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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 - moo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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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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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1부 출생과 배경 - 박옥종 집사님 자서전* (정무흠 목사의 어머니)
***그 영광의 빛 속으로 제 1부 출생과 배경 - 박옥종 집사님 자서전*** (정무흠 목사의 어머니)

제 1 부

첫 번째 꿈

가로수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한 길을 소녀는 걸어가고 있었다. 지치고 지쳐 이제 막 쓰러지려는 듯 가까스로 떼어놓는 발은 이미 감각을 잃어버렸고 의식조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늘을 외로이 흘러가는 달, 그리고 소녀뿐이었다.

달깍! 달깍! 달깍!

아득히 작던 그 소리는 차츰 커져갔다. 그리고 또한 나는 듯 빨라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소녀는 쓸쓸한 달밫 아래 홀로 아슬아슬 가고 있었다.

기사가 말에서 뛰어내린 것과 소녀가 쓰러진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 같았지만 용케도 기사는 쓰러지는 소녀를 받았다. 쓰러지는 소녀를 구원한 기사는 다시 마상의 사람이 되어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하였다.

결혼식이 내일 모래로 임박한 그날 밤, 그녀는 이 꿈을 꾸고 꿈속에 나타났던 그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쓰며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 초야, 산악같이 늠름한 신랑의 품 안에서 인연이란 말로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신의 섭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동란은 그녀의 냠편와 그녀의 꿈을 앗아갔다. 어려웠던 5년의 수련기간이 지나고, 삶의 길로 자신을 채찍질하던 또 5년, 눈물과 한숨의 계곡, 1년 또 1년 체념을 쌓아가던 햇수 동안 그녀의 상념 속에 이 꿈은 늘 재생되곤 하였다.

늙음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왔다. 애타던 것도 슬프던 것도 점차 완화되어갔지만 외로움만은 남아 있어서 이별이라는 말만 들어도 아찔해질 정도였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올 시간에 돌아오지 않거나 외출한 저녁이면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있지 못하여 골목 끝에 나와 서서 한길을 바라보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 날 저녁이면 마음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것이었다.

신앙은 외로운 사람에게 항구와 같은 것이었다. 외로운 조각배가 풍랑 가운데 시달리다가 마침내 항구를 만나는 기쁨, 그러나 때때로 그 항구의 물결도 뛰었다. 매어 있는 줄은 끊어질 듯 풍랑은 심하였다. 낙심하여 그녀는 생(生)을 단념하려한 때도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앙 가운데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이 죄라는 것을 배웠다. 죄 많은 사람이 또 하나의 죄를 범하는 것이 두려워 그녀는 자신을 이미 죽은 줄로 여기고 다시 살기로 결심하곤 했다.

1 장

1. 나의 출생과 배경

나는 대한민국의 동남쪽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청에 근무하고 계셨고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학자이셨는데 부유하고 존경 받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나 강보에 싸여 있던 시절 어머니를 잃으셨다. 그래서 할아버지(나의 고조부님)께서 손자를 품에 품으시고 잠자리에 드시곤 하셨다고 한다. 나의 고조부님은 도량이 넓으시고 정직한, 모든 사람에게 생활로써 모본을 끼치시는 그런 분이었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의 소년시절에 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리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의 아버지(나의 증조부)는 남의 보증을 서셔서 일조에 그 재산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제까지 귀공자로 자라온 할아버지는 갑자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셨다.

나의 할아버지는 배운 것이 글 밖에 없었으므로 평생을 글을 읽으시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가난하게 사셨다. 나의 할머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분이었다고 고모님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어려운 생활로 고생하시다가 4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맏아들이셨는데 유년시절부터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또 틀림없이 알성 장운(壯元) 급제할 인재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자라났으나 우리나라에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비극이 닥쳤으니 과거(科擧) 한 번 볼 기회도 만나보지 못하고 망국(亡國)의 설움과 한을 안아야만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버지는 할머니 기일(忌日) 때마다 비통하게 우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 울음소리를 들을 때 내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육, 칠십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인생의 슬픔과 아픔, 이별의 고통을 겪고난 나도 아버지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소년 시절이 되셨을 때 일본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서 분탕질을 하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마을 사람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일본 군인들이 와서 너희 집의 닭을 가져갔다."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쏜살같이 달려가 그들에게 따라 미치자 그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닭을 돌려라."

"이 개새끼!" 그 누구도 감히 그들의 총기 앞에 아무 말 못하고 빼앗기는데 새파란 소년이 겁도 없이 덤볐으니 분노한 일병은 총을 쏘았다. 동작이 민첩한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담을 뛰어넘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17 세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일을 원치 않으셨다. 아버지는 더 큰 소망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는 청운의 꿈을 가지고 한양(서울의 옛 이름)으로 떠났다. 보행으로 걷는 그 길은 멀었다. 여러 날 만에 충청도에 이르렀다. 한 지체 높은 집의 객실을 찾아들게 되었다. 판서를 지난 집이었고 그 객실에는 여러 과객이 머물고 있었다. 그날 밤 한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내놓았는데 아무도 못 푸는 그 문제를 가장 연소한 소년이 풀자 다 깜짝 놀라고 아버지는 두 손자의 스승으로 있어 달라는 간곡한 청에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판서 부인은 손자들의 스승인 아버지를 친손자같이 사랑하고 머리도 땋아주고 하였다고 한다. 몇 달간 그곳에서 지난 후의 어느 날 바깥에 나가보니 개화된 세상에 머리를 땋아 늘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느끼셨다. 아버지는 이발소에서 단발을 하였다. 판서 댁에 돌아오니 판서 부인이 얼마나 서운해 하는지…

아버지는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고 느꼈다. 극진한 대접과 정에 못 이겨 이제까지 떠나지 못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좋은 기회가 온 것이라고 느끼셨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 고향에도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섰다는 기별을 받았다. 아버지는 직시 고향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집에 도착하자 곧 입학 수속을 하였다. 학교가 집에서 20 리 이상 먼 거리여서 통학하기가 불가능하여 학교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서 자취를 시작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부모님이 주신 쌀 한 자루를 둘러메고 읍내로 돌아가고 있었다. 문득 아버지 마음에 '지금이 춘궁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던 길을 되돌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 몰래 뒤란 처마 밑에 쌀자루를 놓고 되돌아 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자취하는 집으로 가면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아니할 수 없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아니하였다. 읍내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부자가 학교 선생님에게 손자들의 공부를 보아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선생님은 자기보다 학문의 조예(造詣)가 더 깊은 제자가 있노라고 아버지를 추천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손자들의 가정교사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고 졸업할 때까지 아무 염려 없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4년 걸려야 마칠 수 있는 공부를 2년에 다 마쳤다. 그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신실히 가르쳐 책임을 다하셨다. 그리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좋은 직장도 얻게 되었다. 그 시험에는 많은 사람들이 응시(應試)헸는데 신사복을 차려 입고 금태 안경을 쓰고 멋진 지팡이를 짚고 온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검정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가셨는데 그 두루마기도 대구까지 가서 친척집에서 빌려 입고 가셨다니 얼마나 가난한 형편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아버지께서 평생에 가난한 이웃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것도 당신이 겪으셨던 가난의 뼈저림이 두고두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었으리라!

아버지는 스물두 살에 결혼을 하셨다. 신부는 열아홉이었다. 신부의 아버지 곧 나의 외할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누님 집에서 자라났다. 자형(姉兄)은 부자였으나 처남(妻男)에게는 후하지 않았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남달랐던 소년은 여물 솥에 불을 지피며 틈틈이 책을 보았다. 그것을 본 자형(姉兄)은 여물이 더디 끓는다는 이유로 책을 못 보도록 금지시켰다. 하루 일을 마치고 자기 전에 책을 보았다. 자형(姉兄)은 다시 기름이 닳는다고 못하게 하였다. 소년은 놀고 있는 땅에 피마자를 심었다. 누님에게 기름을 짜달라고 부탁하여 밤이면 불을 켜서 공부를 하였다. 그랬더니 이제 자형(姉兄)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 그래서 소년은 거적때기로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가리고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친절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분이었다. 자형도 그 인품은 믿었었는지 중요한 심부름은 다 처남을 보냈다.

영천에 유명한 한의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의원은 나병도 고치고 장님도 고칠 수 있는 용한 의원이라 하였다. 자형의 집은 대가족이였는지라 의원을 찾아가야 할 일도 자주 있었다. 그 의원은 안동에서 심부름 오는 젊은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성실한 청년의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양심을 보았다.

의원에게는 혼기에 이르러 있는 딸이 있었다. 경주에서 영천으로 옮겨오기 전에 홍 진사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으나 호강스럽게 자라난 세도 있는 집 자제가 자칫 자기 아내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수가 있다고 생각한 의원은 미혼인 딸을 가마에 태워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비록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그 누님 집에서 자라났다고는 하나 매우 장래가 촉망되는 성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다. 의원은 그 젊은이를 사위로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그 의원의 사위가 되었다. 의원은 사위에게 살 집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에게 좋은 내조자가 되었고 외할아버지에게 평생 결코 기운 옷을 입혀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결혼식 날 입은 옷 안감이 기워져 있던 것을 첫날밤에 보았기 때문에 '내 평생 남편에겐 기운 옷을 잎혀 드리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맹세하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그분의 아내를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첫 자녀이셨고 외할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분이셨다. 그러므로 젊을 때는 남보다 무척 일을 많이 하셨다. 손수 논도 만들고 밭도 만드시고 쉴 사이 없이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도 틈틈이 열심히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주경야독(晝耕夜讀)하시며 존경받는 인물이 되셨던 것이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시는 분이셨다. 외할아버지 자신이 고아로 자라나셨기 때문에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많았다. 그 마을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사는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중병으로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남편 생전에 열녀라는 소문이 나 있던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과부의 조그마한 논뙈기를 머슴을 시켜 돌보게 하며 또 그 모자는 할아버지지 집의 일을 도우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 아들이 자라날 동안 도우셨다. 그래서 그 아들이 장성했을 때는 자기 논밭에서 농사지을 수 있을 만큼 불어나도록 모든 것을 돌보아주셨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외할머니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고 우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사촌을 통하여 들으니 그 아들 부부는 그들의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운 자녀였으며 그의 자녀들도 다 좋은 아이들이라고 들었다. 나는 이것이 다 할아버지의 유덕으로 말미암은 열매라고 느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방학이 오면 외할아버지 집을 방문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방학이 가까워 오면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는 언제나 친할아버지 댁에 먼저 가고 외할아버지 댁은 그 다음에 갔다. 친할아버지 집에서는 사흘 동안 있는 것도 지루해서 간신히 참고 있는 판이었다. 친할아버지 집은 들 복판에 있었는데 붉은 흙은 비만 오면 찰떡같이 들어붙는데 나무도 거의 보이지 않고 살풍경한 그곳에 우리는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두 오빠와 나는 빨리 외가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외할아버지 집은 골안이라는 마을 이름과 같이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이었다. 우리는 산에도 올라가고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도랑물에서 물방아를 만들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즐기기도 하였다. 또 원두밭에 가서 원두막에 올라앉자 잘 익은 참외와 수박을 원두막 옆을 지나가는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물에 담가 두었다가 꺼내와서 먹었다. 참으로 그 맛은 각별하였다. 아마 내 평생 먹은 참외 수박 중에 최고의 맛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곳에서 (외가에서) 즐겁게 놀며 즐겁게 얘기하며 방학 동안을 즐겼다.


2. 나의 이름의 유래(由來)

나는 1924년 10월 9일에 태어났다. 갑자년 자시였다고 나의 어머님께서 말씀 하셨다. 나의 어머니에게는 네 번째의 출산이었는데 아들을 셋 낳은 후에 딸을 낳은 것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는 골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섯녘이라는 마을이었다.

내게는 두 이름이 있었는데, 하나는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은 소학(小學)에서 유래된 '종애(鐘愛)라는 이름이었고, 외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은 '옥종(玉鐘)'이라는 이름이었다. 옥종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꿈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였다. 산월이 가까워왔을 때 어머니의 배에 통증이 있었다고 하내다. 그럴 때마다 꿈속에서 옥황상제가 보낸 사자가 어머니의 배를 만져주었고, 그러면 어머니의 통증은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내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믿으신 외할아버지께서는 나의 이름을 지으시면서 '옥(玉)' 자와 항렬을 따른'종(鐘)'자를 합쳐서 ‘옥종(玉鐘)’이라고 지으셨다 한다.

호적에 오른 이름은 종애라는 이름이었지만, 나는 주로 옥종으로 불렸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나는 몸이 약하고 자주 앓았는데, 아버지는 종애라는 이름 때문에 내가 자주 앓는다고 생각하셨는지 호적의 나의 이름도 옥종으로 고치셨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종애로 불리다가 2학년 때부터 옥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종애라는 이름은 나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내가 사십 몇 살 쯤 되었을 때 대구의 아는 집에서 우연히 작명책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종애라는 이름이 너무 사랑을 쏟아 붓는다는 뜻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늘 아프다고 적혀 있었고 옥종이라는 이름은 점점 창성해지는 이름이라 적혀 있었다. 하도 병치레를 하고 약하니 아버지도 걱정이 되셔서 작명책을 보셨던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이름의 유래로 나는 나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3. 나의 유년 시절과 소녀 시절

나는 다섯 살 때까지 섯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나는 그 작은 마을에서 살던 시절의 몇 가지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자주 아픈 딸을 위하여 골안의 샘 옆에 있는 향나무 아래 상을 차려 놓고 딸의 명을 빌었다. 한 번은 엄마를 찾아서 거예댁이라는 사람의 집에 갔는데 그 집에서 기르고 있는 거위가 나를 보자 ‘꿱! 꿱!’ 소리를 지르며 뒤뚱 걸음이라도 어린 내게는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내 치마를 물었다. 나는 질겁을 하고 “엄마!”하고 울어버렸다.

어머니는 세 아들을 낳으신 후에 나를 낳으셨는데 둘 째 아들을 잃으셨다. 다섯 살이었다 한다. 내가 나기 전이었으니 나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다. 그는 매우 총명하고 말을 하기 전에 벌써 글자를 알고 그 글자를 가리켰다고 한다.

어느 날 나의 두 오빠가 못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는데 나는 못 가에서 두 오빠와 다른 소년들의 헤엄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큰 소동이 벌어졌다. 나의 오빠들과 모든 소년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던 그 찰나에 마침 거기를 지나가시던 나의 어머니의 외삼촌이 나를 건져내셨다고 한다. 나는 정신을 잃었었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갔던 때까지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나의 생에에서 물에 빠진 적이 세 번 있다. 나는 그 때마다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였다.

두 번째 사건은 경남 삼랑진으로 이사 간 후에 일어났다. 우리는 겨울철에 이사를 하였다. 3, 4월의 봄철이 지나고 5월도 가고 단오절(음력 5월 5일)이 가까웠다. 단오 전날 우리 집에서 일하는 언니와 이웃의 언니들이 창포를 뽑으러 가는데 따라갔다. 나는 아직 만 다섯 살이 되기 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내게 아직 어린 아이들이 입는 돌띠를 매는 저고리를 입혀 놓았었다.

이 시절에 단오 전날엔 여자들이 창포와 수양버들 등을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단옷날 창포 뿌리와 궁궁이를 머리에 꽂고 분꽃 열매의 분을 아침 이슬에 곱게 개서 화장하고 단옷날을 맞이하였다. 처녀들은 빨간 댕기를 드린 긴 머리채를 바람에 휘날리며 신나게 그네를 뛰었다.

다섯 살 난 어린 아이였던 내가 언니들을 따라가서 작은 못가에 뿌리 부분의 색깔이 참 고운 창포를 발견하고 그것을 뽑으려고 두 손으로 꼭 잡고 당겼는데 창포 뿌리가 뽑히면서 곤두박질을 쳤던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가까이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은 창포들이 진흙 위에 자라나 창포밭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고, 인가(人家)에서도 도로(道路)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곳이었다. 비록 작은 연못이었지만,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깊었기 때문에 언니들은 못가에서 물만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세 번을 떠오른다고 했는데 내가 몇 번째 떠올랐을 때 건져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언니들이 나의 저고리의 돌띠를 잡고 건져 올렸다고 하였다. 명선언니 등에 업혀서 집에 돌아오면서 의식이 분명해졌고 그 언니 등에 업혀서 발쟁이 집(제과점) 앞과 우체국 앞을 지나온 것이 생각난다.

다섯 살 때는 나의 유년 시절에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해였다. 첫 째 경북 섯녘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경남의 좀 큰 송지라는 마을로 이사를 간 것이고 물에 빠졌다가 우리 어머니가 돌띠를 매는 저고리를 입혀 놓으신 덕분에 살아났고 그 다음 또 재난이 닥쳐왔다.

나는 봄 4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이름은 삼랑진 보통학교였다.

나는 거의 타의에 의해 5살 때(한국식으로 일곱 살이였을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 당시는 학교가 학생들 모집하러 다녔었다. 집집 방문을 하여 학교에 보내라고 간청을 하니 그 지극한 성의에 감동하여 나의 부모님이 어린 나를 학교에 입학시키신 것 같다. 학교 입학할 때도 어머니가 따라가셨다. 나의 담임선생님은 우리 집 남쪽 울타리에서 자주 뵐 수 있는 동네 우물에 잘 나타나시는 여선생님이었다. 내가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언제나 미소와 친절한 말을 보내주는 분이었는데 주선생님이라는 분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물난리가 났다. 낙동강이 범람한 것이었다. 우리 방에 물이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집에 있었다. 방에 물을 퍼내고 있었으나 마침내 집을 떠나 역으로 향하였다. 큰오빠의 손에 이끌려 물속을 걸어갔던 생각이 난다. 우리는 삼랑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외가에 가서 여름을 났다. 그 여름을 사촌들과 신나게 재미있게 보냈다.

나는 1학년을 두 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주 아파서 학교에서 업혀 돌아오기가 너무 잦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마침내 1년을 더 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리셨고 나는 건강 때문에 1년을 더 1학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의 담임선생님은 이정경 선생님이라는 분이셨는데, 그분의 향기가 오래 남아 있던 분이다. 그분의 고향은 경남 진주였는데, 일본 경도 여자 고등사범을 다녔었다고 들었다. 취임하실 때 이선생님의 아버님도 같이 오셔서 조례 시간에 이선생님을 소개하는 시간에 그 아버님도 소개되었고 교감선생님이 아버님께 한 말씀 하시라고 하시자 그분이 말씀을 하셨는데 당당한 풍채에 두루마기를 입으셨고 아주 점잖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이선생님은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하신 아름다운 분이었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답고 순결하고 향기로운 처녀로 약 5년 동안 우리 학교에 계셨다. 그리고 1, 3, 4학년 3년 동안 우리의 담임 성생님으로서 수고하셨다. 우리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해주실 수 있는 실력 있는 선생님이었고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이선생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다시 1학년을 되풀이할 때 나는 그 반의 급장이 되었다. 그러나 또 여러 날 아파서 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 병원에도 여러 날 가야만 했다. 선생님은 양과자를 한 상자 들고 문병을 오셨다. 선생님이 가신 후 작은 오빠가 양과자 상자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못 먹겠다고 했다. 오빠는 “그러면 우리가 먹는다.” 했다. 나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들은 나를 사랑했다. 여름이면 학질에 잘 걸렸다. 자지 못하도록 어른들이 깨우곤 했는데, “얘기 해줄게 눈 뜨고 들어봐.”하고는 작은 오빠가 나에게 장발장 (레미제라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이야기를 좋아하던 나는 학질에 걸렸을 때 오빠 이야기로 잠을 이기고 병을 이겼다.

이선생님의 언니와 어머니는 이웃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우리 다리미가 무거워서 다림질이 잘 된다고 그 언니는 우리 다리미를 빌려다가 옷을 다리곤 했다. 선생님의 형부는 독립지사(獨立志士)였는데 서울에서 형을 살고 있다고 들었다. 언니는 수경이라는 딸을 데리고 동생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아들은 나와 동갑인데 진주 외가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공부는 1등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방학 때 그 조카가 왔을 때 선생님이 그 학생과 나 두 사람 중 누가 더 실력이 있는지 시험을 쳐본 적이 있다. 누가 더 잘했는지 그 결과는 알려 주지 않으셨다.

2학년 때는 일본인 여선생님이 담임이었다. 그분의 성함은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그 얼굴 모습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그 선생님의 성함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 그분의 이름에 명예를 드리지 못하는 얘기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2학년이 끝날 때, 그 당시 학년말의 종업식과 졸업식이 같은 날에 있었다. 그리고 통례적으로 종업식 때 그 학급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학생이 학급 대표로 통지표를 받으러 나가게 되어 있었다. 졸업식과 종업식 얼마 전에 담임선생님이 나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상희를 부르시더니 ‘쟝 껭 뽕’(가위 바위 보)을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순종하여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상희가 이겼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번엔 상희가 반대표로 통지표를 받으러 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졸업식과 종업식이 있던 날 아침 우리는 조례를 위하여 교정에서 정렬하고 있었다. 상희는 예쁜 초록빛 모본단 저고리를 입고 서 있었다. 우리는 복식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교실에서 함께 생활하던 4학년 언니들이, “가시나, 네가 일등도 아니면서 통지표 받으러 나갈라꼬 비단 저고리 입고 왔나?” 하며 상희의 비단저고리 소매를 교대로 잡아당겼다. 상희하고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나는 상희를 동정하는 마음이 되었다. ‘선생님이 한 일이지 상희가 한 일이 아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학교에 얼굴 한 번 안 내비치는 분이었고 상희 아버지는 우리 면의 한 기관장이셨고 학교에서 무슨 특별행사가 있을 적마다 오셔서 축사도 하시고 그 집에서는 모든 생활이 우리보다 앞선 신식인 분들이었다. 상희 부모님도 나를 좋아하셨고 우리 집에서도 상희를 좋아하여 나는 겨울 방학에 상희 집에서 하룻밤 자는 허락도 받아 그 집에서 일식 떡국도 먹어보았다. 상희 언니도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마산 고녀에 갔고, 그 오빠는 우리 작은 오빠와 비슷한 나이였는데 나중에 진주 고보에 갔다. 우리 작은 오빠는 대구 고보로 갔다.

나는 3학년 때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나는 그것이 왕따인 것을 이제야 아는 감각이 둔한 사람이지만) 청소 당번이 되면 책상 걸상을 뒤로 밀어붙이고 앞자리를 쓸고 닦아야 한다. 그런데 책상을 뒤로 밀어붙이고 나면 아이들은 뒤로 붙여놓은 책걸상 사이에서 재미난 놀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얌전이 혼자 청소하게 두어라.”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 혼자 앞자리를 쓸고 닦아야만 하였다. 앞자리 청소가 끝나면 앞으로 책걸상을 끌어오는 것은 같이 하였다. 청소가 다 끝나면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보고를 드려야만 했다. 내가 교무실에 갔다 오면 아이들은 일렬로 정숙히 복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급장이었고 청소반장이었던 나는 모든 것은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같은 마을에 사는 임술이가 나보다 두서너 발짝 앞서 걸어가며 방귀를 뿡뿡 뀌어대는 것이었다. 그것이 싫었던 나는 달려서 그녀를 앞설라치면 나보다 나이도 많고 다리도 길었던 그녀는 자기도 달려서 나를 앞지르고 또 앞서가며 방귀를 뀌어대는 것이었다. 내가 달려서 앞서면 그녀가 다시 달려서 앞서가며 방귀를 뀌어대고 내가 또 달리고 하는 일을 되풀이하며 우리 마을까지 오게 된다. 그녀가 자기 집에 들어가고 나면 얼마 되지 않는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평화롭게 올 수 있었다. 그리고 혹 그녀가 결석하는 날엔 뽕나무 밭 옆 그 조용한 길을 나는 명상하며 걸어올 수 있었다.

5, 6학년 때는 남자들과 한 반에서 공부했다. 장가가서 공부하는 남학생도 한 사람 있었다.

몸이 약하였던 나는 운동보다 독서를 좋아하였다. 아버지는 옛날 그 시절로 말하자면 장서도 꽤 많으셨고 우리를 위해서도 좋은 책을 주문해서 읽도록 해주셨다. 나는 옛날 얘기 듣기를 무척 좋아하였고 자다가고 벌떡 일어날 정도로 또 아프다가도 초롱초롱해질 정도로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책을 읽는 시간에는 정말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좋은 책만 있으면 나에게 읽으라고 갖다 주셨다. 그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얘기는 일본에 주문하여 매 달 오는 책이었는데, 일어로 “고도모노 도오와”(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라는 책이었다. 그중에 잊혀지지 않는 얘기는 파랑새(행복의 새)를 찾는 이야기였는데 주인공은 한 소년과 한 소녀였고 이름은 “찌르찌르”와 “미찌르”였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그 새는 찾았지만 결국 그 새를 놓쳐버리는데서 이야기가 끝나 아주 아쉬운 마음이 되었었는데 이제사 그 모든 문제가 하나님 안에서 해결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열쇠를 가진 것이나 다름 없으니 참으로 진리 안에 거하는 자는 행복자요 승리자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여고시절에 아버지께서 읽으라고 주신 책 중에서는 “쯔르미 유우스께”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었는데 전(前)편은 어머니(母), 후편은 아들(子)이라는 제목으로 된 책이었다. 저자가 자기 생애를 통한 얘기를 쓴 것이라고 들었는데 가즈꼬라는 이름을 가진 그 어머니는 참으로 품성이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그 부드럽고 남을 돌아보며 자신을 희생하며 자기의 두 자녀를 그 고난 속에서도 잘 키우는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아름다운 여운으로 남아있는 이야기였다. 그러한 향기로운 이야기를 담은 책을 딸을 위하여 읽도록 배려재주시고 사춘기에 선(善)을 위한 싹이 잘 자라도록 지도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2 장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2)


1. 천의(天意)는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만 다섯 살 때)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노래를 배웠다. 담임선생님이었던 주선생님은 노래만 가르치셨지 다른 설명은 하시지 않았다. 그 때 배웠던 다른 노래는 하나도 기억하는 것이 없는데, 이 노래만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를 따라 갔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어떤 초가집 온돌방에서 일어서서 찬송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고 계속 갔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밤에는 금족령이 내려져 있는 어린 시절이었는지라 다시는 가지 못 했다.

동녘이 밝아오며 신비롭게 아침이 열릴 때 그 웅장한 광경 속에서, 저녁노을이 섯녘 하늘을 물들일 때 하늘 궁정이 저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꿈꾸며, 밤하늘의 별들과 달을 보며, 초목과 꽃들과 사계(四季)의 변화와 모든 천연계 속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그림들 속에서, ‘누군가, 어떤 분인지?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지키시는 분이 계시리라. 자연히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책을 많이 읽고 자라면서 꿈꾸며 생각하며 신비로운 존재자가 누구인지 참으로 알고 싶었으나 아버지께도 여쭤 볼 수가 없었고 어머니와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이 꼭 하고 싶은 말이나 꼭 필요한 것을 말할 용기도 가지지 못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은 온 가족이 수박을 먹는 소리가 났다. 낮 동안에 큰 수박을 찬물에 담가 식히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날따라 나는 피곤해서 잠들어 있었다. 수박 먹는 소리에 잠을 깼지만 일어나지를 못했다. 얼마나 수박이 먹고 싶었는지 그래도 못 일어났다. 먹고 싶으니 그럴수록 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일 꼭 그 돈이 필요하다든가 꼭 그 말씀을 드려야겠다 생각하면 정말 말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엄하시니까 더욱 더 그랬다.

내가 여고를 다닐 때 딱 한 번 음악 성적이 갑이 나왔다. 계속 을만 받던 음악을 단 한 번 갑 받은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왜 계속 을만 받았는가 하면 음악 시험은 언제나 노래를 부르게 하여 그것으로 채점을 하였다. 그런데 앞에 나가서 노래 불러야 하는 그 시간에 도저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선생님이 두 번, 세 번, 나중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노기충천하여 건반을 두들기셔도, 그러면 그럴수록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버리는, 그토록 숫기가 없는 나의 성격이 나 자신도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늘 을만 받았던 것이다. 단 한 번의 갑은 필기시험을(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단 한 번 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공부 시간엔 손도 들고 분명하게 대답도 해서 학과 공부는 지장 없이 잘 해나갔다.

첫 번째 물 피난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갔고 두 번째 물 피난은 4학년 때 갔다. 두 번째 물 피난은 처음에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회사 사무실 2층에 가서 있는 동안 검정깨가 드문드문 섞인 알맞은 간으로 뭉친 주먹밥을 나라즈께(오이지)와 함께 주었는데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꿀맛이었다. 수박, 참외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건져서 먹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먹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배탈 난다고 못 먹게 하셔서 우리는 먹지 않았다.

경산에 잠깐 가 있다가 밀양에서 전셋집을 얻어 4학년 2학기부터 밀양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밀양에서 참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제일 키가 크고 나이도 제일 위인 박수진, 엄금순, 손숙문, 표계환, 그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었는데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끼리만 아주 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갔는데도 자기들 동아리에 끼워주고 옛날부터 사귄 친구처럼 스스럼없게 만들어 주었다. 나같이 수줍어하는 사람을 도무지 어려워하지 않게끔 진심으로 마음 문을 열고 반겨주고 돌보아 주었다.

나는 지금도 밀양보통학교의 그 분위기와 그 친구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중에도 계환이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계환이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계환이 아버지 어머니는 신식이시고 멋쟁이시라고 느꼈으며 계환이도 우리 중에서 가장 멋쟁이였다. 계환이는 나중에 이화여대로 갔고 오랫동안 서로 편지 연락도 했는데 내가 스산한 세월을 사는 동안 친구들과도 연락할 겨를이 없어 이제 그 친구의 소식도 묘연하다.

금순이는 그 언니가 효대 교수로 계실 때 언니 집에 다니러 와서 나와 만난 적이 있다. 언니도 훌륭한 분이었고 금순이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정원을 정성스레 가꾸어 놓았는지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꽃나무를 심는 것을 그 날 보고 나도 어떻게 화초를 심으며 가꾸는지 많이 배웠다. 금순이도 지금 어디에 있는지 참 보고 싶다.

겨울 방학 때 맞은 양력 설날 선생님 집에 가서 일식 떡국(오조오니)를 먹었다. 담임선생님은 일본인 여선생님이었는데 부드럽고 좋은 분이었다. 우리 다섯 명은 선생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고 금순이 집에서도 떡국을 먹고 수진이 집에 가서는 참으로 재미있게 놀았다. 동굴처럼 생긴 곳이 있었는데 너무 신기해서 우리는 거기서 신나게 놀았다.

드디어 삼랑진의 우리 집이 수리가 다 되어서 나는 밀양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그 전셋집을 떠나 삼랑진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러나 5학년이 시작될 때 삼랑진 보통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차 통학을 해야만 했다.

어느 날 학교가 일찍 끝나서 나는 낮 시간에 밀양역에서 출발하는 기동차를 타려고 서둘러서 역으로 갔다. 학교는 삼문동에 있었는데 역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내 생각에 5 리는 족히 되는 거리였던 것 같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달리기도 하며 헐레벌떡 역 건물 안에 뛰어 들어갔다. 기동차가 거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기동차는 내가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그 순간 ‘뽀옹!’ 소리와 함께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정말 무정하였다. 기동차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면 부르면 좀 지체하며 같이 가 줄 수도 있었겠는데……. 얼마나 속상한지 몇 시간을 역 대합실에서 기다릴 생각을 하니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걸어가면 되지, 신작로만 따라가면 될 거야.’

나는 기다리는 것보다 걸어가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여 신작로로 나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갔는데 멀리 동네들이 보이고 신작로 가까이는 논밭들이었다. 저 건너편에 기차선로가 보였다. 아무 사람도 못 만나고 혼자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야야~! 야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철로 길을 따라 걷고 있던 흰 두루마기 입은 어른이 멈추어 서서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야야, 너 어디로 가는 거냐?”

“삼랑진 송지리로 가고 있습니다.”

“뭐라고? 너 밤새도록 가도 못 갈 거다. 밤에 호랑이도 나오고 하는데…….”

“신작로만 따라가면 되지요.”

“야야, 이리 건너오너라. 신작로는 둘러가는 길이 돼서 엄청 먼 길이다.”

나는 할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여 그 쪽으로 건너가서 걸어가며 할아버지와 대화하며 걷는 가운데 아버지 성함을 물으시기에 가르쳐 드렸더니 잘 안다 하시며 더 친절히 대해주셨다. 그러나 굴 앞에서 할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산 안쪽에 있는 마을에 사시고 나는 산을 넘어서 신작로가 나오면 신작로만 따라가면 우리 집에 갈 수 있다고 하셨다.

산 앞에서 할아버지와 헤어져 나는 산을 넘어갔다. 소나무와 또 다른 나무들이 우거져 산속은 어두컴컴하였다. 나는 굴 위의 산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산속에서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을 싹 지나가셨는데, 나는 구석 할머니 생각이 나서 오싹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할머니를 스쳐 지나왔다. 그런데 할머니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 드디어 어두컴컴한 산속을 벗어나 신작로로 나왔다. 거기서부터 우리 집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사람이 없는 신작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도수장 옆을 지날 땐 도깨비불 생각이 나서 머리가 쭈뼛해졌지만 힘을 다해 달렸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세수하고 저녁을 먹고 공부하려고 방에 앉았는데 아버지께서,

“지금 기차 소리가 들리는데 너는 어떻게 왔느냐?” 하셨다. 걸어왔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께서 얼마나 꾸중하셨는지―정말 지금 내가 생각해도 내 자녀가 그렇게 하였다면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녀인 딸이 30 리나 되는 먼 길을, 굴을 둘이나 지나는, 산을 넘어야 하는 전혀 초행길을 신작로만 따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나섰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아찔한, 큰 일이 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아니었던가! 마침 할아버지 한 분(50여세나 된 분)을 만나서 같이 걷고 또 지도도 받았으니 망정이지―그래서 나는 어릴 때 아버지의 교훈을 받을 때는 언제나 내가 잘못했다고 마음에 느꼈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매 맞은 기억, 한 번은 학교에 지각을 해서 창피해서 교실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엔 본체하고 떨어진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아래층은 광이고 위층은 마룻방이었다. 봄철이라 햇빛이 쫙 들어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계단으로 올라가 그 마룻방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아무도 몰래 거기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날 아버지한테 회초리로 매를 맞았다. 어떻게 아버지께서 내가 거기 있는 것을 아셨는지 궁금했는데 내가 아무 연락도 없이 결석을 했으니 학교에서 선생님이 회사로 연락을 하셨던 모양이라고 오늘 지금 짐작이 간다.

또 한 번 학교에 가지 않아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때의 일이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일본인 여선생이었다. 3월 3일 전주(前週)에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이 인형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3월 3일에 히나마쯔리 (히나마쯔리, 인형제사―3월 3일의 여자 아이의 명절에 지내는 행사, 제단(祭壇)에 일본 옷을 입힌 작은 인형 등을 진열하고 떡, 감주, 복숭아꽃 등을 차려 놓음―)를 한다고 그 날 만든 인형들을 꼭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종이 인형들을 소중하게 내 책상 서랍 속에 간직했다. 그리고 3월 3일 아침 내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때 나는 다 망가진 인형을 보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나는 그 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나에게는 다섯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동생들은 자기들이 가지지 않은 진기한 것(?)을 누나가 가지고 있으면 아직도 어린 동생들은 그것이 신기해서 어떻게든 만져보고 연구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많았다. 내가 경남여고에 다니던 시절 만년필을 하나 샀는데 그것을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더니 망가뜨려 못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샀을 때는 동생들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필요할 때 집어서 썼다. 그러나 그 만년필도 얼마 못 가서 결국 못 쓰게 되었다. 하나는 엎드리고 하나는 형의 등에 올라서서 높은데 있는 물건도 내리는 것이었다. 동생들의 연구심에는 새로운 물건을 나 혼자 보관할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발랄하고 장난이 심한 그 동생들을 사랑했다. 내 소중한 물건들을 망가뜨려도 크게 야단을 칠 수 없었고 아버지께 말씀드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봤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의 흉을 보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리고 거친 말이나 욕을 하시는 것도 들은 적이 없고 어머니께서 나를 크게 꾸중하실 때 쓰시는 말은 “여식애가 그러면 안 된다”였다. 그러므로 누가 내게 손해를 끼쳤건 괴롭혔건 나 혼자 당하고 나 혼자 고민하고 말지 부모님에게나 오빠들에게 일러바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주신 작은 용돈으로 동생의 양말을 떠서 신긴다든지 예쁜 모자를 사서 씌워 본다든지 할 때 너무 기뻤다. 내가 사서 씌운 모자가 동생의 귀여운 얼굴을 더 귀엽게 보이게 해서 나는 정말 내 동생이 너무 귀여운 아기라고 믿었다.

동생들의 연구심은 중고등학교 시절까지도 식지 않았던 것 같다. 해방 후 우리는 영천으로 이사를 갔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옮겼던 것이다. 거기 있는 동안 여름 방학이 되어 동생들이 놀러왔다. 어머니가 보내신 바느질거리(동생들의 양복 할 것)를 한 보따리 가지고…….

나는 열두 살 때부터 동생들의 옷(교복, 속옷, 체육복 등)을 지어 입혀야 했다. 일제 말기엔 파는 양복이 없었고, 면 옷감 종류도 귀하고 구하기도 힘들어 집에서 베틀에 짠 무명베를 구해다가 물을 들여 양복점에 맞추어 입혀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성년이 된 큰 오빠 다음의 오빠만 고등학생이고 다섯 명의 나의 동생들과 또 외사촌이 하나 있었다. 도저히 그 많은 수의 아이들을 양복점에서 맞춰 입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재봉틀을 돌릴 줄도 모르시니 내가 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원래 바느질 같은 것에 취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책 읽기였고 뜨개질은 그런대로 괜찮게 한 것 같지만 바느질은 소질이 없었던 것 같은데 필요에 의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필요에 따라 훈련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일요일에는 공부보다 바느질을 더 한 것 같다. 우리 집에 재봉틀이 있던 것도 아니요 어머니가 바느질을 안 하셨으니(양말 같은 것 깁는 것 외에는) 재봉틀을 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살려고 해도 물자가 귀해 재봉틀 사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워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양산댁은 25세에 홀로 된 분이었다. 어머니보다 젊은 분이었지만 어머니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그분의 남편이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딸과 아들 남매를 키우시며 꿋꿋하게 살고 있었는데 제과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느질을 해야 되는 날엔 한참 걸어서 그 댁에 가서 그분이 일꾼을 데리고 과자들을 만드시는 동안 방에서 혼자 바느질을 하였다. 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옷에 맞춰 본을 떠서 동생들의 나이에 따라 조금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하여 그래도 어려움 없이 양복을 지어 입혔다. 동생들이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동생들 옷을 지어 입혔고 둘 째 동생이 직장에 다니며 여름 바지가 없어서 어렵다 해서 동생한테 천 값을 받아 시장에 가서 천을 끊어 낮에는 할 시간이 없어 밤에 지어 입혔다(그 당시엔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그 시절엔 젊어서 그랬는지 동생들뿐 아니라 시동생과 사촌 시누이들, 그리고 친척들과 이웃들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잠을 안 자고라도 해주고 싶은 열성이 있었다. 그 시절엔 참 부지런히 봉사하는 것이 기쁨이었는데 지금은 내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절처럼 남을 위해 부지런히 봉사하지 못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일본 사람들이 진주만 공격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다고 성대한 축하 행진을 하고 완전히 들뜬 기분을 내고 있던 그 해에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내 나이 만 12세(우리 나이로 14 세), 부산 여고보 1학년 때였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가까운 분이 돌아가신 슬픔과 무상을 느낀 첫 사건이었다. 사춘기의 소녀의 가슴에 큰 충격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전 해 회갑을 기해서 외할머니와 함께 보름 동안 금강산 구경을 다녀오셨다. 진갑에는 일본에 관광 여행을 하자고 외할머니와 약속하시고 그 일을 실천하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다. 평생에 첫 병이었다고 했다. 감기 같이 한 일주일을 앓으시다가 별세하셨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받고 외가에 갔으나 크게 편찮으시지 않으니 곧 나으실 것이라고 하셔서 권솔이 많은 아낙네라 돌아왔는데 며칠 안 가서 별세하셨다는 비보(悲報)가 온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그토록 맏딸을 생각하시던 당신의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가지가지 추억들이 되살아난다. 특히 오빠들과 내가 한 해 겨울 방학에 외가에 갔을 때 보았던 사건이 생각이 난다. 새벽같이 어린 소녀가 엄마 등에 업혀서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 앞에 들이닥쳤다. 화상을 크게 입은 아이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술버릇이 나쁜 사람이었는데 이 새벽에 술에 만취가 되어 집에 돌아오자 화로를 들어 집어 던졌는데 그 불이 잠자고 있던 딸을 덮친 것이었다. 그 엄마는 어쩔 줄을 모르며 울며 할아버지께 애소하는 것이었다.

“불쌍한 이 어린 것 살려 주이소! 살려 주이소!”

외할아버지는 그 엄마를 위로하며 안위시키며 그 딸아이의 화상 입은 얼굴과 목과 가슴과 팔에 흰 고약을 바르셨다. 매일 그 엄마는 딸을 업고 왔고 그 어린 딸의 상처는 나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그 소녀가 상처 없이 깨끗이 나아서 예쁜 처녀가 되었고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다고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연구심이 많은 분이었고 다른 사람을 도우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외할머니가 발찌가 났을 때 대구 동산 병원에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셨다. 그 때 그 병원에서 두 가지 연고를 쓰는 것을 보시고 외할아버지는 그 제조법을 물어서 그 연고를 예비해 놓으셨고 그 연고를 써서 그 화상 입은 여아를 상처 없이 낫게 하셨던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별세는 온 동네의 슬픔이었다 한다.

“한 5년만 더 살아계셨어도 우리가 잘 살게 되었을 텐데…….”

하고 동네 사람들이 한탄을 하였다고 한다.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신 외할아버지, 그 분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곧 기독교의 하나님은 알지 못하셨지만 천의(天意)를 깨닫고 천의(天意)에 따라 살았던 분이라 생각된다.

외할아버지는 두 아들들을 다 고등 교육을 시키셨고 딸도 학교에 보내셨다. 나의 이모님은 처녀 때 양머리를 틀고 높은 구두(힐)를 신고 있었다. 키도 크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바느질을 잘해서 싱거 재봉틀로 척척 무슨 한복이든 다 해냈다. 우리 옷은 주로 이모가 바느질을 해 보내 주었다. 무슨 일이든 잘하는 이모였다. 이모가 시집 갈 때 신랑의 집은 아버지가 한학자로 이름이 있는 집안이었다. 우리 아버지같이 형제가 팔남매의 맏아들이었다. 가난한 집안이었다. 이모부는 아직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결혼식 날 오후 신랑과 상객이 다 자전거를 타고 결혼식장인 외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계속 개근했던 분이라 오전에 학교에 갔다가(대구로)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오직 신랑감만 보고 두 사위를 골랐다고 들었다. 그래서 집도 사고 모든 필요한 것을 다 갖추어 살림을 차려주었다고 들었다.

외할아버지 별세 후에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 언제나 두 분이 같이 다니셨는데 혼자 오시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외할머니한테 얘기해달라고 졸라댔다. 외할머니께서 그 때 들려주신 얘기가 있는데 그 얘기는 이러했다.

어떤 가세가 기울어진 양반집에 모자만이 살고 있었다. 그 많던 노비들도 다 떠나고 모자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우리 집 노비들이 아무데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 노비문서를 가지고 찾아가서 그들을 면천(免賤)시켜 주고 그 대신 그들의 형편대로 그들의 성의를 받아오면 이 곤경을 면할 것 같구나.”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종들이 한 동네를 이루고 설고 있다는 곳으로 떠났다. 옛 주인을 종들은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그들의 노비 문서를 다 불사른 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종들은 다 감동하여 어진 주인의 가정의 형편에 마음 아파하며 자기들의 힘대로 삼천 냥을 모아 말에 실어 젊은 주인을 보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그 돈을 집에까지 못 가져오고 중도에서 다른 일로 없애고 만다. 강을 건너려고 할 때, 그는 한 늙은 남자와 두 여인이 울면서 깊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하고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제발 자살하지 마십시오. 내가 3000냥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그는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전 재산을 그들에게 주고 아무 돈도 없이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모든 이야기를 소상히 아뢰었을 때 그 어머니는 무엇이라 말했을까?

“아들아, 인명을 구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니라. 네가 참으로 잘 하였도다. 한 사람의 생명 때문에 다른 세 가족의 생명도 위경에 놓여 있었다니 네가 어찌 네가 얻은 돈이라고 사지에 이른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올 수 있었겠느냐? 바로 너를 그 시간에 당도하게 한 것은 천의(天意)였느니라. 천의가 무심치 않아 그들을 살리셨거늘 어찌 너와 나의 생명인들 굶어 죽게 하시겠느냐?”

참으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믿고 보니 하나님의 뜻은 정직하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하고 계시는 것이다.


2. 근검절약(勤儉節約)

나의 외가에서 본 추억들 중에는 마치 활동 사진의 필름이 전개되듯이 선연하게 나타나는 장면들이 여러 개 있다. 그것들은 거의 10세 미만 때의 회상이다. 내가 그 때 일을 일부러 생각해 보려고 해서 오는 현상이 아니라 문득 문득 내 생애에서 내가 외할아버지가 생활하시던 장면을 회상하며 나도 본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축대에 떨어져 있는 쌀을 하나하나 주우시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외할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한 알갱이의 곡식도 한 톨의 밥풀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부자였고 존경 받는 어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질하다가 그랬는지 어떻게 되어서 쌀이 떨어져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을 발견하신 외할아버지께서 아무 말씀 않으시고 그 한 알갱이 한 알갱이를 줍고 계셨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이웃과 친척을 돕는 일과 또 모든 사람에게 손 대접하는 일이나 가족들에게나 후한 분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 자신의 곡식 한 알갱이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집안사람이나 자손들이나 친척들이나 온 동네 사람들까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 머슴에게 정해놓은 시간에 종을 치게 하시고 가난하여 학교에 못 보내는 집 아이들을 외할아버지 사랑방에 모아 공부를 가르치시고 사랑채의 한 방에 차려져 있는 한의원의 모든 재료로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베푸시며 들레지 않고 조용히 언제나 누구에게나 선을 베푸시던 외할아버지였다. 부지런해야 된다는 것을 생활로써 모본을 보이셨다.

내게 두 번째로 근검절약을 가르쳐 준 분은 방 순경 선생님이시다. 방 선생님은 동경 여자 고등사범학교를 나오신 분으로 대단히 실력이 있는 분이었다. 방 선생님이 나오신 학교는 실력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학교였으니…. 선생님은 40 여 세였으나 미혼이셨다. 모든 일에 열심이셨다. 선생님한테 요리도 많이 배웠고 수놓는 것도 배웠고 물감 들이는 것도 배웠다. 선생님한테 배운 것 중에서 가장 많이 생활에서 활용한 것은 물감 들이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미야꼬조매’라는 물감이 있었는데 학교 가사 실습실에서 한 번 실크 보자기를 물 들여 본 후 배운 대로 집에서 해보니 물이 날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아 그 후에 많이 활용하였다. 요리는 엄청 많이 배웠지만 많이 활용하지 못했다. 시골에 시집가서 실습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동생들을 위하여 또 아이들을 키우면서 몇 가지 활용한 것뿐이다.

자수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이 아니라 그런지 아들네가 미국 갈 때 준 두 개는 진주 촉석루와 선란(石蘭)이라는 액자였는데 캔사스 시티(Kansas City)에서 수련을 마치고 배틀 크릭(Battle Creek)으로 올 때에 친한 집에 들러서 자고 왔는데 그 액자를 거기 두고 와버려서 영영 찾지 못하고 딸에게는 시집 갈 때 수놓은 병풍을 해 주었더니 그 여러 번의 이사에도 잃지 않고 잘 가지고 다니더니 몬타나(Montana)에 이삿짐을 옮길 때 분실되었다 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를 물건이란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을지라도 영영히 가는 것이 없고 정신적 영적 유산이 장구하다고 깨달았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쏠렸지만 방 선생님에게서 배운 모든 다른 것, 요리나 자수나 염색 등은 세월과 함께 빛바랜 추억의 장으로 넘어가고 말았지만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신 말씀은 아직도 마음에 생생히 남아있다.

“무청 한 잎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적절하게 절약하며 낭비하지 않도록 가르치신 그 교훈은 산 교육이었다. 십대의 소녀시절에 배운 교훈이 내 평생을 지도하는 은사의 말씀으로 남아있다.

나는 지금 기억한다. 내 자녀들이 다 미국으로 떠난 후 팔각정에서 경남여고 재경 동창회 (慶南女高 在京 同窓會)가 열린다는 기별을 받고 오랜만에 나들이를 갔던 그 날을―우리 2년 선배이던 농구 선수였고 통영(충무) 사람인 전 주미대사 그리고 외무부 장관을 지낸 000의 부인인 000언니가 재경 동창회 회장이었다. 우리 은사님이신 방순경 선생님이 거기 와 계셔서 감계무량했다. 선생님은 칠십여 세이셨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미국에 와서 살고 있으니 동창회에 참석할 기회도 없었고 선생님을 뵐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교훈은 아직도 내 생애의 생활 지침으로 남아있다.

세 번째로 내 생애의 근검절약의 모본을 크게 끼친 분은 어머님, 곧 나의 시어머님이시다. 내가 만 열여덟 (한국 나이 스무 살)에 결혼하고 그 해 가을 시집에 신생했을 때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 들어오는 것 보면 안 좋다는 말이 있다고 내가 탄 가마가 들어올 때 어머님은 뒤란으로 피하셨다 한다. 안방에 깔아놓은 방석에 신부가 앉은 후에 어머님은 앞뜰로 나오셔서 며느리를 바라보셨는데 깨끗하고 섬세한 뒷목의 곡선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다고 후에 말씀하셨다. 시집가서 얼마 동안 “둘이 놀면서 먹어라” 하시며 과일들을 들이밀어 주시곤 했다.

어머님은 계획 없이 생활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매일 그날 마쳐야 할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셨다. 건강하시고 부지런하시고 활동적이셨다. 온 동네에서 제일 일 잘하는 분으로 손꼽히는 어머님은 힘도 굉장히 센 분이었다. 잡수시는 속도와 분량도 나는 어림도 없어 “그렇게 먹어서 어떻게 힘을 내노? 그렇게 적게 먹고 어떻게 애 젖을 내노?” 하시며 걱정하셨다.

무엇이나 알뜰하시고 친정어머니하고는 영 다른 성격이셨다. 친정어머니는 일을 안 시키셨기 때문에 나는 배운 것 없이 시집을 와서 저녁이면 ‘왜 우리 어머니가 나를 일을 안 가르치셨을까?’하고 한탄스러웠다.

나는 잘 훈련을 받았고 잘 배워갔다. 집안의 종숙모님들이, “시어머니 며늘 낳는다드니…” 하셨다.

스물 넷 쯤 되었을 때는 일이 몸에 배고 속도도 빨라지고 일의 순서를 척척 알아서 해치우는 일꾼이 되어 6촌 시누이가 시집 갈 때는 만삭인 몸으로도 홀몸 같이 잘 도와서 당숙모님들이 나중에 박 씨 집에 딸 있으면 중매 좀 서달라고까지 하실 정도로 능력 있는 일꾼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님의 근검절약의 모본도 내 천성인 듯 본 받은 며느리가 된 것이었다. 그날 계획한 일을 그날 마치고 폐물도 알뜰히 재생할 수 있는 것은 활용하고 계획을 세워서 살림을 하는 습관을 어머님으로부터 배웠다.

내가 후에 6.25 동란에 남편을 잃고 자녀들과 생활할 때도 없는 가운데서도 적은 수입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의 생활을 통하여 배운 산 교육으로 말미암은 바가 많다.

Booker T. Washington의 전기에 보면, 그가 집안의 잡일을 돌보는 소년으로 들어간 집의 여주인인 Viola Ruffiner라는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작은 것까지 잔소리가 많은 여자였다. 그녀의 아들은 미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였는데, 그녀의 백인 특유의 차가움은 그녀를 무섭고도 엄해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은 그 외모 이상이었다. 그녀가 Malden이라는 곳에 일꾼을 구하기 위하여 갔을 때, 아무도 그녀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일꾼이 없었다. 그녀와 면접을 할 때, 어린 Booker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한 달에 5달러를 받고 그 받은 돈 마저 그 양아버지에게로 가게 되는 그 일을 하기로 하였다.

Booker의 뛰어난 지능과 관찰력은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었던 Viola Ruffiner의 표준을 만족시켰다. Booker는 Viola가 그녀만의 바뀌지 않는 행동과 청결과 예절과 교양의 관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들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그가 성실히 그녀의 불변의 표준을 맞추어 주었을 때 그녀는 만족하였다. Booker는 나중에 그가 그의 주인으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것들을 떠올렸는데, 그것은 그녀의 물건들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과 모든 일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되어지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정직함과 솔직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되는대로 부주의하게 두지 않고, 모든 문이나 울타리 하나까지도 반드시 완벽한 상태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 그녀를 무서워하던 Booker는 점점 Ruffiner 부인과 그녀의 정리정돈의 모습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집에서 가장 인정 받는 일꾼이 되었다. 참으로 Booker T. Washington이 Viola Ruffiner의 집에서 잡일꾼으로 사는 동안에 그의 몸에 청결과 정리정돈 같은 일이 그의 몸에 습관같이 배게 된 것처럼, 나도 시어머님 밑에서 근검절약의 모본을 익혀갔다.


3. 기차 통학 중의 시련

1학년에 입학하자 첫 시련이 닥쳐왔다. 기차 통학생은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등교하였다. (나중에 전쟁 발발 후엔 달라졌지만 이때는 아직 전쟁 전이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에 교실에서 공부를 하거나 놀거나 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학교에 도착하자 물이 먹고 싶어진 나와 K 읍에서 통학하는 나의 한 반 친구는 가방을 교실에 갖다 놓자 곧 물을 마시러 갔다. 수도에선 물이 틀기만 하면 위로 퐁퐁 퐁퐁 솟구쳐 올랐다. 그 물을 맛있게 먹으며 나와 내 친구는 얘기를 하였다. 물을 다 먹고 난 우리는 돌아서 그곳에서 나오려 했다. 그런데 숙직실 문을 열고 키다리 선생님이 썩 나섰다.

“오이 키미다찌 이마 난또 있다까?” (“어이 너희들 지금 뭐라고 말했어?”)

능글능글 유들유들 공부 시간에는 언제나 우스게 반 아이들의 별명이나 잘 짓고 느릿느릿 시간을 때우는 교두선생(교감선생)이였다. 가슴이 화끈거리고 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 얼굴빛은 어떤 색깔이 되어 있었을까? 거기 거울이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내 친구 윤희는 검검스레한 큰 눈을 껌벅거리며 어리둥절 교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고라, 키코엔까? 오마에다찌, 죠센고데 하나시데다로?”(이봐! 안 들려? 너희들, 조선말로 말하고 있었지?”

나와 윤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우리는 1학년, 아직 입학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교내에서 우리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선생님들이 안 보시는 데서만 우리말을 사용하는 기술을 초등학교 때부터 잘 습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한 번도 어려운 경우에 맞닥뜨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숙직실 문이 열려 있었던가 보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우리 한국 사람이 아닌 일본인 교사, 그것도 고르고 골라서 일어 교사인 교두(敎頭) 선생이 그곳에서 듣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비운(悲運)(?)의 시작이었다.

"こら! なぜ たまつて ゐるか? しよくいんしつに こい. (이봐! 왜 가만히 있어? 진원실로 와).”

조회(朝會), 1교시, 2교시, 모든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교사실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 애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럴까?’
모두가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뜨거운 회리바람이 가슴속을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등교 때 학교에 일찍 가고 하교 땐 차 시간이 되어 역에 나가기 때문에 도서실의 책을 마음대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좋았으나,‘이번 사건은 기차 통학이 빚어낸 수난이야’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차 통학은 부득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딸을 집을 떠나 하숙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로 알고 계셨으니까.

나의 여학교 1학년 여름에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전선(戰線)으로 실려가는 군인들을 전송하는데 동원되어야 했고 학교는 군가 일색으로 변하고 역도 거리도 군가와 군인의 물결이었다. 차는 자꾸만 연착하고 연발하였다. 나중엔 숫째 그 전에 있던 통근 열차는 없어지고 더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남행 열차와 어두워져서 우리가 타게 되는 (저녁 9시경) 북행 열차 밖에는 이용할 수 있는 차가 없어서 모든 경부선 기차통학생들은 거의 다 하숙(下宿) 혹은 친척집에, 혹은 기숙사로 들어가고 몇 명, 참으로 적은 숫자의 학생들만이 남아 있었다. S역에서 통학하던 여학생들 가운데서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인 성순이와 나만 남게 되었다. 참말 쓸쓸하였다. 교문이 잠겨지는 시간이 되면 학교에도 남아 있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역 구내에 있는 클로버와 잔디가 있는 풀밭에서 책을 읽거나 얘기를 하다가 그곳이 어두워지면 대합실에 가서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차 시간을 기다렸다. 그곳에서 나는 거의 저녁마다 정신이 돈 한 아줌마를 보았고 그녀의 얘기도 들었다.

춥고 배고파 더욱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 시간을 빨리 보낼 수 있게 해주는 일이면 무엇이나 환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기다리던 차가 도착하면 기다리던 모든 사람이 타고 차는 출발했다.

차안은 언제나 따듯하였다. 그래서 책을 펴고 앉았다가 스스로도 모르게 눈꺼풀이 붙어버렸다. 그래서 나와 성순이는 눈을 뜨려 애쓰며 1시간 반의 고역을 치루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는 것을 보다 못했는지 나보다 두 살 위인 성순이가

“옥종아, 그러지 말고 좀 자. 나는 그렇게 졸립지 않으니까 S역이 다 되면 깨울께.” 하였다.
나는 성순이의 말에 안심하고 그대로 꿈나라로 들어가버렸다.

“옥종아! 옥종아! 일어나!”
한참 단잠 속에 빠져있던 나는 소스라쳐 눈을 번쩍 떴다.

“응, 다 왔니?”

“아니야, 어쩜 좋아!”

성순이의 울상이 된 얼굴에서 얼른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까 번쩍번쩍 밝은 전등불과 함께 기둥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플랫폼이네, 어느 역이지?”

부산진에서 출발하여 S역에서 내릴 동안 저녁마다 내가 지나오는 역들 중에 이런 역은 없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눈길을 친구에게 돌리며,

“……?”

“S역이야, S역! 출발하고 난 뒤에야 깨워주시잖아. 다음 역이 S역인줄 아셨대.”

“…….”

성순이의 말을 듣고야 상황을 짐작하게 되었다. 성순이는 나를 보고 자라고 해놓고 혼자 깨어 있는데 어찌나 졸음이 오는지 못 견디어 옆 자리의 아저씨한테 S역에서 내리니까 좀 깨워달라고 부탁하고 자기도 자버렸단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다음 역인 M역에서 내렸다. 역원에게 사유(事由)를 말하는 우리를 많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대합실 벤치에 앉아 서글픈 심정이 되어가는데 뒤에 나오는 승객들 틈에 작은 오빠의 초등학교 때의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나는 달려갔다.

“달수 오빠! 나 어쩜 좋아?”

“아, 너 노리꼬시 했구나(지나쳐 버렸구나)?”

그는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이 매봉 기슭에 이사 가기 전, 우체국 뒤에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우체국 직원이셔서 집이 그 근처였는지 자기 집같이 늘 우리 집에 드나들던 작은 오빠의 친한 친구였다. 그러던 그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지는 못했지만 허물없는 사이라서 나는 나의 오빠에게처럼 허물없이 말했다.

“우리 집에 가자. 우리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라. 너네 집에는 S우체국으로 전보 치면 되잖니.”

나는 성순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집에 가자. 지금 S로 가는 차가 없다니 어쩌니.?”

그 때 아들의 마중을 나오신 듯한 달수 아버지도 옆에서 권하였다. 나는 다시 성순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성순이는 발밑만 내려다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쩔까? 차가 없으니 어쩌지? 달수네 집에 가서 자?”

“…….”

성순이는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그럼 어떡하니?”

나는 울상이 되었다.

“여기서 밤 새우고 새벽에라도 기차 타고 가자.”

성순이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아주 결의가 단단해 보였다.

‘참 그렇다. 나는 달수 오빠도 잘 알고 그의 아버지 어머니도 잘 알고 조금도 허물없는 사이니까 가도 되겠지만 성순이는 나보다 두 살 위니까 학년은 아래지만 나이는 달수 오빠와 동갑이고…….’

나는 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성순이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다.

역전 파출소의 순경아저씨가 왔다.

“학생들, 배가 고플텐데 저녁 사줄테니 따라오너라.”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배고프지 않아요.”
몇 번이고 권해 왔지만 사양했다.

어디로 갈 사람들인지 대합실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역원들도 모두 우리를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몇 마디씩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점에 뚱뚱한 마음 좋게 보이는 일인 아줌마도 퍽 친절한 말을 걸어주었다. 그러나 주머니에 단돈 십전도 없던 우리는 배를 곯고 앉아 있었다. 매점 아줌마도 문을 닫고 돌아가고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숫자도 자꾸만 줄어갔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너무 피곤해서 말하기도 싫어진 우리는 사람이 적어져 쓸쓸해진 대합실 벤치에 앉아 새벽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둡던 개찰구 쪽으로 칸테라 불빛이 비취더니 한 역원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사람이 탈 수 있는 차는 내일 아침 너희들이 통학하는 그 차 밖에 없지만, 너희들 사정이 하도 딱하니 짐차가 이제 좀 있으면 올텐데 그거라도 타고 갈래?”

우리는 정말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만큼이나 반가와 했다. 우리는 역원을 따라 플랫폼을 지나 자꾸만 위쪽으로 올라갔다. 진시(戰時)라 사방이 깜깜했다. 화물차는 차량을 얼마나 많이 연결하였는지 길기도 길었다. 깜깜한, 밤비조차 내리고 있는 새벽 2 시경 역원이 든 작은 불빛만으로는 길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시커먼 짐 차량이 마치 무슨 괴물마냥 하나하나 지나가고 드디어 정거하였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차장이 있는 조그만 찻간(車間)이었다. 그 긴 화물차의 기관차 불통은 상거가 멀어 보이지 않고 차장실에만 가느다란 불빛이 있었다. 차장이 다시 오르고 차는 떠났다. 우리 둘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가느다란 불빛만 우리 사이를 지킬 뿐 차장도 성순이도 나도 입이 붙은 사람 같았다. 차는 달렸다. 비속을, 어둠속을 달렸다. 드디어 굴 한 개, 또 한 개, 굴속을 지날 때 나는 이름 모를 공포증에 눈을 크게 벌려 뜨고 알지 못할 존재자(신(神)인지 이름 지을 줄도 몰랐던 나는)에게 매달렸다. 굴이 끝난 것은 차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곧 내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리운 S역! 우리는 내릴 준비를 하고,
“감사합니다.”하고 일본말로 깍듯이 인사했다.

차장이 풍기는 쌀쌀한 분위기는 그가 동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그러나 그는 한 마디도 대답을 않았다.

꽤 높은 차장실에서 어두컴컴한 플랫폼으로 뛰어내렸지만 겁쟁이인 내가 조금도 겁난 줄을 몰랐다. 너무나 후련했다. 꽉 묶여 있다가 밝은 세상을 행해 해방된 듯한…….

적적한 개찰구와 대합실을 지나 역전의 큰 길을 걸었다. 성순이는 자기 집이 여기서 15~20리 쯤 되는 시골에 있었으므로 금융조합에 다니는 사촌 오빠 집에 방을 얻어 자취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 사촌 오빠네 집에 가니 모두 한잠이 들어있었다. 성순이 사촌 오빠가 나를 우리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빌린 우산을 받고 사거리도 지나고 대밭도 지나고 우리 집 입구 가로등 있는 데까지 왔다.

“감사합니다. 이젠 다 왔어요.”

참으로 감사했다. 보통 가정집엔 전화가 없던 그 시절엔 불편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시절 사람들은 의당 그렇게 서로 도와야 하는 줄 생각하고 살았었다.

나는 눈을 붙인 둥 마는 둥 다시 5시 몇 분 차로 학교로 향하였다.

“우리 옥이는 모질다.”
어머니께서 때때로 하시는 말씀이었다.

기차 통학하며 배가 아플 땐 종일 굶었다. 아침도 굶고 도시락도 안 먹고 그리고도 쓰러지지 않고 돌아온다고 모진 아이가 되어 버렸다.

또 한 번 Y역까지 간 적이 있었지만 M역까지 간 때만큼 고생은 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차가 너무 연착을 하여 학교에 가면 벌써 두 시간 째 공부가 시작된 후여서 얼마나 창피하였는지…….

딸이 기차 통학하는 것 때문에 부모님의 고생도 많으셨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 깜깜할 때 일어나셔서 작은 솥에 불을 때어 새 밥을 지으셨다. 그리고 국을 끓이고 4년을 하루같이 새 밥을 지으셨다. 불을 때어서―요새같이 전기밥솥이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다. 우리들 가정에는 연탄이나 가스불도 없던 시절이었다. 해가 짧아지면 역에까지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와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제야 이 모든 일을 생각하며 눈물겨워진다.


4. 나의 환경과 이웃

기차는 S역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이미 두 개의 굴도 지났으니 곧 S역이야.’

나는 마음속으로 말하며 차창 밖을 열심히 내다보았다. 미전 참샘, 매봉(매峰)은 그 모습을 나타내며 확대되어 왔다. 산기슭에 높이 축대를 쌓아 지은 집들, 그 첫째 줄에 세 채의 집이 서 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집이 바로 우리가 살던 집이다.

빨간 벽돌집이 보인다. 그곳은 옛날엔 성당이었다. 외국 사람 신부가 살고 있었고 창유리는 빨강, 노랑, 파랑, 색유리로 빛나고 있었다. 성당 옆의 기와집에 정결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열심인 천주교인이었다. 얼마 후에 키가 훤칠하고 마음도 넓고 명랑한 성격의 새댁이 시집을 왔다. 그 새댁은 여름 달밤이면 흔히 다림질을 하였다. 멍석 위에 앉아서 손부가 다림질을 하면 할머니는 잡아 주고 환히 달빛은 쏟아지고 빨간 숯불은 오락가락하였다. 모시 치마가 곱게 주금을 펴가고 하얀 구름같이 펼쳐지면 적삼은 깃과 도련과 소매에 고운 곡선을 그려갔다. 이웃 아낙네들이 몇몇 멍석 가에 앉아서 얘기들에 꽃을 피우고…….

그 집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흠씬 익어서 턱 벌어져 담홍색 속살을 보이고 있는 무화과를 새댁이 따 주어 맛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별로 사람을 붙이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손부가 워낙 명랑하고 무던한 성격이어서 그랬는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그 집이 웃음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집이 되었다. 그런데 왜 그 집엔 할머니와 손부만 있는 집인 듯이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아들과 며느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손자는 직장에 나가는 사람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종일 할머니와 손부만 사는 듯 했다. 일요일엔 성당에 나가는 날이라서 아무도 그 집에 가보질 않았었다.

성당과 그 집의 아래쪽에는 꽤 큰 대숲이 있었다. 누구의 소유인지는 모르나 그 대밭엔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큰 대밭이어서 대밭 아래 있는 길에서 소리를 질러도 그 위에 있는 집들에는 어림도 없이 들리지 않을 듯 하였다. 그 대밭에는 지네가 우글우글한지 그 근처에 사는 집들은 피해를 입는 때가 있었다. 대밭에서 꽤 상거가 있는 우리 집에까지 지네란 놈이 찾아와서 어떤 날 밤엔 자다가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따르르르(혹은 쏴르르르)하는 이상한 소리에 아버지께서 깨셔서 불을 켜니 커다란 지네가 창호지 문을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오빠도 동생도 깨고 사랑방 소리에 안방에 자던 엄마도 나도 다 깨었다. 결국 지네란 놈은 오줌통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이튿날 아침 그 무서운 발을 보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놈은 도장에고 변소에고 곧장 나타났다.

그 집으로 이사한 것은 내가 여학교에 입학하던 해 열두 살(한국 나이로 열네 살) 때의 일이었다. 기차를 타고 1시간 반을 가야 학교가 있는 부산진역에 도착하니 겨울에는 해가 짧아서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역에까지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셨다. 그러나 여름엔 혼자 왔다. 역에는 밝은 때 내리니까……. 그러나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대밭 앞을 지나려면 가슴이 뛴다. 더구나 성당에서 동으로 조금 나가 북으로 꺾여 들면 초가집들이 몇 채 있는데 그 뒤에 도수장이 있었다. 거기서 도깨비불이 밤이면 번쩍인다고 우체국 옆에서 살 때 아이들이 그랬었다. 그게 생각나서 내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그러나 뛰지는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었다. 손톱 발톱 깎아서 아무데나 버리면 길을 갈 때 뭐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래서 늘 조심했는데도 자꾸만 무언가 뒤따라오는 듯 느껴졌다. 집으로 올라오는 경사진 길을 올라오면 외등이 밝혀져 있다. 그곳에서 비로소 큰 숨을 내쉬고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 집 앞에는 저 아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큰 밭이 있었다. 그 밭 임자는 물 건너(낙동강 건너)에서 이사 온 사람이었다. 근방의 농부들과는 달리 그 집에선 채소 가꾸는 기술이 뛰어난 듯 하였다. 그 밭에서 따내는 호박은 어쩌면 그리도 맛이 좋은지… 방망이로 칼등을 탕탕 두들겨도 잘 갈라지지 않던 호박, 그렇게 힘들게 큰 조각으로 나눈 호박을 쪄 내어놓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별미였다. 그렇게 분이 많고 단 호박은 그곳을 떠난 후에는 영 먹어보지 못하였다.

참 또 그 밭의 토란도 별미였다. 굵직굵직한 토란을 소금을 조금 뿌려서 껍질 채로 삶아 놓으면 홀랑홀랑 껍질을 벗기면서 먹는 재미―껍질 밑에 하얀 살이 드러나고 토란의 맛은 알맞은 간과 함께 참말 별미였다.

그 밭 옆에 잇는 논은 우리와 잘 아는 집의 논이었다. 그 논의 모내기 때면 아이 둘이 큰 논의 남북 이쪽저쪽에서 못줄을 잡고 어른들은 신나게 모내기 노래를 부르며 모를 심어 갔다. 한 줄, 또 한 줄 잘도 채워져 가던 논…….

우리 채전 밭 가까이에 있는 집은 농사짓는 집이었다. 소도 매어 있고 아버지, 어머니, 아들들이 여럿이 있고 딸들도 두엇 있었다. 그 집에서는 타작 때나 모내기 때 꼭 밥을 가지고 왔다. 큰 사발에 꾹꾹 눌러서 담은 팥을 둔 상반 밥이 어찌 그리도 구수하던지… 남의 걸 먹기 좋아 않던 까다롭기도 이름났던 나도 그 밥만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만 열두 살 때부터 열일곱 살 때까지 살던 그 집은 소녀의 꿈을 키워준 집이었다. 그러나 그 집은 나에게 인생의 슬픔을 가르쳐준 집이기도 했다.


5. 내 생애에 처음 닥친 사별의 슬픔

나는 이 집에서 슬픈 경험을 두 번 가졌다. 두 번 다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었다. 한 번은 이 집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지만 다른 한 번은 이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학교 1학년 때, 나는 학교에 갔다 돌아오자 슬픈 소식을 들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지도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기에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감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나는 그분을 사랑하였다.
친할아버지 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외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보다 친근하게 느껴지는 다정한 분이었다.

내가 6학년 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다니러 오셨다. 어느 날 밤, 외할아버지께서
“옥아, 너 고등학교에 갈래?”

아무도 옆에 없을 때 가까이 오셔서 나를 들여다보시며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으셨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할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봤다.

“가고 싶지 않니?”

“…….”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돌이질만 하였다.

“그럼 가고 싶으냐?”

이번에도 또 나는 도리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상급학교에 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본 일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개만 흔드는 나를 보시고 잠시 어리둥절하신 듯 하더니, 이내 빙그레 자애로운 웃음을 입가에 띠우시고,

“그래, 그럼 넌 아직 생각을 정하지 못했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에야 비로소,

“할아버지 난 아직 생각해 본 일이 없어요.” 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그러냐? 그럼 지금이라도 생각해 보려무나. 아직 늦지 않았으니.”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 말씀에 그 일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가고 싶지도 가기 싫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가야 하는지 안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아가, 어떻게 생각했니?”
할아버지가 다시 내 귀 가까이 입을 대시고 물으셨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가고 싶지도 가기 싫지도 않아요.”

할아버지는, “허어, 그것 참…….” 하시고 빙긋이 웃으셨다.
그리고는 잇달아 말씀하셨다. “간다고 그래라. 응? 공부는 해야 한다.”

잠잠히 있는 내게 할아버지는 다시, “만약 너희 아버지가 학비를 못 대는 경우엔 내가 대도 되겠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여식애 공부 시키면 시집살이 못하고 돌아온다.”고 생각하시는 선비이시면서 손녀의 신식 공부하는 것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친할아버지와 얼마나 대조적인 외할아버지이신지…….

외가는 우리 남매에게 동경의 집이었다. 우리는 방학만 되면 오빠들과 나와 친할아버지 댁을 거쳐 외가로 갔다. 친할아버지 집에선 하루를 쉬는 것이 지루하였다. 손주가 왔다고 급히 하느라 노상 설익은 떡을 잘 만드시고 마는 할머니는 “자식들이 외가에 가고 싶어서 떡도 좀 더 안 먹는다.”고 걱정이셨지만 우리는 사흘만 되면 기어이 떠나고 말았다.

여름이면 집 앞을 흐르는 도랑물에서 작은 물고기랑 가재와 방게도 잡고 물레방아를 만들어 펭글펭글 물을 튕기며 돌아가는 것도 보며 놀았다. 조홍(일찍 익는 감 홍시)을 사러 죽벵이 마을까지 가면 빨간 홍시가 여름인데도 익어있었다. 그리고 외갓집 원두막에 가서 잘 익은 놈만 골라서 친손주 외손주가 모여서 할머니랑 원두막 위에서 산골에서 내려오는 원두막 옆을 흘러가는 시원한 물에 담궈 두었다가 꺼내 와서 먹었다. 그 때 먹은 외 수박만큼 시원하고 맛있는 것을 먹어본 일이 여태 없는 듯하다. 겨울엔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 큰 궤짝 안에 곶감이 가득 들어있고 또 골방의 독들엔 감이 들어 있었다.

곶감, 대추, 밤을 놓아 찐 찰떡과 조청(물엿), 생강, 박하 냄새가 나는 집에서 만든 가래엿, 깨엿…, 이모와 외숙모가 마주 않아 모아 쥐었다가 당겼다가 자꾸만 하니까 갈색이던 생엿이 어느덧 하얀 가래엿이 되어 나오는 것이 신기하였다.

엿, 감, 밤, 조청, 떡, 겨울밤의 밤참이 언제나 풍부한 외갓집, 그런 외갓집에 밤이면 사람들이 놀러왔다. 외할머니가 가지고 계시는 얘기책은 큰 궤짝으로 하나―그래서 밤이 이슥하도록 밤참을 먹어가며 얘기책의 구성진 가락에 도취되는 할머니와 그 친구들, 나는 그 방이 특히 좋았다. 겨울방학이면 의래 그 방에서 얘기책을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구수한 할머니들의 얘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우리가 들이닥치면 겨울이면 염소, 여름엔 닭을 잡게 하였다. 닭은 알 낳는 암탉을 잡으라고 이르셨다. 머슴이 떠물을 먹여서 염소를 잡아 놓으면 불고기 전골, 고음 등을 해가지고 먹으라고 독촉하셨다. 비위가 약한 나는 염소고기를 잘 못 먹었다. 그래서 꾸중도 몇 번 들었다.

보혈 주사를 놓아 주신다는데 작은 오빠와 나가 집동 사이에 숨던 일, 늘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 하여 왜 그러냐고 할아버지께서 물으셨을 때, “오빠가 가슴을 쥐어박아서…”라고 대답했다가 오빠를 호되게 꾸중 듣게 한 일……. 모기에 물렸던 발이 늘 가려웠는데 침을 맞아야 한다고 할아버지께서 침을 가지고 오셨을 때 달아나려다가 달아나지 못하고 결국 침을 맞고 나았던 일……. 늘 약하여 코피를 잘 흘리던 나를 위해 약을 지어 보내시고 땀이 안 나는 것도 병이라 하여 약을 지어 보내시던 외할아버지―아아, 그 가지가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할아버지의 은혜, 아젠 갚을 길도 영영 없어져버렸구나!

나의 큰 오빠는 1942년 6월에 돌아가셨다. 내 나이 열일곱(만 17세) 똑똑한 아이면 다 알 일을 나는 아직 몰랐던가? 아니면 너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라 사실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었던가? 모든 사람이 슬프게 울고 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들 저렇게들 울까? 우리 오빠가 돌아가실 리는 없어. 그럼 잠깐 잠자고 이제 곧 돌아 오실거야.’

오빠의 상여는 올케 언니의 애절한 울음도 몸부림도 아랑곳 않고 우리 집을 떠나갔다. 우리 집에서 둥천 넘어 창포 밭이 있는 시내를 건너 경부선 철둑 넘어 있는 웁슬 동네는 원경이지만 보이는 곳이었다. 쨍쨍한 유월의 햇빛 아래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내 허리에도 안 닿는 낮은 담장 넘어 그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애애홍 소리와 함께 화장터로 향하였지만 곧 그 관을 깨뜨리고 돌아 오시려니 하고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내게 그 연기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오빠! 오빠! 오빠의 연깁니까? 정말, 정말, 못 오실 길로 가신 것입니까!’

나는 생전 처음 원망하였다. 인간을 나게 하고 죽게 하는 어떤 힘(?) 혹은 능력에 대하여 원망하였다. 그리고 내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르 타고 내렸다. 오빠의 죽음을 강하게 부정하며 살아 돌아오리라 혼자 믿으며 울지 않았지만 인생에 이토록 큰 아픔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아픔은 내 가슴에 잠재되어 있었는지 나는 첫 애기를 낳은 후 오빠와 올케 언니를 생각하며 슬퍼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정신이 쇠약해져 어머니가 병원에 데리고 가기까지 했다.

오빠가 돌아가시고 그 초상 동안 모두가 눈물에 젖고 소리 내어 울었지만 내 어머니만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 후에도 금방 쓰러지실 듯 하면서, 어머니는 견디셨고 일하셨다. 나는 우리 어머니란 분을 위경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남자분이셨지만 눈물과 울음을 참지 못하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빠의 생전에 그토록 끔찍이 사랑을 받는 어머니셨고 인자한 어머니셨는데도……. 오빠는 참으로 어머니에게 둘도 없는 효성스런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 슬픔을 누구보다 잘 견디셨다.

달 밝은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자다가 이상한 기미에 눈을 떴다. 마루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안방에서 자는 사람은 나, 그리고 어린 동생, 그리고 어머니, 세 사람이 자고 있었는데 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누워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창 밖에서 흐느낌 소리를 참는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나는 살금살금 창문 앞으로 가서 창호지문에 붙은 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달빛은 마루에 가득 들어와 있었다.

“……”

창밖에서 흐느낌을 참으며 하소연하는 듯한 가냘픈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살금살금 창문 앞으로 가서 창호지문에 붙은 우리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달빛은 마루에 가득 들어와 있었다.

나는 목이 콱 메어오면서 울음이 터질 듯 해졌다. 얼른 내 자리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중국에서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던 오빠, 재사와 가인(佳人)은 단명이라더니 오빠를 두고 한 말 같다. 오빠는 맏아들답게 부모님께 효자일 뿐 아니라 동생들도 무척 사랑하였다. 오빠의 이상은 형제가 한 울 안에서 사는 날이 오기를 원하였으며 농사를 지으며 살기를 원하였다. 올케언니는 오빠의 이상에 맞는 사람이었다. 키도 훤칠하고 마음도 넓은 사람이었다. 바느질이나 부엌에서 하는 일이나 그녀의 체격과 마음 못지않게 척척 해내는 사람이었다.

너무 총명하고 너무 인정이 많고 의리에 두터웠던 오빠. 오빠는 내가 여고 1학년 때 직장 생활하신 후 처음으로 집에 돌아오셨다. 나를 데리고 부산에 가서 시계를 사주시려 했다. 그러나 나는 작은 오빠가 그 때 시계가 없었으므로 작은 오빠 시계를 사주시라고 말했다. 큰 오빠가 작은 오빠는 한 번 사주었는데 잃어버렸으니 이번에는 네가 기차 통학하는데 필요하니 네 것을 사주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작은 오빠가 시계를 안 차고 내가 차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고 작은 오빠가 차면 더 기쁘겠다고 간청을 하여 결국 작은 오빠 시계를 사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내가 왜 큰 오빠가 그렇게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따라가지 않았는지 내 시계를 살까봐 안 갔는지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오빠를 따라가 오빠를 기쁘게 못 해드린 것이 한이다.

오빠가 가시고 나자 명랑하고 밝던 우리 집이 회색 베일을 뒤집어 쓴 듯 해졌다. 큰 소리로 웃는 것도 삼가야 하는 듯 늘 부모님 앞에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대자(竹尺) 한 자 품을 입던 어머니는 자꾸만 몸피가 줄고 속병이 생겨서 노상 속이 아프다고 하셨다.

“우리 옥이나 시집 보내놓고 죽어야 할텐데… 아들들이야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만 딸자식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출가시켜야 하는데…….”

어머니는 몸이 약해지시자 그전에 안 하시던 말씀을 자주 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옷감을 팔러다니는 도부장사가 오면 마음에 드는 옷감을 보시면 끊으시곤 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내 마음에 기쁘지 않았다.

“이 옷감이 네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실 때 나는 언제나 그런 것 안해가도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럴때면 도부장수 아주머니는

“이런 아가씨는 처음 보네. 다들 사달라고 조르는데…” 하는 것이었다.


6. 졸업식 날의 화해

졸업 시기가 가까워 왔다. 우리 교정 뒷 정원에 있는 매화나무에 옥빛으로 매화꽃이 피기 시작하면 졸업식 날이 이내 온다. 같이 기차 통학하던 우리 친한 또래가 학교 앞 구멍가게의 안방에 모여 회포를 풀었다. 쌓인 얘기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모든 뭉쳤던 것 다 풀어놓고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았다. 은주는 아이들에게서 한동안 따돌림을 받았었다. 그녀가 폐병환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것이 사실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1학년 때 안 선생 애제자(愛第子)라고 왕따를 당했고 또한 편지 심부름 때문에 내가 그 편지 쓴 사람으로 낙인 찍혀 상당히 오랫동안 나쁜 아이로 지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변명치 않았어도 모든 일이 다 밝혀지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 전보다 더 뜨거운 유대로 연결된 친구가 되었으니 감격이 넘쳤다. 우리는 이제 성숙한 처녀들이 된 것이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는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졸업식 후, 우리는 우리 교실에 남아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차마 정든 교실과 친구들을 떠나지 못하였다. 윤희와 나는 사소한 일로 말을 안 하기 시작하였다. 아무 감정도 없는데도 입 떼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결심하였다. 이대로 윤희와 헤어진다면 평생 윤희를 못 만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어떤 일이 있어도 관계를 회복해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윤희에게 사과했고 윤희도 거의 동시에 사과하며 우리의 졸업을 충심(衷心)으로 서로 축하하는 마음이 되었다.

윤희는 사실 참으로 좋은 심성을 가진 친구였다. 그녀는 졸업한지 얼마 안 있어서 결혼했다.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 그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대학에 유학중이던 남편이 돌아와 그녀의 묘지에서 많이 울었다고 전해졌다. 만약 윤희와 내가 그 때 화해하지 않았다면 언제 다시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것인가? 참으로 그 때 화해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용기를 낸 것이 다행이었다. 그 착한 친구를 생각하면 눈물겨워진다. 우리 말 했다고 직원실에서 장시간 함께 벌(罰) 섰던 친구였다


7. 졸업의 월계관

여름방학엔 하기근로작업(夏期勤勞作業)으로 도로공사 하는데 나가 일하였다. 생전 안 해보던 곡괭이질과 삽질도 하며 반팔 반바지의 체육복 차림으로 햇볕이 내려쪼이는 한여름에 작은 언덕을 무너뜨리고 흙을 퍼 나르고 리어카를 끌고 소녀들로서는 중노동인 도로공사에 참여하여 땀을 흘리며 일했다. 학교 교실에서 합숙하며 학교 가사실습실에서 단체로 식사를 하였다. 그 때 먹은 콩나물국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우리의 여고 생활은 학문을 연마한 학창 시절이 아니라 전쟁의 여파로 안정이 없는 대강대강 떼어붙이며 변통하며 교육을 시켰다고나 할 그런 시기였다.

1학년 입학 때의 수학 선생님은 이노우에(井上) 선생님이었는데 처녀 선생님이었다. 실력도 있고 교양도 있고 존경 받을만한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선생님의 시간에 열심히 들었고 그 시간에 그날 배운 것을 완전히 터득하였다. 혹 조금이라도 미흡한 점이 있을 땐 복도에까지 선생님을 좇아나가 그것을 완전히 납득하였다. 그러므로 2학년 때까지(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동안) 수학시험을 위하여 공부한 일은 없었지만 항상 만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수학은 쉬워서 누구나 다 만점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노우에(井上) 선생님은 우리에게 예법도 가르쳐 주었다.

3학년 때 井上 선생 대신 새로운 수학 선생님이 일본에서 왔다. 이 선생님은 이노우에(井上) 선생님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선생님이었다. 이노우에 선생님은 자기의 교수 시간에 성실하게 가르쳤지만 이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키 크고 멋있는 아이들 옆에 가보기도 하고 필요 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며 도무지 존경할 수가 없는 교수법이라 나중에는 그 선생님을 쳐다보기도 면구스러워 딴 청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졌다. 이노우에(井上) 선생님에게 배운 대수는 잘 박힌 못처럼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는지라 어떤 문제가 나와도 척척 풀 수 있었지만 새 선생님이 온 후에 배운 기하는 그렇지 않았다.

이노우에(井上) 선생님은 학생들의 답안지를 학생들에게 채점시키는 일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수학을 누가 잘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나는 수학은 쉬우니까 누구나 백점을 맞는 과목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새 수학선생님이 와서 두 학년이나 아래인 자기 반 학생들에게 우리 답안지를 채점시켰다. 그래서 교내에서 파다하게 소문이 돌았는지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얘, 네가 그렇게 수학을 잘하는지 아무도 몰랐잖아! 네가 100점이라더라.”

아이들의 이 말을 듣고 나는 기쁘기보다 ‘선생님이 어떻게 학생들의 답안지를 자신이 담임한 1학년 학생들에게 채점시켜서 학교 안에 그 소문이 퍼지도록 할까?’ 하고 의아하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좋아했던 나도 선생님이 바뀐 후부터 잘 듣지 않아서 그 선생님에게 배운 기하로 말미암아 수학 성적이 떨어졌다.

교감 키다리 선생의 복수심(?)은 집요하였다. 그는 3학년 1학기까지 우리의 일본어 선생이었다. 일본어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강독(읽기), 철방(짓기), 문법이었다. 그 세 가지를 나는 다 잘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가 떠날 때까지 그 세 가지를 다 을(乙)을 주었다. 병(丙), 정(丁)을 안 준 것이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교칙을 어긴 나에게 끝가지 벌을 주려고 결심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서울 경복고등학교(남학교)로 전근을 갔다. 3학년 2학기에는 아베라는 선생님이 일본어 선생님이 되었다. 아베 선생님은 참으로 멋이 있는 분이었다. 외모부터가 그랬다. 그러나 그분은 쓸데없는 농담 같은 것은 안 하였고 진실하게 가르쳤다. 3학년 말 나의 통지표에 일본어 세 파트 읽기, 글짓기, 문법이 다 갑(甲)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 위의 1학기 때의 을(乙)로 기재된 성적과 대조되어 참으로 통쾌하였다.

그 때 내 친구 하나가 아베 선생을 욕하며 분개하며 자기의 통지표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1학기 때의 기록은 일본어 세 파트 강독, 철방, 문법이 다 갑이었고 아베 선생이 기록한 2학기의 성적은 다 병이었다. 내 친구는 부잣집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많이 하신다는 말이 들렸다. 겨울 동안에 땔 장작도 들여놓아 드린다느니 하는 말도 들렸다.

일본어를 가르치던 전 교감이 떠난 후 교감이 된 코오베 선생은 화학, 물리를 가르치셨는데 우리가 많이 웃는 것을,

“うちの むすめたちはは 豆が ころがつても소笑う.”

“우리 집 딸들은 콩이 굴러가도 웃는다.” 하며 웃으셨다. 실력도 있고 잘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었다.

히라도 선생님은 지리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셨고 역시 실력도 있으시고 성실히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물리, 화학, 지리, 역사 역시 내가 좋아하는 과목들이었다.

조선어 선생님이셨던 안 선생님은 우리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자 조선어가 전폐되는 바람에 실업(實業) 선생님이 되었다. 아직 철이 없던 시절엔 우리말이 전폐되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던 아이들도 한 해 한 해 나이가 듦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을 대마다 남녀 각 학교 학생들은 용두산 신사로 올라가야만 했다. 선생님들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비낄 때면 아이들의 속살거림이 시작되었다. 내가 그 때 들은 이야기 가운데 아버지가 독립투사였던 은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은희아버지와 그 동지들은 고등계 형사의 주목의 대상이라 유치장 신세를 지는 일이 허다하여 따듯하게 입고 가겠다 말하고 떨지 않도록 준비하고 들어간다고 했다. 여유 만만한 태도로…….

졸업 때가 가까워 오자 실업 시간에 가르치러 들어오신 안 선생님께 아이들이 간청했다.

“선생님, 우리가 평생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교훈을 이 시간에 우리말로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교훈 평생 간직하고 살겠습니다.”

아이들은 참으로 진심어린 청을 드렸다. 우리말로 학생들을 교훈한다는 것은 안 선생님으로서는 참으로 목을 내놓는 각오가 필요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안 선생님은 언제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분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애국심의 발로를 우리에게 “여자의 결심”이란 훈화로 남겨주셨던 것이다. 앞 뒤 출입문에 한 사람씩 망을 선 가운데 선생님은 우리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여자의 결심”이란 얘기를 해주셨다. 우리는 4년 동안의 학업의 월계관으로 “여자의 결심”이란 그 은사님의 교훈을 가지고 교문을 나섰다.


3 장

1. S역에 얽힌 이야기들

기차는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건널목을 지키는 사람은 옛날의 그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다 옛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박하고 옛스럽던 옷을 입은 사람은 찾을래야 찾을 길 없고 간편한 양복, 양장 차림이 많았다. 여름철엔 하얀 갈포 적삼에 새까만 광포 치마를 입고 책보를 옆구리에 끼고 오르내리던 길, 이 건널목을 날마다 건너던 초등학교 시절…….

시계는 10시가 가까워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하도를 통해서 나가야 될 줄로 알았더니 바로 나가도 되게 되어 있었다. 새로운 산뜻한 모습으로 반겨주는 S역, 그러나 옛 목조 건물이 새삼 그리웠다. 유년 때로부터 처녀 때까지의 13 년 동안 꿈과 인생을 가르쳐준 이 고장, 꿈속에도 그리웠던 이 고장, 가지가지 옛 추억에 얽혀있는 이 플랫폼이며 지하도며 대합실……. 나는 다시 추억의 세계로 들어갔다.

지하도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몇 학년일 때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나의 친구들과 그 곳을 통과하면서 소리를 질러 보았다. 소리는 크게 울리고 굉장히 재미있고 신기하였다.

이 역의 플랫폼에서 나는 두 번 울었다. 한 번은 너무나 큰 슬픔 속에 소리 내어 울었고 또 한 번은 모든 사람의 슬픔에 이끌려 감상에 젖어 소녀답게 손수건을 조금 적셨다. 앞의 것은 내가 남을 전송하는 입장, 뒤의 것은 내가 전송 받는 입장이었다.

그 아름다운 선생님! 천사 같이 우리의 추억의 장에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서 계시는 이 정경 선생님, 우리가 1학년 때 우리 학교로 부임하셨다가 5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학교를 떠나신 선생님이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 언제나 조용히 미소하시는 얼굴, 질문에는 언제나 명확하게 대답해 주시는 실력, 언제나 선생님에게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우리 어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요소만을 가진 분인 듯―나는 가끔 선생님 집에서 선생님의 조카딸과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이 정경 선생님! 그분이 떠날 대 나는 정말 새파랗던 하늘이 금방 먹빛으로 캄캄해지고 해도 빛을 거두는 듯, 이보다 더 슬프고 답답한 일은 다시는 없을 듯 하였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눈알이 따갑고 눈두덩이 꽈리 빛으로 부풀어도 목이 쉬도록 울고 또 울었다. 플랫폼은 울음바다로 화한 듯 하였다. 전송 나온 학부모들도 눈시울을 적시는 분이 많았다.

내가 S 면을 떠날 때 벗들과 무척 다정하던 이웃들은 울었다. 어머니와 각별하게 지내던 이웃들은 울었다. 어떤 분들은 소리 내어 흐느끼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이 찡하고 애틋한 이별의 슬픔이 밀려들기는 했으나 초등학교 시절처럼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슬픔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나는 약간의 슬픔과 함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을 설레고도 있었다. 모든 감정을 소녀다운 감상으로 우아하게 제어할 줄 아는 연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이 플랫폼은 일재하의 병사들을 출영하고 전송하는 장소였다. 중 고등학교가 없던 이 고장에선 초등학교 아동들이 그런 일에 동원되곤 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인물! 한 사람은 이 나라 국왕의 후예 이은 씨였고, 또 한 사람은 일본 식민지 정책의 대표자 총독 미나미 지로오였다.

“이은 전하와 그 비 전하께 최 경례!”

하는 일인 선생의 구령소리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가 들었을 땐 이미 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특급 제일 뒤에 연결된 일등실의 전망대에 서서 우리의 경례를 받고 서 있는 젊은 그분들을 바라보며 내 어린 가슴은 뛰고 있었다.

‘정말 저분은 천사 같구나.’

옥빛 드레스를 입은 이은 씨 부인은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도저히 이 세상 사람 같지는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총독 미나미 씨가 왔을 땐 전연 달랐다. 도열해 있는 우리 앞을 차에서 내린 그가 지나가며 어떤 아이에겐 무어라 말도 걸은 듯하다. 모두가 긴장하여 뻣뻣이 서있고 어떤 아이는 울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붉은 끼가 많았고 목이 굵고 짧은 듯, 키도 큰 편은 못 되고 전체적으로 당차고 정력적인 느낌이었고 군국주의 냄새가 푹푹 나는 인물로 보였다. 이은 씨가 지나갈 때의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역은 또한 나의 4년의 긴 기차 통학의 쓰라린 추억을 갖게 한 곳, 기차 통학으로 인해서 내가 받은 굴욕과 괴로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어머니날에(어머니를 추모하며)”

1996년 5월 11일, 연합예배 때에 읽은 시

어머니!

어머니날이 돌아올 때마다
그리움이 가슴 가득 번집니다
눈물이 가슴 가득, 시야가 흐려옵니다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다면
기쁨을 드리는 딸이 될텐데… 거듭거듭 생각해도
잠드신지 이미 1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8남 1녀를 낳으시고
평생 주시기만 하시다가 가신 어머니
모든 어려움 속에서 자녀들의 방패가 되셨던 어머니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면
4년을 하루같이 새벽마다 밥 지으시고 국 끓이시던
작은 밥솥에 불 지피시던 어머니의 모습

어떻게 새벽마다 딸자식 하나를 위하여 새 밥을 지으셨는지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오는 어머니의 사랑
지금도 그 아궁이에 타던 불꽃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전해져 오는 듯

겨울이면 언제나 정거장까지 바래다주시고 또 마중 나오시던 정성
딸자식 하나에 여덟 아들에게보다 더 정성을 들이신 어머니

이제사 깨닫는 철없었던 젊은 시절
늘 병약하여 걱정하시게만 해드렸던 못난 여식은
70여 성상의 백발이 흩날리는 이제사 철들어 어머님을 생각합니다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던 맏아드님을 잃으시고도
눈물도 탄식도 보이지 않으시던 어머니

그러나 나는 배꽃 희게 피어난 어느 달 밝은 밤
어머니의 가슴 깊은 곳에 쌓여있는 눈물과 슬픔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시간, 당신은 그 아픔을, 오열을 참으며
달빛 아래 앉아 계셨습니다

조용히 모든 것을 용납하고 참으시며 살아오시는 동안
가장 인자한 모습으로 꼴 지어지신 당신의 너그러운 품성

주님을 영접하신 후 새벽마다 세수하시고 머리 빗으시고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기도하시고 성경을 펴시던…
새벽이면 이 딸과 함께 걸으신 Battle Creek의 집 drive way

의심 없이 어린 아이같이 남을 믿으시던 그 마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의의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물건 값을 깎는 일이 없이 언제나
“참 헐하다(싸다)”고만 하시며 살아오신 어머니

평생에 단 한 번
당신의 자부님이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때
“네가 내 앞에 웬 일이냐?!” 하시며 우시던 모습

어머니,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감정을 견제하실 수 있으셨는지요?

뱀을 보아도 놀라지 않으셨고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으시던 어머니

간 맛을 보시는 일이 없이 무슨 요리나 딱 딱 간이 맞는 요리사
떡 솜씨는 또 얼마나 놀라우셨는지…
무슨 요리나 어머니는 실패한 적이 없으셨지요

농사법을 강의하시진 못하셔도
채소를 일등으로 잘 가꾸시던 어머니

무가 너무 커서 한 개가 사람 머리만 하던―
감자는 대여섯 가마니씩 작은 밭에서 캐내었고

무엇이나 어머니 손만 가면 잘 되던
참말 어머니 손은 기적을 낳는 손이셨어요

어릴 때 배가 아플 때마다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며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의 그 따뜻한 손

“떡이 먹고 싶어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맛있는 떡을 쪄 주시던
이 세상에서 어머니는 자녀만을 위하여 사는 분 같았습니다

어느 누가 이 세상에 어머니 같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어머니같이 무아의 봉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어머니같이 아낌없이 자신을 줄 수 있겠습니까?

굶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기뻐하신 어머니의 생애는
지금도 향기처럼 내 마음에 풍겨옵니다

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서
그토록 지극한 사랑 가운데서 자라나서
어머님께 효성스런 딸이 되지 못하였던 이 여식은
이제사 가슴 깊이 뉘우치오며 회고에 젖어듭니다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다면
이 눈물과 한이 씻겨지리이다만―

오 주여,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어머님과 얼싸 안고 울어버리겠나이다
그 때 어머니는 내 등을 다독거리시며 미소하시리이다

주님, 어서 그날이 와서 어머니를 뵙게 하여 주옵소서
영광의 그날, 내 슬픔 달아나고 기쁜 얼굴로
주님 앞에서 어머니를 만나 뵈오리이다


3. 새로운 곳에서

그리고 그 해 여름, 올케 언니는 하얀 치마저고리, 나는 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아버지 어머니, 작은 오빠와 동생들 다섯 명, 사촌 동생, 이렇게 대식구가 S를 떠났다. 13년 동안 정들었던 이 고장, 보내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눈물을 흘린 이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하신 전근이었다. 큰 오빠가 돌아가시고 한 달 후의 일이었다.

K역에는 낯선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버지가 다니시는 회사의 직원들과 그 부인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몇몇 분들에게 이끌리어 우리가 살게 될 집으로 인도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오후 3~4시쯤이었는지―그 날 저녁 식사는 옆집에서 하게 되었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말씨조차 S와는 다른 이 고장, 오기 전의 약간의 미지(未知)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好奇心) 내지 동경과는 달리 내 마음은 향수(?)에 젖어 버렸다. 해가 성암산(聖巖山)―우리 집어서 서쪽에 있는 산―에 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내 눈에 눈물이 괴어올랐다. 종일 참고 있던 벗들에의 그리움이 한 방을 두 방울 눈물이 내 손끝을 적시었다. 그 감상을 아무도 모르게 새기며 나는 혹 들키면 하품이라도 나는 듯이 위장하며 수놓는 바늘을 더 잽싸게 놀리곤 했다.

왜 그렇게 친구들이 보고 싶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처음 얼마 동안 올케언니와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올케언니가 친정에 가서 오랫동안 아니 오게 되자 이사 왔을 당초에 그렇게 반가와 하고 좋아해서 올케언니와 둘이서 열심히 사먹던 사과도 이젠 별로 그 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실의(?) 속에 반년이 가고 나는 갓 스물의 봄을 맞이했다. 봄이 오자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S에서는 혼담이 있어도 귀 밖으로 흘려들으시던 아버지였으나 이곳에서는 적극적이 되셔서 어머니와 상의도 자주 하시곤 하는 것이었다. 양력 4월쯤이었던가 싶다. 내가 알기로는 네 군대에서 혼담이 있었는데 그 중에 경남 P에 사는 김씨가 중매한 혼담, 김씨는 전에 S에서 아버지와 같은 직장에 있었던 젊은 분이었는데, 그의 친구를 소개한 것이었다. 옆집에 살 때 그분의 어머니가 늘 “마음이 어질어서 동생들 잘 거느리니 내가 꼭 좋은데 중매해야지.” 말씀하시더니…

아버지는 이 혼담에 제일 마음이 끌리시는 것 같았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내종(고종) 동생이 중매하는 혼담에 제일 솔깃하셨고, 할아버지는 제자가 중매한 혼담에 마음이 끌리시는가 보았다. 그러니 아버지의 글방 친구가 가지고 오신 D시에서 공장 하는 집이 셋째 아들이라던가 하는 혼담은 자연 소멸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원하시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질 듯 하였다. 그 낭재(郎材―신랑감)는 학교 시절에 수재요, 모범생이었다 하며 집안도 좋다는 김씨의 보증에 아버지의 마음은 완전히 그쪽으로 기울어지신 듯 하였다. 아버지와 김씨와의 사이엔 편지가 여러 차례 오고가고 하였으며 이제 거의 결정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회사에서 퇴근하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하셨다.

“요새 젊은이들이란 알 수 없구려.”

“무슨 일이……?”

“아니, 맞선을 보자는 구려.”

“그래서요?”

“될 법이나 한 일이요? 유감이지만 그쪽에서 그 요구를 철회하지 않는 이상 이 혼담은 없던 것으로 해야지.”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한 번 보지도 않고 선택한다는 것은 참말 무리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내 눈으로 한 번 보지도 않고는 결혼할 수 없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체념(諦念)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 저희가 사람을 한 번 보고 어떻게 판단한단 말이오. 그야 인형의 얼굴을 고르듯이 외모가 반지레한지 어떤지는 알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아마 잘 못 하는 자가 많을 거요. 그래도 미더운 어른들의 지도를 따르면 안심할 수가 있지.”

할아버지의 제자 되는 분은 맹활동을 시작하셨다. 유복한 가정에 아들에게 가사를 다 맡기신 분이라 할 일도 없으신지 할아버지한테로 아버지한테로 부지런히 좇아 다니셨다. 이분은 낭재 쪽과는 일족이요, 할아버지의 제자요, 아버지의 죽마지우였다. 아버지께서 허락을 안 하시니 중매하는 분은 할아버지한테 가서 조르셨는지 어느 날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집으로 불려가셨다. 자전거를 타고 20리가 넘는 길을 가셨다가 어두워져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효자이셨다. 할아버지는,
“그래 뭐가 부족해서 이런 좋은 혼처를 마다하느냐? 낭재(郎材) 좋겠다. 집안 좋겠다.”

언제나 온유하신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향에 순종하며 살아 오셨지만 이번만은 가만 있을 수가 없으셨던지,

“아이가 몸도 약하고 일도 배운 게 없는데 어떻게 층층시하 더구나 농가에 보낼 수 있겠수? 오히려 상운(어머니 내종 동생의 자)이가 중매하는 데로 정하는 것이 아이에게 맞지 않을는지?”

어머니는 평생에 처음이었을 제의를 딸을 위해 큰 용기로 내셨을 것이지만

아버지의 말씀은,
“여아란 친정에서 배워도 시집가서 또 새로 배워 그 가풍에 맞추어서 살아야 하는 법이오. 다행히 아버님 말씀에 자경(아버지 친구의 지인 듯)이 말하는 혼처는 층층시하라니 내 집에서 못 배운 것 더 잘 배울 수 있고 그리고 상운이가 가져온 혼담은 둘짼가 셋째라니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할 터이고 아무래도 종부(宗婦)라야 사람 구실도 하고 배울 바도 많지.”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끈에 붙들어 매어진 것이다. 모든 것을 체념한 나는 그 날도 거기 몰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수놓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사람이 무게가 있고 그만하면 제 가속(家屬) 고생시키지 않을만한 사람이었소.”
낭재의 집에 다녀오신 아버지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나는 아무 다른 생각을 않으려 했다.

그 때 어머니 방에 손님 한 분이 오신 모양이었다. 어머니 방 바로 옆이 내 방이었는데 잠시 후에 어머니께서 내 방으로 건너 오셨다.

“얘야, 낭재가 보지 않고는 장가 들 수 없다 하여 하는 수 없이 데리고 오셨다는데…….”

“…….”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어머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직 한 번도 부모님을 속인 일이 없었다.

“저고리나 하나 갈아입고 잠시 만나 볼래?”

“…….”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쪽에서 그토록 원하던 혼사였다. 졸리다 못해 오늘 마침내 허락하신 아버지, 그런데 지금 낭재가 보지 않고는 장가 들 수 없단다고……. 그러나 나는 어머니께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속이는 일은 못하겠어요.”
어머니는 두 말씀 없이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손님이 돌아가시는 기척이 들렸다. 현관문이 여닫기는 소리가 난 잠시 후 부엌에서 어머니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대답을 하고 부엌에 나가니, “우물에 가서 행주 빨아 둔 것 좀 갖다 다오.” 하시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엌문을 나선 나는 뒷집 마당에 선 한 젊은이를 보았다. 우리 집과 뒷집과의 사이는 철망 울타리라 거기 서면 서로 환히 다 보였다. 나는 무안해서 얼른 우물 쪽으로 피해버렸다.

곤색 제복을 입은 키가 크고 햇볕에 타서 검은 그 청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또 좀 불쾌하였다. 생전 거짓이나 책략을 모르시던 어머니가 무슨 속임수를 쓰신 것만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곳에 앉아서 슬퍼져가고 있었다.

“얘야, 빨리 좀 가져오너라.”

딸에게 부엌일이나 바깥일을 시키시는 일이 거의 없었던 어머니가 모처럼 시키시는 일이었고 이젠 그 젊은이도 갔으려니 생각되었기에 나는 행주가 담긴 그릇을 들고 부엌 쪽으로 왔다. 그러나 목욕탕 앞에서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든 찰나 그의 어글어글한 시선과 딱 마주쳤다. 그는 한 발 물러서며 씩 웃었다.

내 마음은 소용돌이쳤다. 목안까지 뜨거워오며 울고 싶어졌다. 나는 행주 그릇을 부엌에 놓자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어머니께서 뒤따라 들어오셨다.

“엄마, 난 갈 수 없어요. 난 싫어요. 난 싫어.”

내 안달에 어머니는 기운 없이,
“얘야, 어떡하니, 이젠 어쩔 도리가 없지 않으냐?” 하셨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나는 사성을 받았다.


4. 결혼까지의 이야기

하얀 백합이 향기로운 환상 속에 하르르 떨던 그 옛날 소녀는 오직 청순하기만 하였고 그 누구의 침범도 허락하지 않을 듯 꼭꼭 닫힌 그 창문을 두들길 용사는 어데 있었는가?

연분홍 빛 신비로운 베일이 쳐져 있는 듯한 곳, 그녀를 영원한 그 자리, 여인으로서의 최상의 자리에 앉혀 줄 그 남성만이 그 문을 열 수 있었으리라. 열아홉의 나이는 이제 다하고 갓 스물의 새봄이 희망을 속삭여 줄 때, 찾아온 그 남성은 정녕 그녀가 18년여의 생애 동안 고운 꿈속에 기다리던 기사였던가? 어버이들의 뜻에 따라 중매 들어온 아가씨들 중에서 가장 자신에게 합당한 조건을 갖춘 아가씨라는 데서 울타리 넘어에서의 관찰로서 일생의 중대사를 결정짓고 백년가약의 화촉을 밝힌 신랑, 신랑은 그래도 자기 의지로 결정지었지만 신부는 그렇지 않았다.

20세라 하지만 10월이 되어야 19세가 되는 만 18세의 소녀였다. 자기보다 6,7세가 더 많은 좋은 직장에 다니는 신랑감을 두고 8개월 연하인 소년에게 시집보내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야 하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내종(고종) 사촌이 중매한 27세 청년에게 보내고 싶어 했지만 그가 차남이라는 데서 후보자 명단에서 떨어져 나가고 아직 만 18세도 채 안된 후보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쓴 것이었다. 양반이요 장남이라는 것이 나의 친할아버지가 가장 환영한 조건이었다. 중매한 분이 할아버지의 제자요 아버지의 죽마고우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가업을 다 아들에게 맡긴 한가하고 평안한 분이셔서 신랑과 같은 정씨여서 신랑 아버님이 부탁하신 중매를 위해 할아버지 집과 우리 집을 부지런히 좇아다니신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집이 우리 집에선 20 리 상거였지만 그분은 할아버지 동네 바로 옆 동네에서 사셨고 과수원도 하고 부유한 환경이라 좋은 신수에다 깨끗한 두루마기로 차려입으시고 열심히 찾아오셔서 나중에 혼사가 이루어진 후 우리 어머니가 “아마 그분이 중매하시느라 신발 한 켤레는 닳켰을 것이다” 하셨다.

그분과 같은 동네에 살고 계시던 어머니의 내종 사촌 동생이 한 청년을 중매했는데 그가 27세의 청년이었고 직장에서도 지위가 있고 어머니는 거의 동시에 세 군대에서 들어온 혼담 중에서 가장 이 혼담을 마음에 들어 좋아하셨지만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의 의향이 우선을 차지하였기에 어머니는 당신의 의사(意思)를 똑똑히 표시할 수도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저 당신의 소원을 딸에게 하소연처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곱게만 키운 당신의 딸이 농촌의 층층시하의 맏며느리로 들어가는 것이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26세(한국 나이)의 청년, 곧 예순이 오빠가 중매한 신랑감을 선호하여 그 편을 추진시키셨으나 그 후보자가 맞선을 보기 원한다는 통보가 중매하는 분으로부터 오자 그 혼담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말씀인즉 한 번 보고 어떻게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한 번 보고 결정짓는 것은 위험이 따를 확률이 클 수도 있지만 쌍방을 잘 아는 믿을 수 있는 중매하는 사람의 말을 믿고 그 혼사가 이루어지면 위험도가 훨씬 적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아버지는 “남자는 백 번 보고 안 해도 흠이 없지만 여자는 한 번 보고 안 해도 흠이 된다.” 하셨다. 그래서 이 신랑감은 후보자 명단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27세(한국 나이)의 청년은 차남이라는 조건이 흠이 되어 탈락되고 26세의 청년은 맞선 문제로 탈락되고 단독 후보로 남은 사람은 19살(한국 나이)이었다. 나보다 1살 연하인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이 같은 것은 조건에 해당된다고는 생각하시지 않는 전 세대의 어른이었다. 그리고 그는 할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한 조건을 갖춘 후보자였다. 양반집 자손이요, 장남이라는 것이었다. 방금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벌써 직장도 결정되어 있었고 중매하는 당신의 제자의 이야기에 재산도 많지는 않지만 한 삼백 석(삼백 석 꾼)은 한다니 모든 조건이 그만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시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죽마지우인 중매인이 매일이시다시피 찾아와서 졸라도 좀처럼 허락을 하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호출하시는 기별이 왔다. 그 중매인이 아버지를 직접 공격해서 뚜렷한 효과를 얻지 못하자 병법(兵法)을 바꾸어 측면(側面) 공격으로 나왔던 것이다. 즉 자신의 스승인 할아버지를 찾아가 신랑감의 모든 장점을 열거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시절에는 버스도 없었던 시절이라) 20리 길을 자전거로 달려서 할아버지 앞에 출두하였다.

“네가 어디서 그보다 더 나은 조건을 찾으려고 그 혼담에 응답하지 않고 미루고 있는 게냐?”

할아버지의 이 말씀은 출천지 효자인 아버지에게는 하늘의 분부로 받들어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의 의중을 한 마디도 아버지에게 표출할 수 없었고 나는 다만 귀먹고 벙어리 된 사람으로 지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아버지의 일은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신랑감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신상환경이 과연 중매인의 말과 같은지 알아보기 위하여 그 친구들을 통하여 그 친척을 통하여 알아보셨고 면사무소에 가서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아보셨다. 신랑감의 인품은 괜찮은 것 같다고 짐작하신 아버지는 중매인을 통해 아버지께서 직접 신랑감을 면접하기를 요청하셨다.

신랑감을 면접하는 그날이 와서 그의 숙부 되는 분의 사랑(舍廊)방에서 그를 면접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그날 밤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방에까지 들렸다. 원래 목소리가 크시지만 아버지는 마음에 흡족하셔서 그랬는지……. 아버지의 말씀인즉,

“사람이 진중하고 제 배우자 평생 고생 시키진 않을 사람으로 보였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재산만큼은 중매인의 말과 상치가 되었지만 다른 점은 아버지의 마음에 흡족하셨던 모양으로 일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신랑감의 어머니가 초봄의 어느 날 선을 보러 오셨다. 그런데 우리 집 현관에서 우리 어머니와 신랑의 어머니 두 분이 만났을 때 두 분은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구면이었던 것이다. 그전에 어머니가 볼일이 있어 동생들을 데리고 기차를 타야 했는데 두 분이 같은 기차를 타게 되어 신랑의 어머니가 보따리와 아직 어린 아들들과 힘든 상황인 우리 어머니를 도와주신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남향인 내 방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날부터 그 혼담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아버지께서 신랑감을 보고 오시자 곧 중매인이 또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이제 정식으로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신랑 집에 희보를 전하겠다는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그분은 신랑 집에서 사성(사주단자)을 받아오려고 신랑 집에 가셨다. 사랑방에서 신랑의 부친과 숙부가 신랑을 불러 사성을 쓰라 하시는데 신랑이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신랑은 아버지께서 선보러 가셔서 붓글씨까지 써보라 하셔서 합격된 사람이니(아버지는 붓글씨를 잘 쓰는 분이었다) 글씨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주단자를 써서 보내는 것은 자기의 장래를 결정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일생의 중대사를 자기가 평생 살 사람을 보지도 않고 결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어른들께서 빨리 쓰라고 재촉을 하실 때,

“제가 평생을 같이 할 사람, 저는 보지도 않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단호한 그의 한 마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그의 의사는 온 집안에서 존중되며 자라온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급히 의논을 하여 그 어머니와 그는 신부 집을 찾게 되었다. 그 어머니를 통해 사정 이야기를 들은 나의 어머니는 수를 놓고 있는 내 방에 와서 나에게 “저고리나 하나 갈아입고 보면 어떻겠느냐? 여기까지 보러 왔으니…”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던 혼담도 맞선 문제로 깨뜨리고 마셨는데 지금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다고 해서 아버지의 허락 없이 맞선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를 속이는 행위라고 생각되었다.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시집가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내가 전에는(아버지의 뜻을 몰랐을 때에는) 보지 않고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아버지는 나보다 식견이 높으시고 내게 가장 적합한 사람을 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는데 그리고 평생 내 딸을 고생시키지 않을 낭재(郎材)로 지목하고 허락하셨는데 아버지 몰래 맞선을 본다는 것은 내 마음에 허용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 아버지를 속이고 시집갈 마음은 없어요.”

나의 말에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내 방에서 나가셨다. 얼마 후…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소리가 들렸다.

“우물에 가서 빨아놓은 행주 좀 갖다 다오.”

나는 무심코 부엌문을 나섰다. 그리고 몇 발짝 걸어갈 때 뒷집과 우리 집 사이에 쳐진 철망 넘어 사람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햇볕에 그을린 건장한 젊은이였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씩 웃었다. 나는 잰 걸음으로 우물에 가서 우물가에 앉아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나의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것도 머리를 쳐들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고 한참 앉아있었다. 어머니가 부르시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빨리 좀 갖다다오, 얘야, 뭘 하고 있느냐?”

나는 할 수 없이 일어났다. 그 청년이 돌아갔을 것이라 기대를 하면서……. 그러나 그는 아직 거기 서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든 순간 그는 다시 씩 웃었다. 조금은 멋쩍은 듯이……. 그러나 그의 눈은 열렬히 눈길도 돌리지 않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총총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가 안방에 앉아계시는 어머니께 항의했다.

“나는 그 사람한테 시집 안 갈 거예요.”

어머니는,

“얘야, 지금 그런 소리 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 때가 4월이었는데 그는 집에 돌아가자마자(신랑 집은 우리 집에서 2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성을 자기 손으로 써서 보내었다. 한 달 후로 결혼 날짜가 잡혀졌다. 어머니는 날마다 초비상이 걸린 만큼이나 바쁘게 되셨다.
작성자 : 정무흠        2018-08-1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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