양이었다. 소동은 일어났지만 아기의 눈이 일조에 나아서 우리는 행복한 매일을 살아갔다. 그이는 딸이 참 귀엽다고 하였다. 자기 배에 올려놓고 귀여워하였다. 아들은 동생하고 4년 5개월쯤 차이가 있었으므로 동생을 귀여워하였다. 어머님도 당신의 따님이 없었으므로 손녀를 무척 귀여워 하셨다. 아들만을 크게 존중히 여기던 집안이었는데 이대(二代) 만에 딸로 태어난 이 아이만은 예외인 듯 귀여움 받으며 자라나는 아기의 이름은 귀주였다. 귀할 귀(貴) 자(字), 구슬 주(珠) 자(字), 그이가 나에게 이름 짓는 특권을 주어 지은 이름이었다.

아기의 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치 앞의 일도 모르고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랄까? 우리 집을 삼키려는 쯔나미가 전속력(全速力)으로 달려오고 있는데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한 때를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제 2부 끝-
작성자 : 정무흠        2018-08-12 06:38
등록된 답글이 없습니다.
Load
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제휴 및 문의 |  웹사이트 배너
Copyright © 2024 8healthplans.com. New York, US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