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몽 후 얻은 세 딸 결혼 초, 평소 꿈을 잘 꾸지 않던 남편이 어느 날 한 꿈을 꾸었는데, 세 명의 천사가 나타나 서로 손을 잡고 둥실둥실 춤을 추면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이것을 잘 간직하라.”는 말을 듣고 깨었다며 가족들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태몽 같다.”, “딸을 낳을 꿈이다.”라고 해몽을 해주었는데 그 꿈대로 나는 첫 딸을 낳았고 그 후로도 두 딸을 더 얻어 세 공주의 엄마가 되었다. 그 당시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가족계획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기에 남들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요즘엔 딸을 선호하기도 하고 출산을 장려하기도 하니 ‘시대를 잘 맞췄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선물로 주신 세 자녀를 어떻게 신앙 안에서 키울 수 있을까? 늘 걱정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다 성장시킨 후 뒤돌아보니 어떤 심리학이나 교육학으로도 사람답게 키워지는 게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인간의 방법으론 모범 답안이 없다. 오직 말씀과 끊임없는 기도만이 우리 자녀들을 세상의 높은 파도로부터 지켜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을 먼저 내려 본다.
신앙교육을 우선으로 나는 칠 남매의 막내로서 교회 안에서 자랐다. 유년 시절에는 교회가 내 집이고 교회 마당이 내 놀이터였다. 자연스레 교회의 모든 행사가 몸에 배었고 특히 도르가 회장, 수석집사로 활동하셨던 친정 엄마의 헌신적인 모습을 통해 나는 교회와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뿌리 내린 신앙이니 결혼 후 태어날 자녀도 당연히 신앙으로 키우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이가 생후 2, 3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가장 예쁜 옷은 교회 갈 때 입는 옷으로 정해 놓았다. 딸애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스타킹을 신기고 치마를 입혔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갈 땐 옷차림부터 구별하고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성장한 후 때론 바지 입고 가면 안 되냐고 할 때도 있었지만 설득하면 잘 따라 주었다. 그리고 성경에 제시된 음식물과 그렇지 않은 음식물에 대해 가르칠 때 아이들의 식욕과 호기심 때문에 가끔은 충돌도 있었으나 대부분 엄마의 가르침을 잘 따라 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큰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거리가 멀더라도 삼육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남편을 졸랐다. 신앙하는 선생님이 계시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삼육초등학교에 보내자고 했더니 남편이 “그 학교 옆에 유명한 K 사립학교가 있는데 아이 기 죽일 일 있냐?”면서 자기는 시설이나 여건이 더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원서 마감이 끝나는 날 나는 남편을 설득하여 학교를 둘러보기라도 하자고 하여 회기동에 있는 삼육초등학교를 찾아갔다. 겨울방학이라 교정은 텅 비어 있었고 교무실에 가 보니 당직 선생님 몇 분과 교장선생님이 난롯가에 모여 계셨다. 난 속으로 이렇게 초라해 보이는 학교를 남편이 허락하지 않겠구나 생각하고 뒤돌아 나오는데 의외로 남편은 이 학교에 보내자며 결심을 해 주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왠지 평안한 느낌이 들면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렇게 세 아이 모두 고등학교까지 삼육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세 딸을 위한 기도는 멈출 수 없어요
큰애는 의료선교사를 꿈꾸며 의대에 진학했는데, 갑자기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처럼 사회에 적응하느라 의대생활 내내 힘들어했고 수련받는 병원과 조금씩 타협을 하다 보니 지금은 옛날 꿈꾸던 의료선교사의 꿈은 사라지고 현실을 쫓아가는 그리고 보다 능력 있는 전문가이기를 바라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다행히 신앙하는 짝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우리는 지금보다 더 신앙의 뿌리를 깊게 내려 환자를 돌볼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료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한시도 기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둘째는 음대에 진학하여 다니던 중 더 열심히 하고 싶어 유학을 가겠다고 하여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한 대학생활을 많이 힘들어하던 때에 찾아간 독일인 교회엔 노인 몇 분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외국서 온 학생한테 관심 두는 이가 없었단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간 개신교회는 관심과 더불어 한국 음식까지 제공해 주었다니 딸애는 마음을 자꾸 뺏기고 있었다. 이제 5월이면 모든 과정을 다 끝내고 돌아오게 된다. “어릴 때 받은 신앙이 어딜 가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아이의 말처럼 물론 희망을 갖고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심성이 착하고 남을 배려하는 효성 지극한 아이이니 믿어 본다.
막내는 대학도 삼육학교로 갔다. 위로 두 아이가 대학에 가면서 믿음이 흔들렸기에 막내만큼은 끝까지 신앙 안에서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교내 선교활동을 하면서 예쁘게 신앙생활을 해 왔다. 대학원 진학 후 공부와 실습으로 많이 피곤할 땐 가끔 꾀도 부리지만 순종하며 자기 할 일을 조용조용 잘해 나간다. 이번 학기로 대학원을 끝내고 1월부터 S대학교 어린이병원 임상심리사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했다.
신앙은 우리 가족 최후의 보루
세 아이 모두 지금 현재의 모습은 연약한 모습이다. 그래서 때론 나의 교육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융통성 없는 엄마의 신앙잣대로 구속하며 닦달한 건 아닌가 때 늦은 후회도 해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한 지위를 얻는다 해도 주님의 자녀이길 거절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지켜야 할 청년 시절(시편 119편 9~11절)에 세상 학문과 취업과 출세에 발목이 잡혀 주의 말씀을 볼 시간도 들을 시간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더욱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잠언 3장 6절) 이 모든것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마태복음 6장 33절)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늘 아버지만을 의지하길 바란다. 농부가 알곡을 바라며 씨를 뿌리듯이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여 가라지가 아닌 튼실한 알곡으로, 하늘 곳간에 들어갈 귀한 자녀로 성장하길 바라며 기도하지 않겠는가? 아빠의 꿈처럼 신앙을 끝까지 간직하는 세 딸이 되길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