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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특집 | 2011년 3월호 24쪽

 경쟁적인 회사 생활, 경쟁적인 사회생활을 당연시하며 이에 적응하려는 부모는 고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한다. 대개 그런 상황 속에서 어린 자녀에 대해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기는 어렵다. 거친 말이 난무하거나 가정 분위기가 험악한 경우 또는 유아가 욕구(필요) 표현을 했을 때 무관심이나 무시로 대응하는 경우 어린아이는 좌절감을 느낀다. 심하면 폭력적 상황을 반복 경험한다. 그런 아이는 자신의 생존 자체가 위험에 처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눈치 보기’를 배운다.

 ‘팔꿈치 사회’와 아이들의 성장
 독일 말에 ‘팔꿈치 사회(Ellenbogengesellschaft)’라는 표현이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옆 사람을 팔꿈치로 쳐야만 하는 냉혹한 경쟁 사회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은 살벌한 ‘경쟁’ 사회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만 하면 끝이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무한’ 경쟁 사회이다. 우리 세대 때는 고3 때 열심히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뒤 한 10년 지나니 사람들은 중학교때부터 열심히 해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가? 이제는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부터 잘해야만 자기가 원하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아니, 어떤 이는 그것도 늦다 한다. 요즘 전국의 많은 산부인과에서는 태아영어교실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산모를 통해 태아에게 미리 영어 교육을 시켜야만 나중에 그 아이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세상은 미쳐 간다.
 여기서 잠깐 멈추어 보자. 지난 30~40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면, 갈수록 대학 준비 시간이 빨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아이들의 학습에 소화 불량이 심각한 게 아닌가? 학습과 관련해서 아이들이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는 게 아닌가? 너도나도 ‘내 새끼’의 성적을 통해 내가 가진 스트레스와 콤플렉스를 위로받고 싶어 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람들은 말한다. 경쟁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그렇다. 현실은 경쟁 없이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게다가 경쟁하면 더욱 잘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전체 사회가 한 단계씩 고양될 것이라 믿는다. 경쟁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정체된다는 논리다. 전자는 ‘현실 적응’을 강조하는 논리이고, 후자는 ‘개별노력’을 강조하는 논리이다. 얼핏 보면 다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이두 논리는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치명타를 가한다.
 첫째, 현실이 경쟁 사회, 팔꿈치 사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경쟁 사회에 순응해야 한다는 논리를 살펴보자. 그런 논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현실이라면 그런 부모는 아이들에게 경쟁 논리를 자연스레 강요한다. 특히 아이가 영유아인 경우,이 아이는 어른(부모)의 절대적인 사랑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부모와 아이의 원초적인 관계는 ‘조건 없는 사랑’을 일방적으로 베풀고 받아야 하는 관계이다. 조건 없는 사랑, 바로 이것이야말로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규정한다.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욕구(필요) 충족에 아무 장애가 없다. 자신의 욕구(필요)를 울음소리로 표현했을 때 부모가 아무런 조건 없이 수용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는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 생각을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러나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배우며 성장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하는 아이는 자율성을 가진 주체적 인격체가 된다. 그러나 경쟁적인 회사 생활, 경쟁적인 사회생활을 당연시하며 이에 적응하려는 부모는 고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한다. 대개는 그런 상황 속에서 어린 자녀에 대해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기 어렵다. 거친 말이 난무하거나 가정 분위기가 험악한 경우 또는 유아가 욕구(필요) 표현을 했을 때 무관심이나 무시로 대응하는 경우 어린아이는 좌절감을 느낀다. 심하면 폭력적 상황을 반복 경험한다. 그런 아이는 자신의 생존 자체가 위험에 처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눈치 보기’를 배운다. 그런 아이가 성장하여 학생이 되면 경쟁 사회에 익숙한 부모는 ‘네가 공부 잘하면 OOO 사 줄게.’ 또는 ‘1등 하면 OOO 해 줄게.’라는 식의 조건부 사랑을 하게 되고, 아이는 그런 것에 익숙해져 부모의 사랑을 성과(점수, 등수, 상장)로 구매하게 된다. 조건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할 부모와 자녀가 사랑과 성과를 교환하는 거래 관계에 빠진다.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어렵다.
 둘째, 우리는 흔히 경쟁이 없으면 정체한다는 말을 한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있는 반면, 경쟁을 통해 잃는 것도 많다. 특히 현재의 점수 경쟁, 상품 경쟁, 기업 경쟁을 보라. 아이들은 점수 경쟁 속에 개별 성적은 오를지 모르지만 그 아이가 그때그때 느끼고 경험해야 할 것들을 얼마나 많이 놓치는가? 학원에 가서 국영수 시험 문제를 반복적으로 외우며 점수를 높일 시간에 친구들과 맘껏 뛰놀고, 들로 산으로 신나게 놀러 다니며, 신기한 것들에 대해 호기심도 가지고 책에 나오던 내용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교육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그때마다 체험하고 느끼고 발달시켜야 하는 것이 따로 있다. 일례로 7세 미만의 아동기 때는 가급적 오감을 두루 발달시키는 것이 좋고, 그 뒤로 14세 전후 사춘기까지는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을 자연스레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는 자아와 세상에 대한 논리적 학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야 인격체가 내면적으로 잘 성숙한다. 그런데 현재 경쟁 상황 속의 아이들을 보라. 한마디로 맹목적 속도전이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 더 많이 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초등학생이 중학교 과정을 끝내고 중학생이 고교과정을 끝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점수가 더 높거나 더 빨리 성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감각, 감성, 내면은 망가진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부모가 지시하는 대로 빨리만 달려가다 보니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책임성 있게 살아가는 주체적 능력은 상실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내 꿈은 무엇인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심지어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남들이 가니까 안 갈 수 없어 대학에 진학했지 진짜 무엇을 진득하게 파헤치기 위해 진학했다는 대학생은 별로 없다. 마침내 나중에는 ‘철학 없는 전문가’ 또는 ‘전문가 백치’가 되어 세상을 망치면서도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 이런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전망이 없다.

 갈수록 팔꿈치 사회가 강화되는 까닭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 백인 학교에 북미 원주민 후손들이 전학을 왔다. 몇 달 공부한 뒤에 선생님이 시험을 보려 했다. 백인 아이들은 시험 준비를 위해 모두 책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옆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북미 원주민 후손 아이들은 책가방을 올리기는커녕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선생님이 약간화가 나서 “얘들아, 너희들은 왜 시험 볼 준비를 하지 않니?” 하고 물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저희는 어릴 적부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 협동해서 풀라고 배웠거든요!”
 그렇다. 정작 우리가 시험 문제로 다뤄야 할 것은 개별 아이들의 암기력 문제가 아니라 개별 아이나 전체 사회가 보다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근본적 질문들이다. 일례로, ‘석유 고갈 위기의 시대에 바람직한 에너지 대책과 나의 실천 방안은?’ 또는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여 두루 행복하게 살기 위한 사회 시스템의 변화 방향과 나의 실천 과제는?’ 이런 질문들이 필요하지 않겠는가?그런데 우리 학교의 현실을 보면 하루 종일 국영수에 목을 맨다.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시험을 치르고 나면 모두 까먹을 내용을 가지고 잘 외운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구분하는 이벤트를 한다. 시간 낭비, 돈 낭비, 열정 낭비다. 그렇게 해서 과연 교육의 국가 경쟁력이 올라가는가? 천만의 말씀. 진짜 교육의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면 아이들에게 필수적인 공부는 오전만 시키라. 자아발견이나 시민 소양에 필요한 공부를 중시해야 한다. 그 다음 유기농 점심을 무상 급식하고 학교 텃밭 일구기를 한 뒤 오후 내내 그리고 저녁 내내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도록 풀어 주면 된다. 부모나 교육 당국이 힘을 합쳐 해야 할 일은, 학교 안팎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흥미나 재주를 살릴 수 있는 공공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자유롭고 신바람 나게 공부하도록 여유를 주면 온 나라의 아이들이 자신의 재주를 맘껏 발휘할 것이고 교육의 국가 경쟁력은 굳이 외치지 않아도 절로 높아질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스웨덴이나 덴마크, 핀란드 같은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여기서 짚어 볼 것이 있다. 지금과 같은 팔꿈치 사회, 경쟁 사회는 인류의 초기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인류 역사의 대부분(95퍼센트 이상)은 협동 사회요 공생 사회였다. 지금과 같은 경쟁 사회는 불과 500년 내외의 일이다. 요컨대, 현재의 팔꿈치 사회는 기존의 협동 사회, 공생 사회가 파괴된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 공동체적 관계망의 파괴, 바로 그 결과가 현재의 살벌한 경쟁 사회이다. 이것은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 속에서도 발견된다. 개인(individual)의 어원은 ‘더 이상 나눌(divid) 수 없는 (in-) 존재’라는 것이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니, 그렇다면 더 큰 무엇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공동체라는 큰 덩어리에서 나누고 나누다 마지막에 더 이상나눌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 바로 개인이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던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 그것이 공동체적 인간이다. 그런데 공동체(community)라는 말도 흥미롭다. 공동체란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이다. 아하, 서로 선물을 나누는 관계이던 공동체로부터 사람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다 마지막에 홀로 남은 존재가 바로 개인이다. 결국, 개인이라는 말 속에는 공동체가 깃들어 있다. 요컨대, 우리는 개인이면서도 공동체의 구성원이요, 공동체의 일원이면서도 개성을 가진 존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각기 개성을 살리면서도 서로 협동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지 처음부터 살벌하게 서로 경쟁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온다. 팔꿈치 사회의 기원이 공동체라면, 왜 공동체가 파괴되었을까? 그 핵심은 자본주의 상품 사회, 시장경제의 등장이다. 상품의 경쟁력으로 평가를 받는 시장 경제에서는 각 개별 생산자들이 인격적 관계를 맺기보다는 계산적 관계를 맺는다. 서로 이익이 되는 경우 거래를 한다. 거래를 성립시키기 위해각 개인은 자신의 상품 경쟁력을 높이려 한다. 보다 적은 비용으로보다 많이 생산해야 하는 ‘생산성 공식’ 또는 ‘경쟁력 공식’이 모든 개인을 압도하게 된다. 그런 논리를 더 많이 ‘내면화’할수록 공동체는 급속도로 해체되고 개별화가 진전되며 전체 사회는 팔꿈치 사회로 변모한다.그 과정에서 ‘강자와의 동일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경쟁 상황에 내몰린 개인들은 생존을 위해 모두 최강자가 되고자 하며 실제로 최강자가 탄생하기도 한다. 그 최강자는 주변으로부터 칭송을 받고 추앙된다. 사람들은 그를 시기 질투하면서도 스스로 최강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심한 경우 그에 빌붙어 아부하며 마치 자신이 최강자가 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이 강자와의 동일시라는 심리적 태도를 강화하고 반복 재생산한다. 강자들은 상층부에서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면서 그 기득권에 중독된다. ‘향유 중독’이다. 기득권의 달콤한 맛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기득권층에 머물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녀들을 또 닦달한다.자기들처럼 하라고. 그러면 성공한다며. 한편, 중하층은 최상층부의 기득권을 동경하면서 그 기득권에 중독된다. ‘동경 중독’이다. 상층부 진입에 실패한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이나마 그 상층부에 진입할 수 있기를 꿈꾼다. 부모 자신은 경쟁적인 노동 시장에서 생고생을 하더라도 자녀들만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꿈꾸며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다. 부모의 무의식 속에 보상 심리나 피해 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을 아는 자녀들은 죄책감과 부채 의식 속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자신의 욕구나 필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나중에 부모와 자녀 간에 배신감이 생기거나 ‘친밀함의 소외’가 생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팔꿈치 사회에 대한 돌파구
 세상 현실은 경쟁적이다. 팔꿈치 사회는 갈수록 강화되어 마침내 ‘치킨 게임’을 한다. 치킨 게임.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두 자동차 중먼저 핸들을 꺾는 자가 패하는 게임. 살기 위해 핸들을 돌리면 패배하는 것이고, 승리하기 위해 계속 전진하면 죽음이다. 우리는 승리를 위한 죽음과 살기 위한 패배 사이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 돌파구는 무엇인가?그것은 ‘치킨 게임’ 안에서 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치킨 게임’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팔꿈치 사회, 경쟁 사회를 내던져야 한다고? 말이 쉽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인류 역사의 95퍼센트 이상이 협동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또 북미 인디언 후손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려운 문제는 서로 협동해서 풀 때’ 더 효과적이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흔히들 ‘죄수의 딜레마’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 핵심은 서로 경쟁하지 말고, 자기 혼자만 잘 살려고 하지 말고, 같이 살기 위해 서로 협동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말 아니던가! 그리고 하나 더. 서로 치열하게 생존 경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가, 아니면 서로 소통, 연대하고 협동할 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그래도 ‘현실’은 아니라고? 그렇다. 현실은 협동에 유리하지 않다.소통과 연대, 협동만 부르짖다가 굶주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경쟁만 외치는 조직, 경쟁만 외치는 사회가 지난 50년간 어떻게 변해 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50년간 어떻게 변할 것 같은가? 스트레스가더 높아질 것인가 행복감이 더 높아질 것인가? 앞으로 단지 몇 년만 더 경쟁력을 위해 달리면 그때부터는 정말 편안하게 살날이 오겠는가?
 결국,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듯이 내일은 오늘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경쟁, 경쟁 하면서 아이들을 죽도록 닦달하는 대신, 아이들이 자신의 개성을 찾아 맘껏 발휘하도록 도우면서도 서로 소통하고 협동하는 사람으로 키우면서 상부상조하는 사회, 연대와 소통의 사회를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면, 그렇다면 50년 뒤 한국 사회는 희망이 생긴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앞만 보고 계속 달린다면 아마도 50년 뒤 한국은 절벽 끝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과연 우리 아이들이 어떤 세상에 살기를 바라는가?

 강수돌
독일 브레멘 대 경영학 박사. 미국 위스콘신대 노사관계연구소 객원교수,저서 <지구를 구하는 경제,책>, <일중독 벗어나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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